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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장훈.
 가수 김장훈.
ⓒ 하늘소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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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86cm에 마른 체구. 중학시절 땡땡이치고 친구집에 몰려가 방바닥에 배를 쭉 깔고 읽었던 황미나 선생의 순정만화에서 봄직한 미남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씨~익 웃는데, 사람이 아니라 조각이지 싶었다. 일순간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영광입니다."

속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뭐야? 기자가! 자존심도 없어? 다리를 꼬고 최대한 삐딱하게 물었다. 진정성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수일진대 무엇이 그를 '독도와 동해 제대로 알기 운동'의 핵심으로 만들었는지, 월세에 살면서 80억 원이 넘는 돈을 왜 기부하는지, 본인 가수데뷔 20주년일진대 고 김현식 타계 2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앨범을 내는 까닭이 뭔지 최대한 묻고 따졌다.

까칠했다. '인간에 대한 기본예의'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마음의 발차기가 나갔다. 자존심은 보통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마이너 인생이지만 독하게 버텨 누구의 덕을 보지 않고, 스스로 '업계 1인자'가 된 아티스트, 가수 김장훈(43)씨다.

그는 가장 힘들 때 사람을 거두는 미덕이 있다. 싸이도, MC몽도 마찬가지다. 그는 싸이가 병역비리 문제로 한참 앓고 있을 때 선뜻 손을 내밀었고 지금까지 함께 콘서트를 하고 있다. 28일 열린 <레터 투 김현식> 발매 쇼케이스 행사에선 MC몽을 챙겼다.

"진실이라면 끝까지 싸우고, 진실이 안 밝혀지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지니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라. 네가 진실이라고 하면 끝까지 믿을게!"

김장훈이 건넨 응원메시지다. 평소 의리남으로 알려진대로 그는 '사회적 왕따'가 되어 가장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후배에게 먼저 다가간다. 아마도 후배들은 그런 김장훈을 평생 잊지 못할 게다. 고 김현식에게 받았던 사랑을, 어쩌면 김장훈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퍼나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가 쓰게 될 책의 제목처럼 <삶의 고비엔 늘 누군가가 있다>. 김장훈의 인생에 김현식이 있듯, MC몽에게 그리고 싸이에게 김장훈이 있는 건가?

지난 20일 홍대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김장훈씨는 김현식 헌정앨범 발매를 앞둔 자신의 심경, 20년 가수인생, 독도와 동해 제대로 알기 운동, 그리고 기부에 관한 철학과 소신을 들려주었다.

드라마 <대물>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정치인들이 '김장훈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다. 원칙과 소신이 너무 분명하고 명확해서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아 '그와 같은' 정치인들이 많아진다면 그의 말대로 한국은 엄청난 발전을 이룰 텐데, 아쉽다고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아~ 슬프다.

다음은 김장훈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10월초 열린 독도페스티벌, 성황리에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은 어떤 가수가 오는지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어요. 독도강좌에 주력한 공연이었기 때문이죠. 김제동씨, 김범수씨, 싸이, 성시경씨, 이문세 형님 정말 공연계의 톱들이 다 와주셨어요. 기자들 얘기가 앞뒤로 10년간 이런 공연은 없을 거라고. 이 멤버로 관객 200명밖에 없기는 참 어렵다는 거죠. 하하. 눈물 빡 날 정도로 되게 고마웠어요.

달콤한 빚을 졌으니 어떻게든 꼭 갚아야죠. 제동인 50m까지 보이는 전구 달린 등산용 모자면 될 것 같고, 김범수는 광어회 한 접시? 성시경이나 싸이는 지하쪽 술집에서… 문세 형은 외국공연 갈 때 깜짝 게스트로 모시면 되지 않을까, 하하."

- 평소에 워낙 품앗이를 많이 하셔서 일종의 '똔똔' 개념인 거지요?
"음… 제가 평소에 좀 지르고 사는 스타일이에요. 아는 동생이, 형! 괌에서 한글학당 지원하는 마라톤대회를 해. 교포 2~3세들이 한글을 잘 몰라서 그걸 지원하는 거야. 그래? OK! 1m당 1달러. 5km 완주하고 기부하고. 그랬더니 '가수가 비킬라 아베베처럼 왜 그러고 다니냐'고 문자가 오더라고요. 하하.

