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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들이 학교 갈 무렵이면 집 앞 바다 용섬에서 아침해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학교 갈 무렵이면 집 앞 바다 용섬에서 아침해가 떠오른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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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사람들이 전쟁불사를 외치고 있습니다. 파헤친 강줄기로 진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듯 그런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급박하게 돌려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갈팡질팡 잔혹한 게임에 푹 빠져 벌겋게 충혈된 눈빛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세상을 향해 증오심을 난사합니다.

그들에게서 평화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고 그런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슬픕니다. 평생을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데, 그런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 내 자신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한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 따라 나선 등굣길... "지각 좀 하믄 안 되냐"

바다를 열어 제치고 거기, 붉게 솟아오르는 저 아침 해는 평화롭기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마저 녹여냅니다. 오늘은 아프기만 한 세상일을 잠시 접어놓고 아이들 등굣길을 따라 나서기로 했습니다.

"아빠도 같이 갈겨?"
"그려, 오늘은 심호흡 좀 해보자."

우리집 앞 바다, 언제나 그 자리에 생사를 묻어놓은 묘지처럼 동그랗게 앉아있는 용섬 부근에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를 무렵이면 아이들이 등굣길에 나섭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날씨가 엄청 춥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외딴 집에서부터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앞 공터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섭니다.

전날 마을 공터에 자전거를 놓고 온 큰 아이 인효 녀석
 전날 마을 공터에 자전거를 놓고 온 큰 아이 인효 녀석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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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터진 인상이 녀석이 완전무장한 채로 자전거를 끌고 탱자나무 앙상한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느려터진 인상이 녀석이 완전무장한 채로 자전거를 끌고 탱자나무 앙상한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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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놈 인효 녀석이 전날 밤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자전거를 마을 공터에 받쳐 놓고 왔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녀석들의 오른쪽 어깨 너머로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한 아침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윗녘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이 내렸다지만 아직 이곳 아랫녘 고흥은 늦가을 날씨입니다. 그래도 바닷바람이 거칠게 몰아칠 때면 제법 겨울답습니다. 느려터진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이 초겨울 채비로 자전거를 끌고 탱자나무 앙상한 언덕길을 힘겹게 뒤따라 오릅니다.

요즘 기타에 푹 빠져 노래 만들기에 한창인 인효 녀석은 두 손을 잠바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놓고 여유만만하게 뭔 노래인지 중얼거리고 있다.
 요즘 기타에 푹 빠져 노래 만들기에 한창인 인효 녀석은 두 손을 잠바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놓고 여유만만하게 뭔 노래인지 중얼거리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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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느린 인상이 녀석이라지만 내리막길에서는 기세 좋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댑니다. 요즘 기타에 푹 빠져 노래 만들기에 한창인 인효 녀석은 두 손을 잠바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놓고 여유만만하게 뭔 노래인지 중얼거립니다. 얼마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에 날개를 달고 구름 위로 날아올라 볼까'라는 가사 말이 들어 있는, 제법 그럴듯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끝자락에 서있는 인효 녀석은 요즘 콧노래를 흥얼거릴 만합니다. 벌써부터 방학이나 다름없습니다. 충남 홍성에 자리한 홍성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지원해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입니다. 살판 났습니다. 녀석은 중학교 내내 꼬박꼬박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등 부조리한 세상에 나름 반기를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우리 부부나 녀석이나 시험지에 코를 박고 친구들과 무한경쟁의 전선에 나서야 하는 일반고등학교는 내심 걱정스러웠는데 아주 잘됐습니다.

녀석은 머리 굴리는 일에는 탁월한 소질을 보이지만 몸 굴리는 일에는 고개를 외로 꼬곤 합니다. '더불어 사는 평민을 키우는' 농사일을 비롯한 의식주 공부를 할 수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의 생활은 녀석에게 분명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녀석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큰 공부가 아니더라도 경쟁을 강요하지 않는 지혜로운 선생님들에게서 겨자씨만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부모로서 그것으로 족합니다. 자유로운 생각과 땀 흘리는 노동을 통해 녀석의 노래는 지혜롭게 깊어질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인상이 녀석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앞으로 음흉한 웃음을 띠고 슬금슬금 다가옵니다. 녀석의 한 손에 갈대가 쥐어져 있습니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듯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칩니다.
 인상이 녀석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앞으로 음흉한 웃음을 띠고 슬금슬금 다가옵니다. 녀석의 한 손에 갈대가 쥐어져 있습니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듯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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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녀석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앞으로 음흉한 웃음을 띠고 슬금슬금 다가옵니다. 녀석의 한 손에 갈대가 쥐어져 있습니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듯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칩니다.

