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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금)

자전거가 심상치 않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계속해서 사람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은 소음이 나고 있다.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다. 그 소리가 자동차 소음만큼이나 크다. 두 달도 안 돼 3000km를 달렸으니, 사실 어딘가 고장이 나도 크게 날 때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견뎌온 것도 대단하다.

숙소를 떠나 몇 km를 가지 못해 멈춰 선다. 귀가 아플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파서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자전거에서 나는 소음이 '더 이상 못 달리겠어. 차라리 날 죽여' 악다구니를 치는 소리처럼 들린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 사람 목소리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놈이 말은 하지 못하지만 비명은 지를 줄 아는구나, 뭐 그런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나 역시 견디기 힘들다. 결국 자전거를 멈춰 세운다. 혹시 체인에 윤활유가 없어 그런가 싶어 오일을 잔뜩 바른다. 너무 많이 발라서 오일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걸로 소음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 같지는 않다. 어쨌든 당장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여기까지다.

체인에 오일을 바르고 난 뒤, 한동안은 멀쩡하다. 소음이 말끔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역시 오일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면서 소음이 되살아난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엔 디스크 브레이크 때문인가 싶어 디스크와 브레이크 패드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야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착한 자전거를 처음 사용한다. 장거리 여행에 손에 익지 않은 기계 장치를 단 게 잘못이다.

자전거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이제는 자전거 수리가 가능한 곳까지 가서 제대로 정비를 받아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려면 여수시까지는 가야 한다. 순천시에서 여수시까지 국도로 20km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가면 70km 가까이 된다. 그 거리를 소음에 시달릴 일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어쩌랴. 이 역시, 바닷가 여행에서 감내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인 걸.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몇 안 되지만, 그 사람들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어디서 사람 멱따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요상하게 생긴 자전거 한 대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거다. 조용한 어촌 마을에 난데없이 자전거 괴물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는 꼴이다. 그냥 귀를 닫고 싶다.

그 와중에도 눈은 살아서 주변 경치에 자꾸 시선을 빼앗긴다. 이리저리 돌아다보지 않을 수 없다. 여수반도는 남쪽을 향해, 뿌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거대한 도라지 모양을 하고 있다. 왼쪽 뿌리 끝이 좀 더 길게 뻗어 작은 섬 백야도로 이어지고, 오른쪽 뿌리는 짧고 뭉툭한 대신 비교적 길고 커다란 섬 돌산도로 이어진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해안선은 왼쪽 뿌리의 서쪽에 해당한다. 그 해안선이 감칠맛 나게 아름답다. 평탄한 도로가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돌아간다. 길은 부드럽다고 느껴질 만큼 편안하다. 시야는 바다를 향해 막힌 데 없이 탁 트여 있다. 영광군의 백수해안도로나 강진만의 해안도로와도 또 다른 맛이다. 자전거 소음만 아니라면, 환상적인 자전거길이 됐을 것 같다.

왼쪽 반도의 끝에 다다를 무렵, 두미마을에서 시작되는 고갯길 역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 경치를 내려다보는 사이에 긴 고개 하나를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이런 길은 수시로 자전거에서 내려 경치를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쉬어가는 시간이 길다. 그러다 보면 언제 고개를 올랐나 싶게 내려오게 된다.

해안도로 1
 해안도로 1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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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 2
 해안도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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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흐르는 갯고랑
 강물처럼 흐르는 갯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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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너 참 반갑구나

고개를 내려가면 장등마을이다. 이곳에서 칼국수로 점심식사를 한다. 오래간만이다. 이곳에 와서 다시 칼국수를 먹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전라남도로 들어서면서 언젠가부터 식당 메뉴에서 '칼국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대신 횟집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이상했다. 그때 혹시 한국에 '칼국수 남방한계선'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칼국수는 혼자 자전거를 타면서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음식 중에 하나다. 여행 초기에는 칼국수를 너무 많이 먹어 이제 다른 음식을 좀 맛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그 칼국수마저 사라지고 나서는 끼니를 때우기 힘든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런 칼국수를 이곳에 와서 다시 발견하게 되다니, 반가웠다.

이곳은 칼국수 전문점이라 따로 주문을 받지도 않는다. 칼국수가 작은 옹기에 담겨서 나온다. 그런데 칼국수 양이 좀 많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하는 분이라 좀 많이 드렸다'고 한다. 이 집에서 '두 사람의 손님한테 나가는 양'이란다.