제가 주로 술 먹고 공약을 많이 하는 편인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부산에서 독거노인 행사 한다길래, 좋아요, 갑시다! 했는데 단체장님이 '홍보대사' 얘기를 슬쩍 꺼내는 거예요. 여러 군데 홍보대사 하고 있어서 이번엔 어렵겠다 했는데도 계속 권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분위기 상당히 까칠했었죠. 제가 판단해서 이건 꼭 해야겠다, 가슴이 울리면 OK! 그게 아니면 죽어도 못하는, 아니 안하는 스타일이지요."

- 어느 단체장님이신지 그날 아주 식겁 하셨겠습니다.
"제가 칼자루에 대한 반감이 있어요. 칼자루 딱 잡고 휘두르는 걸 잘 못 봐요. 불필요한 공권력, 절대 못 참지요. 힘으로 누굴 누르거나, 압박하거나 그런 꼴 못 봅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 아닌가 싶어요."

"민족주의가 진부? 최소한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 나이가 주는 미덕이 있잖아요. 혹시 그런 건가요?
"글쎄요… 나이가 들어 비겁해지거나 뾰족한 내 성격이 둥글어지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음… 사람에 대한 배려랄까.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설령 내가 바보가 되더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달까 뭐 그런 건 있지요."

- '독도와 동해 제대로 알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일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독도문제가 정리 안 되면 아직도 독립이 안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독도가 다케시마로 불릴 수 있었을까요? 독도문제는 단순히 영토의 문제, 국익과 자원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정신의 문제이자 독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좀 불만인 게 역사교육 축소예요. 요즘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책도 많이 안 읽고, 인터넷으로 말초적인 것만 즐기니 좀 걱정도 돼요. 제가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쓰신 게 20대예요. 우린 그 나이에 '나이트' 다니느라 정신없었는데, 그 시절 안 선생님은 사상가였다는 거죠.

요즘 민족주의 얘기하면 굉장히 진부한 사람 취급하겠지만, 최소한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라가 힘이 없으면 남의 나라에 밟혀 서러운 꼴 당하게 되는 거구나, 그런 일이 다시는 생겨서는 절대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죠. 이런 생각을 갖고 자라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 '독도와 동해 바로알기 운동'을 통해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전 세계 지도에서 3%에 불과하던 동해 표기가 29%로 늘어났습니다. 반크 회원들이 그만큼 노력한 덕택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문서로 기록해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 질 리 없습니다. 이 싸움은 확실히 이기는 싸움입니다.

주로 학계를 지원하는 편인데, 일본에서 고지도가 나왔다고 발표되면 경매해서 태울까봐 얼른 그것부터 삽니다.(웃음) 자료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문서로 만들고, 책을 폅니다. 그래서 외국에 근거 있는 자료로 제출하고요. 유럽에서 나온 고지도 역시 얼른 삽니다. (웃음)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해가 일본해로 둔갑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지적하는 활동을 합니다."

"독도 실효지배, 정부는 대체 뭘 하고 계신가요?"

가수 김장훈이 지난 3월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동해독도 고지도전' 전시회장을 찾아 독도 및 동해 알리기 관련 기부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김장훈은 "올해 행사 일정이 많아서 더 많이 후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독도를 연구하는 호사카 교수와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의 박기태 단장에게 각각 1억원씩, 총 2억원 지원 약정서를 전달했다.
 가수 김장훈이 지난 3월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동해독도 고지도전' 전시회장을 찾아 독도 및 동해 알리기 관련 기부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김장훈은 "올해 행사 일정이 많아서 더 많이 후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독도를 연구하는 호사카 교수와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의 박기태 단장에게 각각 1억원씩, 총 2억원 지원 약정서를 전달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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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당국에서는 김장훈씨의 이런 활동에 어떤 반응인가요?
"개인이 적극 나서는데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 섭섭하지 않느냐 묻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섭섭할 권리가 있나요? 다만 하고 싶은 말은 있어요. 독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강화하겠다, 말씀은 하셨는데, 그 방안이 딱히 좀 그래요. 실효 지배를 강화하겠다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보다 진짜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게 더 중요한 거잖아요. 외교당국을 탓하는 게 아니라 이런 문제도 마케팅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쥐도 새도 모르게 일본이 모르는 노력을 다해서 외국인들이 '독도는 당연히 한국 땅이야' 이럴 수 있게 왜 못하느냐 그런 불만이 있어요."

