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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드라마 <근초고왕>. 사진은 고구려 고국원왕 역할을 맡은 탤런트 이종원.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사진은 고구려 고국원왕 역할을 맡은 탤런트 이종원.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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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왕들은 본명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태어날 때에 부모가 붙여준 이름보다는 죽은 뒤에 신하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역사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왕이 죽은 날로부터 며칠 안에 신하들이 죽은 왕의 업적이나 이미지 등을 고려해서 세종이니 성종이니 숙종이니 하는 묘호를 짓곤 했다.

이렇게, 왕에게 사후(死後)의 명칭을 부여하고 그 이름으로 왕을 기억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왕들은 자신이 사후에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의식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본명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흥미로운 사실에 접할 수 있다. <근초고왕>에 등장하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왜 그런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음미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고국원왕'이란 칭호 역시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사유'다. 또 고국원왕이란 명칭은 업적이나 이미지를 기초로 제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면, '들판'을 뜻하는 원(原)이란 글자가 칭호 안에 들어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국원(故國原)은 고구려왕 사유가 묻힌 들판의 이름이었다. 고국(故國)이란 곳의 들판(原)에 묻혔다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고구려 왕들의 칭호와 무덤의 위치 간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제시하는 표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28명의 고구려 군주 중에서 42.9%에 해당하는 12명의 칭호가 무덤의 위치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녹색 바탕으로 된 칸은 무덤의 위치와 왕의 칭호가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키고 있다. 이 표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무덤의 위치를 근거로 왕의 칭호를 제정한 시기가 상당 기간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시기의 후반부에 고국원왕이 등장했던 것이다.

고구려 왕들의 칭호와 무덤의 위치.
 고구려 왕들의 칭호와 무덤의 위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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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국원왕'에서 위쪽으로 2번째에 있는 봉상왕의 경우, '봉상'과 '봉산'이 다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봉상이란 명칭은 '봉의 위'란 뜻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봉산과 같은 것이다. 

그럼, 무덤의 위치를 근거로 왕의 칭호를 제정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나라가 평온할 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토가 팽창하거나 줄어들어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긴 왕들의 경우에는, 그가 어디에 묻혔는가가 그의 성패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수도 인근에 왕릉을 조성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왕이 적의 침공을 막지 못해 수도를 빼앗겼다면, 새로운 수도 인근에 그의 무덤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무덤의 위치는 그의 실패를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반대로, 어떤 왕이 중국 북경을 점령하고 그곳으로 천도한 뒤에 죽었다면 그의 무덤은 북경 근처에 조성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왕이 있었다면, 그는 '북경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왕의 칭호는 그의 성공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고국원왕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죽은 뒤에 붙여진 고국원왕이란 칭호는 그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국내성을 고국천·고국양·고국원 등으로도 불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그 이유를 탐구해 보기로 하자.

고국원왕이 '고개숙인 남자'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국내성의 위치.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국내성이다. 그림은 4세기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등학교 <국사>에 수록되어 있다.
 국내성의 위치.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국내성이다. 그림은 4세기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등학교 <국사>에 수록되어 있다.
ⓒ 교육인적자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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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수도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편에는 2가지 설(說)이 제시되어 있다. 제1설은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에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이고, 제2설은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에 '고국원왕이 재위 13년에 평양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국내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따옴표로 묶인 부분이 제1설과 제2설의 차이점이다.

선비족 국가인 전연(前燕)의 대대적 침공으로 고구려 수도가 송두리째 불탄 시점이 고국원왕 12년 11월(양력 342.12.14~343.1.12)이고,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함으로써 고구려가 평양성을 빼앗긴 시점이 고국원왕 41년 10월 23일(371.11.16)인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제2설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불탔으면 남쪽인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순리적이고,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와 싸우다가 전사했다면 그 당시 그곳이 고구려 수도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제2설이 타당하다는 전제 하에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의 역사를 기록했다.

고국원왕 12년과 41년에 벌어진 사건들을 볼 때, 우리는 고국원왕이 재위 13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한 사실이나 그가 재위 41년에 평양성에서 전사한 뒤에 고국원 즉 국내성에 묻힌 사실이 그의 정치적 실패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재위 13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은 백제·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는 선비족 국가인 전연의 압박을 피해 그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그가 사후에 국내성에 묻힌 것은 북진정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백제의 압박에 밀려 평양성을 잃었기에 평양성 근처에 묻히지 못하고 국내성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덤의 위치인 고국원을 따서 고국원왕이라 불린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당시의 고구려 왕실로서도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고국원왕이란 칭호는, 전연에게 밀리고 백제에게 밀려 샌드위치 신세가 된 당시의 고구려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죽어서 후회말고 살아있을 때 잘해라, 국민에게

통구분지 평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국내성. 동그라미 안이 국내성이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찍은 것으로서 <고구려 문명기행>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통구분지 평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국내성. 동그라미 안이 국내성이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찍은 것으로서 <고구려 문명기행>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 고구려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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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의 사례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한때 무덤의 위치를 근거로 왕의 칭호를 제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여 수도를 옮기고 그곳에서 사후에 묻히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의 정치적 성패가 자기 칭호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왕들은 자신이 어디에 묻힐지를 염려하면서 혹시라도 수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한국 군주들은 자신이 사후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업적이나 이미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덤의 위치가 자기 칭호가 되든지, 사당의 명칭이 자기 칭호가 되든지, 그 외의 시호가 자기 칭호가 되든지 간에, 왕들은 태어날 때에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죽은 뒤에 신하들이 지어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억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대한민국 대통령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공식 칭호를 붙인다면 어떨까? 업적이나 행적 혹은 이미지를 근거로 퇴임 후에 대통령의 공식 칭호를 만든다면 말이다. 어떤 사람은 '하와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십구 만원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대통령들이 느끼게 될 스트레스는 한층 더 고강도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시호나 묘호 같은 제도를 현대 한국에 도입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제도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사후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항상 청와대를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만 쳐다볼 게 아니라, 경복궁 너머 청와대도 한번쯤 쳐다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임기만 채우고 나가면 그만'이라며 '이렇게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에, 내가 속한 계층의 뱃속이나 실컷 챙겨놓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대통령들이 나오지 않고, 백년·천년 후에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대통령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민적인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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