음식 단지 안에 바지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지락부터 맛보는데, 여기에 와서 비로소 바지락의 참맛을 맛보는 것 같다. 바지락 본래의 맛이 살아 있다. 처음에는 그 바지락이 그 바지락이겠지 생각했는데, 이곳은 그 맛이 좀 더 신선한 걸 느낄 수 있다. 국물 맛이 진국이다.

그 칼국수를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는다. 나중에는 목젖까지 칼국수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2인분을 먹어치웠으니 그럴 만하다. 그래도 음식을 먹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다. 언덕을 넘어오느라 바닥이 났던 힘이 다시 샘솟는 느낌이다. 에너지도 충분히 보충했겠다, 이제 여수 시내까지 달려가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다.

칼국수 먹은 힘으로 백야대교를 건너 백야도 등대가 있는 곳까지 가파른 언덕을 쉬지도 않고 달려 올라간다. 그 길 끝, 바닷가 절벽 위에 새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다. 이 등대는 1928년 12월에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여수와 거문도 사이를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에 비해 등대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새하얗게 빛나고 있다. 수십 년, 세상에 빛을 던지며 살아온 세월이 빛나는 등대다.

바닷가 어촌 풍경. 멀리 보이는 섬이 백야도.
 바닷가 어촌 풍경. 멀리 보이는 섬이 백야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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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도 등대
 백야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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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도에서 여수 시내를 향해 가는 길은 일정 거리 내륙으로 들어와 있어, 풍경이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논과 밭이 어우러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계속된다. 게다가 이 길은 곳곳에 길고 높은 언덕이 도사리고 있어 인내심을 가지고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런 길이 여수 시내 소호요트경기장 근처에 다다르면서 갑자기 도시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도로는 반듯하고, 길가에는 세련된 외양을 갖춘 상점들이 즐비하다. 도로를 따라가며 아파트들이 대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꽤 낯익은 풍경 중에 하나다.

하루 종일 오지나 다름이 없는 해안 마을을 달리다 해가 질 무렵 느닷없이 번화한 도시로 진입하느라 약간 부적응 상태에 빠진다. 순천시만 해도 도시 외곽을 그냥 지나쳐 왔다. 여수시는 해안에서 바로 시내 중심가로 진입한다. 해안에 자전거도로 겸용 산책로가 깔려 있다. 그 길을 천천히 달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서 걷는다. 아무래도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여수 해안 자전거도로
 여수 해안 자전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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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요트경기장
 소호요트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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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하는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활동 반경

중심가로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자전거 매장을 찾아간다. 오늘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자전거가 '병원'에 다 와가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사이에 앓는 소리를 그치고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사람도 아닌 게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쨌든 자전거를 끌고 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자전거를 수리하는 일 말고도 몇 가지 장비를 보충해야 한다. 어제 저녁 완전히 소진된 펑크 패치를 보충하고, 겨울 추위에 대비해 긴장갑을 구입한다. 매장에 겨울 장갑이 없어 할 수 없이 춘추용 장갑을 샀는데, 얼마나 추위를 막아줄지 모르겠다.

자전거 소음은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브레이크를 다시 조정한 결과 소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브레이크를 손보고 나서는, 자전거 구석구석 틈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먼지만 털어냈는데도 내 속이 왜 이렇게 시원한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선소(船所)'라는 곳에 들른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배를 건조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곳으로 보이는 '굴강'이 있다. 바다 쪽에서는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곳에 둥그렇게 축대를 쌓고, 배 한 척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입구만 열어 놓은 채 안에 물을 가뒀다.

남해 바닷가에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유적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유적지를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여수의 굴강이 거북선을 제조한 곳이라면, 앞으로 보게 될 삼천포의 '굴항'은 거북선을 은닉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활동 반경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오늘 여수 시내로 진입하기 직전 안골이라는 마을의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지금까지 달린 거리로, 3000km를 돌파했다. 이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언제 4000km를 돌파할 수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이제 그 4000km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오늘 달린 거리는 82km, 총 누적거리는 3014km다.

산비탈을 일궈 만든 밭
 산비탈을 일궈 만든 밭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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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을 오르는 도로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산비탈을 오르는 도로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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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강
 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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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여수, #굴강, #백야도, #백야대교, #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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