- 독도 실효지배를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계세요?
"문화관광부와 대한요트협회가 주최하는 코리아컵 국제요트대회가 있어요. 독도를 도는 코스예요. 아우~ 죽입니다. 요트가 그 푸른 동해와 독도를 빡 지나가는데, 진짜 사진만 봐도 죽여줘요. 그런데 몇 년간 이 대회의 외국 참가자가 늘지 않고 있어요. 만일 기업이 이 행사를 했다면 아마 엄청난 광고물량을 집어넣어 국제적인 행사로 만들었을 거예요. 나라면, 내 돈을 왕창 들이더라도 NYT에 광고해서, 또 레저스포츠니까 상금규모도 왕창 키워서, 제대로 한번 해볼 것 같아요. 제 말의 핵심은 독도문제도 관광레저로 풀 수 있다는 겁니다."

-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이 행사에 상금 10만 달러를 딱 걸면 아마 세계인의 눈길이 확 달라질 걸요? 울릉도 오징어축제랑 엮어 세계적인 축제를 기획하는 거예요. 브라질의 삼바축제, 우리라고 왜 못해요? '요트 타러 한국의 독도에 간다' 소문만 나 봐요. 대박이죠. 거기 가면 세계적인 가수 아무개도 온다더라, 축제가 볼만하다더라, 그럼 끝인 거야~. 마돈나 유투만 와도 이건 되는 거거든. 하찮은 일개 딴따라도 아이템 10개는 생각하겠어요. 그런데 군인이 독도에 들어가면 외교문제가 생기니 어쩌니, 그래서 경찰을 집어넣네 마네 하더니, 결국 실효지배는 뭘로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좀 답답해요."

-  <뉴욕타임스>에 독도 전면 광고를 내 화제가 됐잖아요. 지난 3월엔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광장 전광판에 독도 광고도 하셨어요. 사용료와 광고영상 제작비를 전액 후원하셨죠.
"NYT에 실었던 DO you know나 Error IN WP, 신문광고 후에 작은 변화들이 있었어요. NYT같은 경우는 이제 '동해/일본해' 이렇게 씁니다. 세계 유력지가 표기법을 바꾼 거예요. 그 뒤에도 우리가 계속 신문광고를 할 것인가 아니면 CNN이나 NBC 같은 데 방송광고를 할까 고민하다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뉴욕 타임스퀘어광장에 '대한민국 전용 광고판'을 세우고 여기에 독도 광고를 하자, 그 돈은 내가 대겠다! 3초 만에 결정했죠. 하하하. 이 광고판엔 CNN뉴스가 흘러나와요. 마치 뉴스 같은 느낌을 주는 광고죠. 바로~, 아우 네~ 바로 결정했지요.

굉장히 재밌는 게, 일본 광고주가 독도광고 내리라고 압박해서 하루 내렸다는 거예요. 일본쪽 광고 섭외가 안 되니까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사실 별건 없었어요. 미국에 하와이, 이탈리아 시슬시, 한국엔 독도, 아름다운 독도를 방문하세요! 이게 뭐 문제가 되나요?"

"일본차 CF 하는 게 훨씬 세련된 선택이었으나"

- 그 뒤로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사실 제게 일본차 CF섭외가 들어온 거예요. 전 솔직히 하고 싶었어요. 독도운동 하는 놈이 일본차 광고를 해? 비난하실지 몰라도 전 하려고 했어요. 왜냐, 그 돈 받아 일본 지진피해 입은 분들에게 기부하려고요. 서해안 기름유출사고 때 일본에서도 기부했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걸 찍고 나면 온갖 구설에 휘말릴 것 같았어요. 해명하고, 기자회견 해야 하고, 인터뷰로 또 받쳐줘야 하고, 품이 더 들겠다 싶어서 그냥 관뒀지만, 이 CF를 찍는 게 훨씬 세련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 그렇지만 우린 여전히 일본에서 망언 나오면 반일감정이 극대화 되는 측면이 있어요.
"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망언 나오면 일본 사람에게 물건 안 판다는 상인도 봤어요. 그렇지만 전 일본 정치인이 망언했을 때 한국에 관광 와 있는 일본인들에게 더 '나이쓰'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홀대하면 일본으로 돌아가 뭐라 하겠어요? 역시 한국 사람들은 험악해! 이럴 거예요. 그러나 그들에게 친절하게 잘해주면 도리어 망언한 일본 정치인을 욕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격해질 필요 없이 그냥 가볍게 웃으면서 이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쩨쩨하게 과격하게 굴지 말고요."

