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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법원에는 매일 수없이 많은 판결이 쏟아집니다. 그중에는 일반인에게 도움이 될 판결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하지만 판결의 취지가 잘못 알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나 흥미위주로 보도돼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판결, 정치·경제·문화 생활과 밀접한 관련 있는 요즘 판결들을 가끔씩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국정원 요원의 해임 취소 소송과 문자메시지에 얽힌 이혼 소송 이야기입니다.

영화 <7급 공무원>은 국가정보원(국정원) 요원이 된 커플의 애환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 신분을 속인 채 작전을 수행하느라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한다. 물론 과장된 얘기겠지만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는 국정원의 업무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국정원 직원이 애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작전 수행중에 동행까지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7급공무원>에서 강지환이 국정원 요원이라고 밝혔다면?

[사례 1] 국정원 직원 강지환(가명)씨는 경력 10년차로 안보관련 수사팀에 소속돼 있었다. 2008년 그는 신분을 숨긴 채 A 국가에서 6개월간 정보를 수집하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A 국가로 출국하여 작전 수행중이던 그는 입사 전에 교제를 한 적이 있던 김하늘(여, 가명)씨를 초대했다. 결혼이 전제되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김씨를 몇 차례 설득한 끝에 오게 한 강씨는 업무수행 중에 김씨를 데리고 다니며 친절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하늘아, 이 건물은 북한에 관련된 사람들의 북한 여행 절차를 대행해주는 곳이야. 저 건물은 친북인사들이 만든 단체고. 그리고 저긴……. 이런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하는 게 내가 요즘 하는 일이야."

강씨는 자료를 모으고 사진을 찍은 후 숙소로 돌아와 컴퓨터로 자료를 정리하였고 김씨는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20여 일간을 함께 지냈다.

6개월이 지나 한국에 입국하자 강씨는 김씨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이에 화가 난 김씨는 국정원 홈페이지에 "강지환이 직위를 이용하여 성추행을 했고, 정보수집 활동을 하면서 나를 데리고 다녔으니 처벌을 원한다"는 내용으로 진정을 올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정원 징계위원회는 그에게 강등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국정원장은 징계가 너무 가볍다며 재심사를 요구하였고, 그 결과 공무원 직을 박탈당하는 해임처분을 받게 됐다. 징계사유는 비밀엄수 의무(국정원직원법)와 품위유지 의무(국가공무원법) 위반이었다.  

강씨는 작년 해임처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소장의 요지는 이랬다.

"내가 김하늘에게 보여주고 설명한 내용은 보안· 비밀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 남녀 관계는 사생활 영역인데 징계 사유라니요. 설사 이런 것이 징계 사유가 되더라도 10년 차 국정원 우수 요원에게 해임은 너무 가혹합니다."

"국정원 직원, 다른 공무원보다 비밀 엄수의무 훨씬 높아"

1심인 행정법원은 강씨의 주장을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다.  

법원은 "국정원 직원법에서 말하는 비밀의 범위는 표현의 자유 내지 알 권리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줄 수 있도록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면서도 강씨가 신분을 위장하여 수집한 정보는 보고서에 기재되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점으로 보아 비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어 "강씨의 직무수행이 누설될 경우 A 국가와 외교 마찰을 불러올 수도 있고 수집 정보는 국가정보원의 정보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며 비밀엄수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김씨에게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행동을 하였고, 그 결과 김씨가 홈페이지에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며 공무원으로서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한 사실도 인정된다고 보았다(공무원의 단골 징계 사유인 품위유지의무 위반은 너무 추상적이기는 하다).

따라서 "해임처분이 객관적으로 명백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없다"며 지난 8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판결은 국정원 직원에게 다른 공무원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의 비밀 엄수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특히 다른 나라에서 정보 수집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음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7급 공무원>에서 강지원과 김하늘의 입이 무거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나 보다.

'사랑해','잘자요' 문자도 이혼 사유? 

얼마 전 대부분의 언론에 유사한 제목의 이혼 기사가 떴다. 요지는 배우자 몰래 '사랑해' '잘 자요'라고 문자를 보낸 것이 이혼사유란다. 정말 그럴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언론에 소개된 판결을 포함 최근 3건의 사례를 들여다보았다.

