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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조문객이 리영희 선생 영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5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조문객이 리영희 선생 영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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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보강: 6일 오전 10시 4분]

"설거지 해주던 남편 리영희 기억나"
가족과 선·후배 등 지인들이 기억하는 '인간 리영희'는?

세상은 고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부르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리 선생은 투사같은 이미지와 달리, 농담을 잘하는 등 유쾌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는 게 지인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5일 오전 리영희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인의 가족, 친구, 선·후배 등 지인들이 말한 '인간 리영희'를 정리해봤다.

# "설거지 해주던 사람" - 부인 윤영자씨

"가정에서 권위적이거나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사 일을 도와주는 파출부 아주머니와 항상 같이 밥을 먹었다. 모두를 동등하게 대한다. 설거지도 운동 겸해서 자주해줬다. 그게 기억난다.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눈물이 많이 난다. 생전에 <리영희 평전>도 드렸다. 2일 81번째 생일을 맞아 문병 온 사람들을 다 맞았다. 그걸 기다린 후, 생일 뒤에 이렇게 운명한 것 같다."

# "결혼식 주례도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

"1970년대 당시 제적된 학생들과 계간지 <창작과 비평>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 댁을 많이 방문했고 정월 초하루 세배도 많이 했다. 나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1975년 영등포 구치소에서 나온 후, 서울 화양동에 있던 리영희 선생 댁을 많이 드나들었다. 그해 내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리영희 선생의 주례 '데뷔'가 내 결혼식이었는데, 비교적 잘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웃음) 주례사에서 약속을 잘 지키라고 하셨다. 당시 '성혼선언문'이라는 게 있었다. 거기에 '국가에 봉사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리 선생은 '국가'라는 단어를 지우고 '사회'라고 고쳐 넣었다. 파쇼적이기 때문에 '국가'를 빼라고 했다.

10일 전 리영희 선생을 찾았을 때, 사모님이 '유 서방이 왔다'고 했는데…. 리 선생은 20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다."

# "외강내유형 저항적 저널리스트" -  이강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리영희 선생이 1972년부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전임교수로 온 뒤 40여 년의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외강내유'형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카리스마가 넘쳐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른다. 정이 많았고, 농담을 잘했다.

당시 리영희 선생이 신문에 올바른 소리를 할 때마다 동료 교수들은 '무슨 일 당하는 것 아닌가'하고 전전긍긍했던 일이 생각난다. 항상 사실보도에 입각한 진실 보도에 힘을 쏟았다. 미국 관련 기사를 쓸 때는 미국 의회 자료를 다 훑어보고 썼다. 압력에 굴하지 않는 저항적 저널리스트이자 사회비평가였다. 중국의 노신과 미국의 촘스키와 비교할 수 있다. 아, 근데 촘스키는 감옥에 안 가지 않았나."

# "천진난만한 분" - 정범구 민주당 의원

"리영희 선생이 1985년 독일(당시 서독) 하이델베르크 소재 독일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한 학기 머물렀을 때, 많이 찾아뵈었다. 난 당시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공부 중이었다. 그 때 개인적인 인연을 쌓았다.

1997년 월간사회평론 <길> 신년호에서 리 선생과 대담을 하는 등 여러 차례 인터뷰하기도 했다. 당시 대담의 제목은 "'내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영원한 소년"이었다. 리 선생은 '사상의 은사', '투사'로 많이 부각되지만, 리 선생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잊지 못한다.

1990년대 초에 경기 군포시 산본의 리 선생 자택에 놀러간 적 있다. 자택 뒤편 수리산에 등산을 갔는데, 보온병에 위스키를 담아오셨다. 리 선생은 이미 그때 간이 안 좋아서 술을 못 마셨는데, '자네들이 마시라, 난 냄새만 맡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온병 뚜껑에 담긴 위스키 냄새를 맡으면서 보였던 천진난만한 웃음을 결코 잊지 못한다."

# "평화주의자" -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1960년대 10여 년간 <조선일보>에 함께 있었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한겨레> 초대 부사장으로서 리영희 선생을 논설고문으로 모신 일도 기억난다. 리 선생은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글을 썼다. 패권주의, 파시즘에 의한 전쟁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계셨으면,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셨을 것이다."


[4신: 오후 9시51분]

세상과 불화한 의인, 시대의 등불, 인생의 사표…

5일 오후 7시 30분께 고 리영희 선생 빈소에서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리 선생의 부인 윤영자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1989년 <한겨레> 방북 취재 계획을 세웠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구속된 리영희 선생을 변호하며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천 최고위원은 윤씨에게 "리영희 선생님은 존경받은 분이었다"고 했고, 윤씨는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대답했다. 천 위원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염두에 둔 듯 "2년 더 사셔서 좋은 세상을 보고 가셔야 했는데…"라고 하자, 윤씨는 "천정배 (전) 장관이 잘해 (정권을) 꼭 잡아야 한다"고 전했다.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고 리영희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첫날인 5일 시민사회·정치권·학계·언론 등 각계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고인을 '세상과 불화한 의인', '시대의 등불', '인생의 사표' 등으로 회고했다.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장이자, 1960년대부터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이끌며 리영희 선생과 인연을 맺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오후 6시께 빈소를 찾았다. "한마디 해 달라"는 취재진의 요청에 백 교수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은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살아오신 세월 동안 의인은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며 "늘 올곧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후학들은 리영희 선생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김주언 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 등 언론계 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 시민사회 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1989년 방북해 '통일의 꽃'이라고 불렸던 임수경씨와 최근 '유쾌한 100만 민란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영화배우 문성근씨도 조문했다.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은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셨어야 했다"며 "현재 절망 같은 상황이지만, 4대강 사업 등에 대해 후학들이 한마음으로 열심히 반대하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의 유지도 그런 뜻일 것"이라고 전했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바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시대의 등불이었다"며 "세상을 밝혀줄 사람이 없어 혼란스러운 시대에, 이렇게 가셔서 더욱 아쉽다"고 전했다.