김현식 그리고 김장훈의 노래인생 20년

가수 김장훈이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김현식 헌정앨범 발매를 앞둔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수 김장훈이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김현식 헌정앨범 발매를 앞둔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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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일 고 김현식 헌정앨범 'Letter to 김현식'이 나옵니다. 올해는 김장훈씨 가수 데뷔한 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가수 김장훈에게 김현식은 무엇인가요.

"모두 10곡을 불렀어요. 1곡은 체코필 연주곡이고. 제게 김현식은, 피도 안 섞였지만 진짜 형 그 자체예요. 형이 없었다면, 물론 지금 어디선가 노래는 하고 있었겠지만, 현업가수는 안 됐을 거예요.

소설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작위적인 거 아니야 할 정도로 우린 소설틱하게 꿰맞춘 것 같은 관계예요. 현식이형 어머니와 우리 엄마가 친구예요. 그러니까 자랄 때 제가 형네 어머니께 자연스레 이모라고 불렀죠. 또 저희 집 사업이 잘 안 돼서 어릴 때 형네 많이 놀러갔어요. 중학교 때 형을 보면 늘 기타를 치고 있었고 그 자체가 너무 신기했고 좋았어요.

길 떠나기 전날까지도 형을 보면 가슴이 막 뛰고, 설렜어요. 당대 김현식이 누구입니까. 요즘 애들도 알 정도니, 형은 정말 전설이지요. 전설 같은 존재가 내 형이라니, 그것도 가까이에 있는 친형 같은 존재라니, 제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 아주 근거리에서 김현식씨를 보고 자란 격이군요.
"마지막 5년을 투닥투닥 하면서 같이 보냈죠. 형이 90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났는데 91년 11월 제 데뷔앨범이 나옵니다. 제가 경원대 88학번인데요. 4학년 때 밴드 만들어 공연을 했어요. 그때 누가 찾아왔다는 거예요. 서울음반에서 앨범 내자고. 너무 놀란 거예요. 이야~ 우리 밴드가 정말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서울음반 같은 큰 회사에서 찾아왔구나, 역시 대단해!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서울음반 기획실장님이 당시 형이랑 음악 하던 베이시스트였던 거예요. 형이 사촌동생 같은 애가 있는데 노래 잘하니까 앨범 한 장 내보라고 귀띔한 게 생각나서 수소문해 찾아왔다는 거죠. 우리 녹음한 카세트 녹음테이프를 건네니까 자기들끼리 '꼭 살아온 것 같아, 음색이 너무 비슷해' 이러더라고요."

- 그래서 서울음반에서 앨범을 내신 거예요?
"냈죠.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계약금 600만 원에 인세 20원. 하하. 그런데 이게, 그 시절엔 작은 돈이 아니었어요. 만일 형이 소개하지 않았다면 전 아마 오디션 안 봤을 거고, 그냥 그대로 나이 먹고 끝났을 거예요. 형의 연습실에서 노래연습 누구보다 집요하게 했고, 봄여름가을겨울 일할 때 구경하면서, 아 가수는 저런 삶이구나 했지요. 형은 제게 노래할 연습실도 줬고, 정신도 줬고, 노래할 계기까지 만들어준 분입니다."

- 데뷔 이후 뭔가 달라진 게 많았을 것 같아요.
"청운의 꿈을 안고 91년도에 앨범(늘 우리 사이엔)을 냈는데, 반응은 뭐 싸늘했죠. 그러면서 동시에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1994)>에 '내 사랑 내 곁에'가 나오면서 김현식 붐이 다시 일어나요. '내 사랑 내 곁에'가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그때 동아기획 사장님 말씀으로는, 모든 음반공장에서 김현식 앨범만 찍었다는 거예요. 다른 건 올 스톱이고. 단군 이래 최고의 히트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가고 없으니, 그의 동생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음색이 비슷하다고 하니 김현식의 노래를 그에게 부르게 하자는 방송국의 제안이 있었지요. 딱 한번 형의 노래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렀어요.

