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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금)

여행 50일째를 넘어서면서 점점 더 마음이 급해진다. 여기저기서 언제 여행을 끝낼 건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참 이거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답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예측하기가 힘들다. 당장 오늘의 여행 목적지인 통영을 돌아 나오는 데만 해도 이틀이 될지 사흘이 될지 알 수 없고, 제주도 다음으로 크다는 거제도를 돌아 나오는 데는 또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안선으로만 따지자면 거제도가 제주도에 비할 바 없이 길다.

전화를 하는 사람들마다 왜 그렇게 여행이 길어지는지 알 수 없다는 투다. 설명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다. 우리나라 해안선이 길고 복잡하다는 건 모두 인정을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긴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는 것 같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는 일이다.

하루 종일 달리고 달려서, 아침 일찍 출발한 지점을 바다 너머로 빤히 건너다보아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때로는 그 바다 너머에서 마을 방송을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정말 다리에 힘이 쫙 빠져 버린다. 그런 날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요즘 가끔 드는 생각이 내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이 여행을 떠나려 했을까 하는 거다. 만약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여행을 떠날 결심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지금처럼 여행 코스 전체를 해안선을 따라가는 무지막지한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갑구나 후배야, 든든하구나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남일대해수욕장.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남일대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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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맑은데 먼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다. 며칠째 따뜻한 날이 계속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늘은 진주에 사는 후배가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오전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5분 전부터 전화가 온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후배는 자전거로 진주에서 삼천포항까지 약 30㎞를 달려왔다. 아침부터 꽤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다. 마음이 든든해진다. 오늘 하루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 먼저 들른 곳은 남일대해수욕장이다. 예전에도 삼천포항에서 남일해해수욕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는 거리가 사뭇 가까운 느낌이다. 동행이 있다는 게 이런 차이가 있다. 같은 거리를 가도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도 힘이 조금 덜 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제보다는 확실히 속도가 빨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일대해수욕장은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백사장에서 바라다보는 경관이 무척 아름답고, 물이 깨끗해 한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넘쳐난다. 게다가 모래알까지 고와 다른 지역의 크고 유명한 해수욕장 부럽지 않다. 모래사장이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편이다. 남일대해수욕장은 사천시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남일대해수욕장을 떠나서는 상족암군립공원을 찾아간다. 산을 오르는 길고 높은 도로를 타고 올라가 고성공룡박물관 앞을 지나서는 고개 아래 제전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서쪽에 상족암군립공원으로 들어서는 산책로가 나온다. 상족암군립공원은 해안에 우뚝 선 기묘한 바위 절벽으로 유명하다. 마치 기왓장을 겹겹이 포개 놓은 것 같은 바위가 머리 위로 높이 솟아 있다.

해안으로 돌출한 바위 일부가 코끼리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상족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위 절벽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어, 그 안을 통과해서 반대편 해변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오랜 해식작용으로 인해 생긴 구멍이다.

공룡발자국
 공룡발자국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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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족암군립공원은 해변의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공룡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위 위로 공룡이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어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자국 끝 부분에 발톱 자국이 나 있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다.

수천만 년 전 공룡이 걸어간 흔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묘하다. 이 발자국에, 흙덩이가 돌로 굳어지는 동안의 오랜 세월이 압축돼 있다. 감히 상상하기 힘든 세월이다. 공룡 발자국은 겉으로 드러난 바위 표면뿐만 아니라, 켜켜이 쌓인 바윗돌 안에도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수천만 년 전 한반도에서 살다 간 공룡의 역사가 종이 위에 찍힌 활자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돈을 가방에 쓸어담았을 그 시절은 가고...

