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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 2009년 10월 26일]

 

하늘에 빌다

 

여러 차례 잠이 깼다. 아마도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나라인 러시아를 찾아가는 설렘 때문인가 보다. 만일을 대비하여 모닝콜을 7시에 해 두었지만 그보다 이른 6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보니까 짙은 안개로 온 누리가 자욱했다. 아마도 날씨는 매우 쾌청할 모양이다. 곧장 이부자리를 개고 여행 가방을 마무리로 꾸린 뒤 책상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100년 전, 1909년 10월 26일 바로 이 시각,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삼림가 김성백 집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고서 새 옷 대신에 평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안 의사는 간밤에 손질 해둔 권총을 꺼내 약실에 총알 7발을 장진한 뒤 깨끗이 닦아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하얼빈 역이 있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어 앉아 성호를 긋고는 하늘을 향해 "모든 것을 당신의 뜻에 맡깁니다"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2009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나는 마음속으로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답사하는데 대해 감사함과 함께, 이번 답사여행 길이 순탄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이번 여행의 중요 경유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와 중국 쑤이펀허(綏分河), 하얼빈, 지야이지스고(蔡家溝), 장춘, 다롄(大連), 뤼순(旅順) 등인데 그 가운데 나는 하얼빈, 장춘만 두 차례 다녀왔을 뿐, 나머지 지역은 모두 낯선 곳이라 조금 염려스러웠다.

 

내 방 창문으로 안채를 보니까 그새 아내도 일어나 먼 길을 떠나는 남편의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채로 건너가 세면 뒤 옷을 갈아입고는 아침밥을 들었다. 짐을 줄이고 줄였지만 세 뭉치였다. 하나는 카메라 가방이요, 하나는 노트북 가방, 그리고 책과 옷가지, 선물을 챙겨 넣은 여행용 가방으로 만만치 않았다. 이번 답사여행은 배에서, 열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에 그때 읽으려고 참고도서를 많이 챙겨 넣었다.

 

속초 가는 길

 

8시 20분, 카사(고양이)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아내 승용차에 올랐다. 아내는 특별히 선심을 쓰듯, 원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만 태워주겠다고 했다. 해가 오르자 안개가 점차 걷혔다. 매화산 전재고개에 이르자 아침 햇살에 한창 물든 단풍이 한껏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매화산 언저리 단풍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하기는 이 일대는 어느 때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이번 답사여행을 마치면 나는 그동안 정들었던 이 고장 횡성 안흥마을을 떠나야 하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지도 모르겠다. 승용차 라디오에서는 오늘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일로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광장에서 기념식을 한다고 보도했다.

 

9시 20분, 속초행 버스가 원주시외버스터미널을 벗어났다. 100년 전 이 시각은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는 많은 환영인파가 막 도착한 기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을 시각이다. 사실 이번 답사여행은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시간에 하얼빈 역을 취재하고자 10월 중순께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비자발급 등 이런저런 일로 일정을 맞추지 못하고 다만 의거 100주년 기념일 날에 맞춰 답사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원주에서 홍천까지는 중앙선 고속도로와 막 개통된 경춘고속도로의 연결로 백두대간을 따라 시원하게 달렸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은 "서리에 물든 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고 단풍의 아름다움을 경탄하였는데, 정말 그 시구대로 가을 산이 봄 산보다 더 황홀했다. 참 아름다운 강산이다. 해외에 나가 남의 나라를 보면 볼수록 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더욱 절감케 한다.

 

 

한국과 일본의 산하

 

특히 이웃나라인 일본의 산하를 보고 내 조국 강산을 보면 보리밥 먹다가 쌀밥을 먹는 꼴로 먼저 강산의 때깔부터가 다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호시탐탐 정한론을 펼치며 한반도를 노렸나 보다.

 

일본의 산하는 어딘가 거무튀튀하다. 게다가 일본은 걸핏하면 지진이요, 태풍으로 인명은 물론 애써 모아놓고 세워 둔 재화나 건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날아가 버린다. 좁은 섬나라에 1억이 넘는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살기에는 어딘가 좁고 답답하다. 더욱이 땅이 척박하여 먹을거리도 매우 부족하다.