그런데, 전 말이에요. 형의 죽음을 딛고 내가 일어선다는 게 무척 미안했어요. 싫고, 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방송국에선 자꾸 제게 권했어요. 좋은 기회라고. 물론 김현식의 후광을 입었다면 단숨에 유명한 가수가 됐겠죠. 그러나 전 그게 싫었어요. 형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강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속이 좁았던 것 같은데, 그땐 그랬어요."

"생방송 펑크내고 완전히 '돌아이'로 찍혔죠"

- 생방송 펑크를 내셨다고 들었어요.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하는데 방송국에서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르라는 거예요. 그 압박이 제겐 너무 심하게 느껴졌어요. 당시 PD들은 설마 신인인데 당연히 오겠지, 했지만 전 안 갔어요. 회사에서 잡아준 숙소를 나와 도로 경원대 영문과 과사무실로 갑니다. 생방송 펑크 내고 잠수 탄 거죠. 학교에선 후배들이 와 저 형 가수 됐다더니, 도로 학교 와서 애들 삥 뜯는구나 했고, 방송국에선 완전히 '돌아이'로 찍혔죠."

- 93년 두 번째 앨범을 내셨는데, 그때 반응은 어땠어요?
"93년에 2집을 내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계속 했어요. 2명, 10명. 관객 수가. 후훗. 기획자들이 보기에도 가능성은 있어 보이나, 계속 망하는 공연을 하니까, 이 사람이 하다 떨어져 나가고, 저 사람이 하다 또 떨어져나가고 그랬지요.

그러고 있을 때, 한편으론 방송국이 아주 야속하더라고요. 비겁하기 싫어서 그런 건대, 어느 정도 이성이 있는 PD라면 걔가 오죽해야 그랬을까 이해해줄 법도 한데 어쩌면 하나 같이 PD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낙인 찍나 무척 섭섭했어요.

방송국 PD랑 멱살 잡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이런 거… 하하. 96년 3집 앨범 '노래만 불렀지'를 내고 언더라운드의 메카 동아기획을 찾아갑니다. 그때 들었던 얘기가 반드시 사람과 싸우지 말자, 꼬장 피우면 안 된다, TV 출연을 해야 한다 등이었어요. 그래서 나온 앨범이 98년 <나와 같다면> 4집입니다."

- 이게 대박 났잖아요.
"7년 만인 거죠. 7년간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김장훈 이름으로 뜬 거예요. 그땐 김현식의 도움을 받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요즘은 김현식이라는 존재가 잊혀지는 게 너무 힘들어요. 형과 함께 보낸 말년이 너무 그리워요."

- 김현식씨가 눈을 감던 날, 많이 우셨겠어요?
"아니오. 눈물이 안 났어요. 꿈같아서. 사람들은 막 우는데 저는 별 느낌 없이 그저 바라봤지요. 그런데 한참 뒤에야 형이 곁에 없다는 걸 깨닫곤 뒤늦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제 눈물에 제가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도 형 노래를 듣다 주루룩 눈물이 흘러요."

소주, 바나나 그리고 개... 김현식이 좋아했던 것들

- 생전에 김현식씨가 가장 좋아했던 건 뭐예요?
"소주, 바나나. 아침에 딱 일어나면 냉장고에서 팩소주를 꺼내 꿀꺽꿀꺽 마셔요. 그리고 나서, 나가자! 해요. 따라 나가면, 편의점에 가서 또 팩소주와 바나나를 사요. 바나나 껍질을 쭉쭉 벗겨서 한 입 딱 베어 물고 저한테 쑥 내밀어요. 그리고 말하죠, 녹음실 가자. 그럼 따라가서 그거 먹고 그랬지요.

이번 앨범재킷도 그냥 형에게 붙이는 편지 콘셉트로 했어요. 앨범재킷에 형과 추억이 있는 사물을 찍어놓았는데, 우표, 소주, 담배, 하모니카, 청바지. 또 형이 좋아하는 게 강아지예요. 보는 것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서 개를 찍을까, 전골냄비를 하나 찍을까 고민하다 그냥 소주잔을 넣었죠. 하하하.