상족암군립공원 바위 동굴. 반대편 해변으로 건너가는 구멍.
 상족암군립공원 바위 동굴. 반대편 해변으로 건너가는 구멍.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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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앞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36년 동안 이 일을 했다는 할아버지 이마 위를 지나가는 주름살이 공원 절벽 켜켜이 쌓인 기왓장 바위를 닮았다. 그 주름살에는 또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

3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공원 뒤로 도로가 지나가고 박물관이 들어섰다. 그 전에는 이곳에까지 오려면 산을 넘어오는 오솔길밖에 없어, 관광객들이 대부분 유람선을 타고 왔다고 한다.

할아버지 말이, 그때는 관광객들이 지금보다도 더 많아 그들을 상대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당시가 할아버지의 황금기였음이 틀림없다. 카메라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모두 옛날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 얼굴에 황금과도 같은 밝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볼 수 있다.

할아버지는 이제 기념사진 찍어주는 일로 겨우 담뱃값 정도를 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이 일이 이제 할아버지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절벽 아래 자신이 찍어온 견본 사진들을 죽 늘어놓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꽤 차분하다. 앞으로도 십여 년 이상은 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성 해안의 한 도로공사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기자.
 고성 해안의 한 도로공사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기자.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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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족암군립공원을 나와서 계속 산길을 넘어간다. 이 지역은 내륙이나 해안을 가리지 않고, 언덕 길 아닌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서 뒤따라오는 후배가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침 일찍 진주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온 데다, 계속 산길을 넘어가고 있는데 그걸 견딜 장사가 얼마 없다. 공연히 날 따라온다고 해서 고생이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는 산길이나 해안 절벽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데, 실제는 돌산도나 남해도 못지않게 언덕이 많다. 나야 벌써 수십일 째 이런 길을 가고 있지만, 후배는 이런 길이 꽤 오래간만일 것이다. 선배한테 대놓고 투정은 못하겠고, 뒤에서 헉헉대며 따라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음에 같이 어디 자전거여행을 가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후배는 집으로, 집 생각이 간절한 밤이다

고성 해안도로 변의 굴 양식장
 고성 해안도로 변의 굴 양식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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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면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을 하니까 밥을 먹는 일도 훨씬 수월하다. 혼자냐고 묻는 사람도 없고, 뭘 먹어야 할지 묻지 않아도 된다. 메뉴를 편하게 골라서 먹는다. 매운탕을 주문하는데 두 말 없이 오케이다. 매운탕 맛이 꿀맛이다.

꿀맛도 잠시, 점심을 먹고 나서는 다시 정신없이 언덕을 오른다. 먹은 게 다시 올라올까봐 걱정이 될 정도로 힘들다. 역시 평탄한 구간을 찾아볼 수가 없는 길이 계속 이어진다. 해안 쪽 도로 역시 평탄한 길보다는 해안 절벽을 오르내리는 경사 길이 더 많다. 편안하게 쉬어갈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언덕이 계속 나타나면서 후배가 따라오는 속도도 점점 더 늦춰지고 있다.

5시경 고성읍을 지나면서, 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후배에게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단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얼굴은 꽤 피곤해 보인다. 어쨌든 기왕 달리는 거,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는 달려볼 참이다. 다행히 통영시 외곽에 도달했을 무렵 해가 똑 떨어진다. 그때쯤 후배의 체력도 거의 바닥이 나고 만다. 다리에 쥐가 나, 더 이상 달리려고 해야 달릴 수가 없다. 오늘 하루 진주시에서 통영시까지 100㎞를 넘게 달렸는데 좀 피곤할까?

저녁을 먹고 나서 바로 후배와 헤어진다. 통영에서 진주까지 고속버스로 1시간 가량 걸린단다. 진주를 떠나온 시간에 비하면, 되돌아가는 시간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자전거여행은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고통과 난관이 뒤따른다. 그런 여행 아닌 '고행'을 끝마치고는 환한 얼굴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후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나는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집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지는 밤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8㎞, 총 누적거리는 3452㎞다.


태그:#상족암군립공원, #남일대해수욕장, #통영, #공룡, #공룡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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