[사례 2] A씨(남)와 B씨는 93년 결혼한 40대 부부이다. 그들에겐 아들이 둘 있었지만 결혼 5개월 후부터 잠자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A씨는 B씨가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다거나 아파트 앞에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 등으로 B씨를 폭행했다. A씨는 한술 더 떠 2009년부터는 다른 여자와 "보고 싶다 같이 살자","살살 애무해 줘"등의 문자를 주고받고, 심지어는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B씨에게 들키기도 했다.  

[사례 3] C씨(여. 60대)는 남편 D씨의 발소리만 들어도 덜컥 겁이 난다. 벌써 30년째 구타를 당해왔다. C씨는 접근금지명령을 받는 등 법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신혼초부터 시작한 D씨의 폭행은 그치지 않았다. 최근엔 D씨의 핸드폰에서 "당신 사랑해" "여보 잘 자요"라는 문자까지 발견하게 되었다.

[사례 4] 중국 국적의 E씨(남.30대)는 새터민(탈북자) 출신인 F씨와 중국에서 만나 동거하다가 작년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던 F씨는 채팅으로 알게 된 지방의 식당 주인 G씨와 눈이 맞았다. 돈을 벌어오겠다고 집을 나간 후 몇 달만에 돌아온 F씨의 마음은 이미 가정을 떠났다. F씨의 전화에는 G씨의 사진이 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자정이 넘도록 '잠이 안 와도 눈좀 붙여 사랑해', '고마워 나도 사랑해'라며 밀어를 주고 받았다.   

위 3가지 사례에서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법원이 이혼 사유로 배우자의 외도를 꼽았다는 것이고, 둘째 이혼의 원인을 제공한 쪽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한 가지를 더 꼽자면 문자메시지가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사례 2]와 [사례3]은 남편의 폭행과 외도라는 전형적인 이혼 사유를 보여주는 반면, [사례4]는 아내의 외도가 이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민법 840조는 재판상 이혼 사유로 6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이다. 판례는 부정한 행위를 "간통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서 간통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나 부부의 정조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일체의 부정한 행위가 이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간통 아니라도 '부적절한 관계'는 이혼 사유

간통은 혼외 정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부정한 행위는 성관계뿐 아니라 애무를 하거나 노골적으로 사랑을 속삭이거나, 하여간 부부가 아니면서 부부처럼 다정한 관계를 유지할 때 인정된다.

문자 메시지는 이혼 소송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배우자의 외도를 암시하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사례 3]처럼 당사자가 외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때의 효과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부부가 아닌데 "당신 사랑해", "여보 잘 자요"를 주고 받는 사이라면 어떤 관계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하지만, 오해받을만한 문자 한 두통이 왔다고 해서 곧바로 이혼 사유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적절한 문자=이혼 사유'라는 등식이 성립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송에서 법원은 사실관계와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에 비춰보면 문자메시지가 없었더라도 이혼 사유가 인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위자료 액수는 혼인기간, 혼인 파탄의 경위, 재산상태 등을 참작하여 결정하는데 5천만 원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의 사례에서는 법원은 A씨에게 2천만 원, D씨에게 5천만 원, F씨에게 1천만 원의 위자료를 상대방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세 건의 이혼 판결이 유부남, 유부녀에게 전해 주는 교훈 한가지. "당신 사랑해","여보 잘 자요" 같은 문자는 부부끼리만 주고 받자, 제발!

판결에 적용된 법률, 어떤 것이 있나
기사에서 소개한 4가지 판결과 관련된 법률과 조항을 소개한다.

[사례 1] 관련 법률과 조항
1. 국가공무원법
제63조 (품위 유지의 의무)
공무원은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그 품위가 손상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2. 국가정보원직원법
제17조(비밀의 엄수)
① 모든 직원은 재직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지득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
제24조(징계사유)
직원이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때에는 징계의결을 거쳐 징계처분을 할 수 있다.
1. 이 법 및 「국가공무원법」과 이 법 및 「국가공무원법」에 의한 명령에 위반한 때
2. 직무상의 의무에 위반하거나 직무를 태만한 때
3.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직원으로서의 품위나 위신을 손상하는 행위를 한 때

[사례 2,3,4] 관련
1. 민법
제840조 (재판상 이혼원인)
부부의 일방은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3.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4.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태그:#국정원, #문자메시지, #잘자요, #사랑해, #7급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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