한 가지 재밌는 게요. 형이 여자를 안 밝혔단 거예요. 제가 형과 거의 같이 다녔는데, 여자들은 형을 간절히 원했지만 형은 전혀 아니었어요. 전 지금도 그게 참 의외예요. 하하. 독특했지요. 아주 인간적이었고, 감성적, 감상적이었고. 어떤 아저씨 노숙하고 있으면 입고 있던 점퍼 확 벗어주고 들어오는 식이었으니까요."

- 잊혀지지 않는 일화도 있을 것 같아요.
"재밌는 거 있어요. 강아지를 되게 좋아했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은 거예요. 갑자기 절더러 한강에 가자는 거예요. 얠 강가에 묻어주고 싶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딱 꽂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 죽은 개를 박스에 넣고 자전거에 실은 다음 한강으로 가려고 하는데,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어딜 가냐고 물었어요.

형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어서 묻어주러 강가에 간다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아니 뭘 묻어 우리한테 주면 회식 잘 하지, 이 말 했다가 난리 났잖아요. 죽은 개 잡아먹는다고 욕하고 싸우고 난리 났었죠. 의협심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후훗."

- 이번 헌정앨범은 김장훈씨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 같아요.
"제 인생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할 땐 꼭 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해보고 싶었어요. 체코와 뉴욕에서 작업하고 뮤직비디오 만들고, 앨범디자인 하는 것까지 해서 토탈 5억 원 들었어요. 많이 쓴 편이지요. 그렇지만 전 1만장도 기대 안 해요. 많이 안 팔릴 거예요. 디지털 음원? 이것도 아이돌시대에 뭐 쉽지 않지요. 이미 손익은 다 깨진 거 알아요.

그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해요. 아주 오랜만에 제가 형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우표 값을 좀 많이 쓴 거라고. 배달이 수월치 않은 곳으로 부치는 편지니까 우표 값이 다른 데보다 좀 많이 드는 것일 뿐이라고. 후훗.

김현식은 대한민국의 전설이고, 제 형이고, 따라서 최대한 명반을 만들고 싶었어요. 요즘 마이크 좀 잡고 노래 좀 한다는 얘들에게도 김현식은 이미 전설이므로 그 만큼 예우하고 싶었어요. 후배로서 제대로. 또 하나, 올해 존 레논 형이 타개한 지 30년 되는 해예요. 김현식이 존 레논에게 밀려서야 되겠습니까."

"가수 안 됐으면 감옥에 몇 번은 갔을 것"

가수 김장훈.
 가수 김장훈.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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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시절 배추장사 하면서 발성연습 했다고 들었어요. 그 시절이 더 행복했나요?

"좋은 건 지금이 훨씬 좋지요. 아름다운 건? 그때였던 것 같아요. 그땐 반대급부가 없던 삶이에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삶이었지요. 하루하루 그냥 밥 먹으면 되는 거고, 내일 내가 뭘 해야 하는 것도 없는 시절이었으니까요. 그저 하루 잘 사는 게 행복한 거였죠.

그러나 지금은 내가 오늘 이걸 이루지 못하면 안 되는 게 생겼지요. 좋은 건 제가 버는 돈으로 내 가족과 주변, 이웃을 챙길 수 있고, 땀 흘려 번 돈으로 먹고 싶은 것 사먹고 사고 싶은 것 사니까 좋아요. 가족들 추운데서 안 재워도 되고 참 좋아요. 다시 그때로? 혼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별로예요."

- 공황증 치료를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으신가요?
"100%는 아니지만 이젠 수면제 없이 잘 수 있어요. 2002년 콘서트 도중 와이어가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뒤로 공황증이 생겼어요. 일종의 염려증인데, 괜히 걱정하는 거예요. 무대가 또 무너지면 어떡하나 등등 별별 걱정을 다 하고 앉은 거지요. 공연 시뮬레이션을 너무 많이 해서 싸이가 아주 저라면 학을 떼요. 하하. 무대를 일일이 점검하거든요. 제가 무대 골조공사를 직접 한 적도 있어요. 이게 다 공연연출을 하다 생긴 병이지요. 보통사람들이 1가지 걱정을 하면 전 100가지, 1000가지 걱정을 하는 거예요. 걱정을 없애려면 완벽하게 해야 하고 그러면 걱정이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제가 힘들겠어요. 하하."