정치인들도 장례식 방명록에 빼곡히 이름을 적었다. 이해찬·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함께 천정배·이미경·정범구·백원우(이상 민주당)·이정희·강기갑·권영길·홍희덕(이상 민주노동당)·조승수(진보신당)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김두관 경상남도지사,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등도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는 "많은 젊은이들이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고 이 사회에 대한 시각을 깊이 깨우쳤다, 선생님의 역할이 그리워진다"고 전했고,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선생님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마음을 이어받아 그 뜻을 실현시키겠다"고 전했다. 또한 유시민 원장은 "참 멋지게 사셨다, 인생의 사표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정부·여당에서는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근조화환을 보냈을 뿐, 빈소를 방문한 인사는 없었다.

한편,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위원장 고은, 백낙청, 임재경)는 8일 오전 6시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하고, 오후 4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하관식을 하기로 하는 등 장례 절차를 확정지었다.

[3신: 오후 3시 46분]

"선생님 없이 이 시대 헤쳐나가야 하다니 가슴 아프다"

오후 들어 리영희 선생의 빈소를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이 많이 찾았다. 오후 1시 50분께 빈소를 찾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마무리됐다"며 "앞으로 선생님 뜻을 받들어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생전에 꿋꿋했던 선생님이 이렇게 가셨기 때문에, 서글프고 안타깝다"며 "부디 좋은 곳에 가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정범구 민주당 의원은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냉전으로 회귀하면서 과거와의 유물과 싸워야 한다는 게 참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빈소를 찾은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는 "선생님은 참언론인이었다"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분단이나 중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셨고, 이 때문에 사회·역사 문제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리영희 선생님은 너무 아쉬울 때 가셨다, 선생님 없이 이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게 가슴이 아프고 큰 부담이 된다"며 "이 사태가 끝나고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보내드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말을 못하겠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빈소에는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안희정(충남)·이광재(강원) 지사, 천정배(민주당)·권영길(민주노동당)·조승수(진보신당) 의원, 유시민(국민참여당)·노회찬(진보신당) 전 의원 등의 근조화환이 도착했다. 정부 쪽에서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화환을 보냈다.

한편, 이날 트위터에서는 리영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쏟아졌다.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중국 노신선생과 함께 제 대학시절 방향을 정해준 '사상의 은사'였다,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 시대 양심의 스승이 떠나셨다"고 했고, 같은 당 천정배 최고위원은 "독재 탄압에도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고 소신껏 행동하신 지식인의 귀감이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2신: 낮 12시 40분]

"선생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 안타깝다"

5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리영희 선생의 빈소가 마련돼, 조문객들의 조문이 시작됐다.

리 선생의 아들 건일(49·삼성SDS 부장), 건석(46·녹색병원 외과 과장)씨와 딸 미정(48), 사위 오석근(49·KT파워텔 전무)씨 등은 이날 오전 일찍부터 조문객들을 맞았다. 둘째 아들 건석씨는 "아버지는 간경화가 심해 복부가 차 호흡하는 데 힘겨워하셨다, 편안하게 가시라고 진통제를 놔드렸다"며 "아버지는 3주 전부터 대화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부터 리 선생의 언론인 선후배를 포함해 시민사회 각계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영전에 고개를 숙였다.

1960년대 리영희 선생과 <조선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은 "1960년대 당시 신문이 박정희 정권의 통제를 받고 있을 당시,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던 리영희 선생이 기억난다"며 "또한 <한겨레> 창간 이후 리 선생을 <한겨레> 논설고문으로 모셨던 일도 생각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날 조문객들은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창했던 리 선생의 타계를 더욱 안타까워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리 선생은 생전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려고 했다"며 "리 선생의 지혜가 필요한 2010년 이 시점에서 리 선생이 타계해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다.

한편, 리영희 선생의 장례는 4일장으로 민주사회장으로 진행된다.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재경 초대 <한겨레> 부사장, 고은 시인으로 결정됐다. 또한 고광헌 <한겨레> 사장, 박우정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이사장 등이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리영희 선생의 영결식은 8일 오전 6시 30분에 진행되며, 이어 리 선생의 영현은 오전 10시 경기 수원시 연화장으로 옮겨져 화장된다. 평안북도 운산 출신인 리 선생의 장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로 잠정 결정됐다. 아들 건석씨는 "아버지가 직접 장지를 국립 5·18 민주묘지로 선택하셨다"고 밝혔다.

간경화로 투병중이던 리영희 선생.(지난 8월 모습)
 간경화로 투병중이던 리영희 선생.(지난 8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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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수정 : 5일 새벽 3시 20분]

'한국 현대사의 증인'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이 타계했다. 향년 81세.

리영희 선생은 지병인 간경화로 투병중이었는데, 5일 새벽 0시 30분경 끝내 사망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선생은 지난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재직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하여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같은해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한 뒤 1972년까지 합동통신 등에서 외신부장을 지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재직중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 복직했으나 같은 해 다시 해직된 뒤 1984년 복직하였다.

1988년 한겨레신문사 비상임이사 및 논설고문을 지냈으며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했다.

저서로는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분단을 넘어서>(1984) <역설의 변증>(1987) <자유인, 자유인>(199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스핑크스의 코>(1998) <반세기의 신화>(1999) 대담집 <대화>(2005) 등이 있다.

선생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체제를 신랄히 비판하고 그들의 허위의식을 벗겨내는 언론과 저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면, 그로 인해 수 차례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다. 특히, 70-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의 의식을 일깨워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태그:#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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