"헤, 저 눔 짜식이. 잠깐만! 거기 서 있어 봐봐!"
"아빠, 이러다가 우리 지각해. 얼른 가야 혀."
"지각 좀 하믄 안 되냐?"
"어이구, 참 그게 학부모가 할 소리여? 잘못 하믄 통학버스 놓친다니께."
"짜식아, 그람 마을버스 타고 가믄 되잖어. 뭐시가 그리 급혀. 선생님이 지각했다고 뭐라 하시면 아빠가 놀고 가자고 해서 늦었다구 솔직히 얘기혀."

이만한 보석 또 없습니다... "재미있게 놀다와라잉"

두 녀석이 아침 햇살 솟아오르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게 벅찬지 바다만큼이나 긴 호흡 끝에 환하게 웃습니다
 두 녀석이 아침 햇살 솟아오르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게 벅찬지 바다만큼이나 긴 호흡 끝에 환하게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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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녀석이 언덕 위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봅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통학버스 탈 생각으로 앞만 보고 걷다보면 저 삼삼한 바다 풍경은 늘 뒤로, 자꾸만 뒤로 물러서기 마련이지만 바다 앞에 멈춰 서면 바다도 멈춥니다. 녀석들의 품안으로 고스란히 바다가 안겨 들어옵니다.

"어떠냐? 이만한 보석이 또 어디에 있겠냐."
"보석? 없지. 이만한 보석이 어디에 있어..."
"그렇지!"

두 녀석은 아침 햇살이 솟아오르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게 벅찬지 바다만큼이나 긴 호흡 끝에 환하게 웃습니다. 보석보다 더 찬란한 웃음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본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자연을 닮았습니다. 자연을 닮은 아이들의 환한 웃음 자체가 보석입니다. 급히 서둘러 사회구조의 틀 속에 꿰맞추는 순간 세상 아이들의 보석은 가뭇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없고 낡은 쇠붙이와 같은 어른들의 생각만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니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다 놓치고 살게 되는겨. 뭔 얘기 줄 알어?"
"조금은...."
"어뗘? 아침에 아빠 차타고 쌩하니 가는 거 보담 이렇게 쉬엄쉬엄 가니께 훨씬 좋지?"
"응, 좋네 좋아. 바다가 새롭게 보이구..."
"천천히 가두 안 늦어. 오분 정도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 그 차이일 뿐여."
"그러네."

바다를 눈부시게 바라보다가 녀석들이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딘가에 녀석들만의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눈부시게 바라보다가 녀석들이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딘가에 녀석들만의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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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바다를 가슴 벅차게 채워놓고 녀석들이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딘가에 녀석들만의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일까? 그 목적지는 적어도 통학버스가 기다리는 마을 공터는 아닐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녀석들도 모르고 나도 모릅니다. 아니, 적어도 그 목적지의 끝이 어디라는 걸 아이들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끝자락은 너도 알고 나도 압니다. 다만 그 목적지를 향한 걸음걸이가 다를 뿐입니다.

급하게 가다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기에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뛰어갑니다. 그 정신없는 뜀박질에 밟혀 누군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인정사정없이 뛰어갑니다. 무엇이 그리 급할까요?

녀석들이 바다를 등지고 이번에는 멀찌감치 큰 산을 감싸 안으며 마을길로 내려섭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따라 나설 영역이 아닙니다. 녀석들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할 길입니다. 다만 녀석들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길 바라며 그 길에 한 마디 덧붙여 줄 따름입니다.

"재밌게 놀다 와라잉!"

그렇게 녀석들의 꽁무니에 큰 소리를 매달아 줍니다. 소리치고 보니 오랜만입니다. 녀석들이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늘상 입버릇처럼 해주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언제쯤 했는가 싶습니다. 한동안 여유를 놓치고 바쁜 일손을 꼭 쥐고 달려왔던 모양입니다.

녀석들이 제 갈 길로 떠난 무심한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되돌아서는데 저만치 바다에서아침 해가 한 뼘 이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갈 길로 떠난 무심한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되돌아서는데 저만치 바다에서아침 해가 한 뼘 이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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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이 제 갈 길로 떠난 무심한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되돌아서는데 저만치 바다에서 아침 해가 한 뼘 이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붉은 빛도 옅어졌습니다. 순간순간 한 생인 듯 시나브로 빛이 변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들꽃을 만났습니다. 여태 지지 않고 피어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터인데 새삼스럽습니다. 그만큼 한동안 여유를 놓치고 살아 왔던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도 만나지 못한 듯 들꽃이 낯설게 다가와 가만히 눈을 맞춰 봅니다. 좀 더 가까이 여유를 가지고 눈을 맞출수록 꽃이 해맑게 웃어줍니다. 여유만만하게 웃어줍니다. 세상 아이들의 웃음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들꽃을 만났습니다. 여태 지지 않고 피어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터 인데 새삼스럽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들꽃을 만났습니다. 여태 지지 않고 피어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터 인데 새삼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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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픈 세상, #바다 등굣길, #느리게, #아이들의 웃음,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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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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