- 인생의 최종 목표가 "잘 죽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기부 잘하는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으세요, 아니면 나쁜 놈이라도 노래공연 잘하는 사람이고 싶으세요?
"제가 13시간동안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만 한 일이 있어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인데 이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노인이 되고 세상 떠나는 날이 오겠지, 죽는 순간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면 어쩌나, 그러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후회 없이 살자, 비겁하지 말자, 음란한 것, 폭력적인 것 하지 말자, 비열한 건 절대 안 된다 생각해요. 그렇지만 제가 누구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지탄받지 않을 정도로 살지. 워낙 제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요. 저 가수 안 됐으면 감옥 몇 번 갔을 거예요. 가수라서 많이 착해진 거죠. 착한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니까 정말 착해지던걸요?"

- 가수가 아닌 자연인 김장훈의 신조 이런 거 있으세요?
"민간인에게 대들지 말자! 예전에는 매너 없이 사인해달라고 하면 안했어요.(웃음) 작은 식당에 가면 꼭 사진 찍어주고 사인도 해주고 별거 다 해드렸지만, 건달들이 운영하는 큰 식당에 가면 사진도 안 찍고 사인도 안 해주고 그랬어요. 그냥 그런 게 제 신조예요."

- '부당거래' 안 할 것 같은 연예인 2위에 뽑히셨어요.
"아 그런 데 뽑히면 안 되는데. 전 그냥 부당거래도 좀 할 것 같고, 룸살롱도 좀 갈 것 같고, 돈도 많이 벌 것 같고, 사회활동도 많이 할 것 같고, 그런 게 좋아요. 제가 완전 모범적인 바른 생활맨이 아니라니까요. 하하."

- 가만 듣고 보니 전형적인 일중독 같으세요.
"예, 저 완전 일중독이에요. 여자를 싫어해서 안 만나는 게 아니라 여자를 만날 구조적 여건이 안 돼요. 지겹다, 지겹다 만날 욕하면서도 꼭 손에서 일을 안 놓고 살아요. 한번은 그래서 내가 딱 접는다, 하고 일을 놨더니, 바로 공황증에 빠지더라고요. 하하하하. 아무래도 쉬는 법을 까먹은 것 같아요. 제가 올 상반기쯤 미국에 쉬러 간다니까 기자들마저 그래요. 아마 뭘 해가지고 올걸? 그냥 놀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만 저 정말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몇 달 푹 쉬었어요. 물론 다 논 것은 아니지만. 흐흐흐."

기부는 나의 운명... "은퇴하면 엄청 비싼 차 탈 거예요"

- 2007년 사비 1억 원을 털어 가출청소년 쉼터 '꾸미루미(꿈이룸이)'를 운영하셨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십대교회 목사님이신데요.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개념의 버스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전 그냥 물질지원만 해요. 전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참 엄하셨어요. 어디 나가 후레자식 소리 들으면 안 된다고 굉장히 엄히 기르셨어요. 가정사가 평탄치 않았어요. 어릴 땐 그런 게 참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노래하기 딱 좋은 구조로 태어난 것 같아요. 학교 못 다녔지, 자살 시도 2번 했지, 차압 3번 당했지, 교통사고 11번에 정신병 걸렸지, 노래할 수 있는 조건은 다 갖춘 거 아니에요? 하하."

- 지금까지 기부하신 액수가 80억 원이 넘었다고 들었어요. 남에게 주기보다 자기 욕심 차리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기부하시나요?
"계획은 늘 갖고 살지만 욕심은 없어요. 작년엔 공연이 잘 돼서 기부도 하게 됐고 또 엄마랑 누나들도 크게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미국 가기 전에 보너스로 3억 원 썼어요. 그런데 제가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요. 대개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데, 전. 또 제가 시프트 모델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장기임대주택이 잘 돼서 집 걱정은 안 해요. 월세여도 별로 불안하지 않아요."

- 월세 살면서 80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셨단 거예요?
"제가 집을 갖지 않는 건 무소유 철학이거나 검소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예요. 연금 나오는 보험은 들어놨어요. 늙어서 후배들에게 술 얻어먹고 살 순 없으니까 술값마련 차원에서 연금은 들었는데 집은 안 사요. 이유가 있지요. 150층짜리 건물은 우후죽순 들어서고 인구는 줄고 있어요. 굳이 집을 사려고 발버둥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돈 모아 집 사는 데 박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놀겠다, 뭐 이런 게 제 생각인 거죠."