 

일본사에 정통한 한 학자에 따르면, "지금은 일본이 선진국으로 부(富)를 누리고 있지만, 에도(江戶) 시대까지도 먹을 게 부족하여 자식이 많은 집에서는 똑똑한 자식은 거둬먹였지만 그렇지 못한 자식은 내다버렸다고 할 만큼 식량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린 배를 채우고자 까마득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부터 수시로 우리나라 삼남지방에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거기다가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오랜 숙원인 대륙 진출 꿈을 이루자면 반드시 반도인 우리나라를 교두보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일본의 지도층은 늘 정한론을 가슴속에 품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마음속엔 예로부터 한반도를 꿀컥 삼키고 싶은 욕구가 늘 도사리고 있었다. 이미 15세기 임진왜란이 그랬고, 100년 전 한일 강제 병합이 그랬다. 일본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까지 삼켜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아시아 패자의 당찬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던진 원자폭탄 두 방에 밥통까지 쑥 내려간 한반도를 도로 게워 놓았으니 지금도 그네들 마음속에는 얼마나 원통하고 아쉬움이 많겠는가.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다시 한반도를 삼키려고 덤빌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이다.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기에 고양이 발톱처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

 

홍천 나들목을 벗어난 뒤는 버스가 백두대간을 가로 질러 동해로 달렸다. 앞면 옆면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다가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것은 묘지들이었다. 양지 바른 야트막한 곳은 대부분 묘지들로 매우 볼썽사나웠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우리나라처럼 묘지가 국토 온 곳에 난립한 곳은 없다. 더욱이 최근 묘지에는 석물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또 다른 공해를 만들고 있다. 아무리 내 땅이라도 소유에 대한 바른 윤리가 확립되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장례나 제례 문화의 종주국인 중국도 이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내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 달라"고 하여 그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비행기로 전국에 흩뿌렸고, 오늘날 중국 번영의 주춧돌을 놓은 덩샤오핑(鄧小平) 유해도 그의 유언에 따라 동남 지나해에 오색 꽃잎과 함께 뿌렸다.

 

우리나라도 지도자들이 이처럼 솔선수범으로 일대개혁을 하지 않는 한 백성들의 장례문화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들이 후보 시절이나 재임 중 다투어 당신 조상 산소부터 가다듬었으니 백성들이 이런 인습을 고치겠는가.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선 나부터 사후에 수목장(樹木葬)으로 일찌감치 대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언을 미리 자식들에게 남겨야겠다.

 

속초로 가는 길은 홍천강을 끼고 귀에도 지명이 많이 익은, 돈도 백도 없는 신병들이 이 강원 산골부대로 전입해 오면서"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고 눈물을 흘렸다는 인제와 원통을 지나자 내설악의 멧부리들이 노랗고 붉은 치마저고리로 단장한 채 위용을 한껏 뽐냈다.

 

특히 매끈한 울산바위의 자태에 넋을 잃은 새, 11시 40분 버스는 속초터미널에 닿았다. 자루비노로 가는 동춘호를 운항하는 동춘항운에 배표를 전화로 예약할 때 오후 1시까지 속초항국제여객터미널로 오라고 했다. 시간이 다소 여유가 있어 부두 가까운 밥집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뒤 제 시간에 터미널로 가서 배표를 샀다. 객실 등급은 귀빈실, 일등실, 일반실A, 일반실B 등 네 가지였는데, 일반실A로 끊었다. 편도 배삯이 220,300원이었다. 비수기인지라 승객이 별로 없었다.

 

 

터미널에서 만난 사람

 

매표실 곁에 출국과 입국신고서가 있어 작성하는데 난생 처음 써보는 러시아 문자에 헤매자 곁에서 신고서를 쓰던 한 청년이 대필해 주었다. 자기들은 강원도 도청 공무원인데 환경답사 차 백두산으로 연수를 간다고 했다.

 

성수기에는 매표와 승선 수속에 시간이 꽤 걸리기에 동춘항운 측에서는 두 시간 전에 터미널로 오라고 했을 테지만, 비수기로 매표와 수속이 금세 끝나 승선시간까지는 시간 여유가 많았다.