- 그럼 검소한 분이 아니란 얘기네요.
"물론이요. 제가 지금은 리스해서 차를 타고 다니지만 은퇴하면 엄청 비싼 차를 탈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저처럼 기부 많이 한 사람이 말년에 고생하더라 이러면 누가 기부를 많이 하겠어요? 기부하고도 잘 사네! 이래야 된다는 거죠. 좀 유치하지만 지금은 버스 타고 다녀도 은퇴해 힘 빠지면 꼭 럭셔리하게 살 거예요. 연예인 늙어서 돈 없으니 추하더라, 이 소린 안 듣겠단 얘기죠."

"20년 가수했는데, 대통령 향해 칼 뽑겠습니까"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노래하셨잖아요.
"돈 받고 한 거예요. 이명박 대통령을 축하해주러 간 게 아니라 대한민국 5년의 미래를 축하하러 갔던 거지요. 참고로 전 이명박 대통령 안 찍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 좋아했어요. 내가 찍은 사람은 아니지만 취임식에 간 건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의미였어요. 내가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지만 그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을 응원하겠다, 항복하겠다, 대한민국을 잘 살려다오, 이런 당부인 거죠. 그리고 이 나라가 대통령의 나라인가요? 국민의 나라인 거지."

가수 김장훈이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축가를 부르며 발차기 하는 모습과 3개월뒤인 2008년 5월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발차기 하는 모습.
 가수 김장훈이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축가를 부르며 발차기 하는 모습과 3개월뒤인 2008년 5월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발차기 하는 모습.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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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하셨잖아요.
"누리꾼들이 장난 아니게 공격했었어요. 이명박 취임식에 간 놈이 촛불집회엔 왜 왔냐? 등등. 얍실하다, 어쩌고저쩌고. 대꾸 안 했어요. 오죽하면 대통령 취임식 때 노래 한 사람이 촛불집회에 참석했을까 이 관점이 없더라고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우리나라 대통령이니까 응원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 암만 그가 싫다고 등에 칼을 꽂으면 결과적으로는 우리 국민 손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은 운으로라도 임기 끝날 때까지만 나라 잘 되게 해 달라 빌고 있지요. 임기 끝나는 그날, 소주 한잔 꼭 받아드리고 싶네요. 소주를 확 뿌리는 게 아니라, 꼭 소주 받아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대통령에 대한 반감 같은 게 있는 거예요?
"대통령보다 그 밑이 더 문제라고 생각해요. 알아서 기는 관료랄까. 사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오시는 지방의 축제였는데, 검문검색을 지나치게 하는 거예요. 20년 가수 한 사람인데 제가 대통령을 향해 총을 뽑겠습니까, 칼을 들겠습니까. 검색이 꼭 필요하다면 개인검색대를 마련해달라고 주최 측에 요청했어요. 명색이 가수가 일반인들과 같은 검색대를 통과할 순 없지 않나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민생을 위해 보호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나도 국민들에게 행복과 낭만을 주는 가수로서 신비로움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현장에 딱 갔는데 검색대가 일반인밖에 없어요. 저 그냥 도로 집에 왔잖아요. 대통령은 아마 지금까지도 모르실 거예요.

문제는 그 밑에, 알아서 기는 관료들이 문제라고 봐요. 이상한 권위주의. 전 그런 게 너무 싫어요. 더 재밌는 건 행사 끝난 다음에 김장훈씨 노래 안 했으니까 돈 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싹 다 돌려드렸습니다."

- 가수인생 20년인데 이런 얘기들을 묶어 책 한 권 집필하실 생각은 없나요?
"책을 내자는 제안은 많이 받았는데 안 내요. 내 성격에 누가 다듬어주는 것도 싫으니, 직접 써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그 시간에 음악 하고 애들 한 번 더 더 만나지, 책 쓸 여력이 없네요. 그러나 마음 한켠 쓰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제목은 정했어요. <삶의 고비엔 늘 누군가가 있다>. 제 인생에 현식이형, 양희은 누나가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삶에도 그 고비에도 꼭 누군가 도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오늘 되게 재미있었어요."


태그:#소셜테이너, #김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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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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