 

의자에 앉아 준비물을 하나하나 다시 점점해 보니까 두 가지가 미비했다. 하나는 여행 가방에 붙인 꼬리표가 너무 작아 큰 걸로 사 붙이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큰마음 먹고 산 카메라 플래시에 들어가는 예비 건전지도 한 벌 더 사고 싶었다.

 

마침 눈에 띄는 구내매점에 부탁하자 매점주인은 배는 비행기와 달리 승객이 승선에서 하선까지 자기 짐을 소지하기에 꼬리표는 별 필요가 없다고 했고, 건전지는 하필 떨어졌다고 하면서 즉각 전화로 주문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국~중국 간 보따리 무역상인 듯한 여인이 꼬치꼬치 나의 행선지와 여행 목적을 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 경험에 따르면, 대체로 서민들은 자기 신분도 금세 노출시킬 뿐 아니라 상대의 프라이버시도 굳이 알고자 했다. 이와는 달리 부유층이거나 지식층일수록 자신의 정체를 감추거나 밝히지 않았다. 내가 고교시절 신문 배달할 때 가난한 집은 안방까지 훤히 볼 수 있었으나 부잣집에서는 수금할 때 대문 틈이나 우편함으로 영수증과 신문대금을 교환했다. 그랬으니 주인의 얼굴을 끝내 보지도 못한 채 늘 경비원이나 식모(가정부)만 상대했다.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자루비노로 가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하얼빈으로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했다.

 

"오늘 아침 뉴스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날이라고 나오더니 그 일 때문에 가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곧 자기의 정체를 곧장 다 털어놓았다. 자기는 중국 훈춘에 사는 조선족으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무역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훈춘이나 연길은 들르지 않느냐고 묻기에 이번 여정에는 없다고 답했다. 사실 훈춘에도 안중근 의사가 거사 1년 전인 1908년 7월부터 그해 9월까지 머물었다는 권하촌이 있어 애초에 여정에 넣었다. 하지만 비자발급 과정에서 중국 국경 출입은 한 번밖에 할 수 없다고 하는데다가 안중근 의사의 권하촌 시절은 학자에 따라 이론도 없지 않아 생략키로 했다.

 

매점주인은 오후 2시부터 승선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그 시간까지는 건전지가 도착하지 않을 듯하니 바깥에 가서 구입하는 게 실수하지 않겠다고 권하기에 터미널에서 가까운 슈퍼에서 건전지를 샀다.

 

안중근 행장(1)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 수양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한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요, 학자인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26대 손으로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 공이었고, 아버지는 문명이 높았던 태훈(泰勳) 공이고, 어머니는 배천[白川] 조(趙)씨(세례명 조마리아)로  3남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안중근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北斗七星)의 기운이 응(應)하였다 하여 자(字)를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안중근이 여섯 살 때인 1884년 아버지 안태훈이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의 꿈을 접고 일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들어와 숨다시피 살았다.

 

그래서 안중근은 이 마을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안중근은 이곳 서당에서 9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는데, 그는 공부보다 활쏘기, 사냥 등 무예를 더 좋아했으며, 특히 말 타기와 사격술에 뛰어나 인근 마을에 이름이 자자했다.

- 안중근의사 숭모회 <대한의 영웅> 10~11쪽

 

 

 

 

 

 

 

 

 

 

 

 

 

 

 

 

 

 

 

이 무렵의 일을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4세 되던 무렵에 조부 인수께서 돌아가시므로, 나는 사랑하고 길러주시던 정을 잊을 수 없어, 심히 애통한 나머지 병으로 앓다가 반년이나 지난 뒤에 회복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겨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 산과 들에서 사냥을 하며 다녔다. 차츰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 짐승들을 사냥하느라고 학문에 힘쓰지 않으므로 부모와 교사들이 크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치 않았다.

 

한 친구가 "너의 아버지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는데, 너는 어째서 장차 무식하고 천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 보아라.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쓸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는데, 만고 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千秋, 오래고 긴 세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항우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더 권하지 마라"고 했다.

 

- 안중근의사 숭모회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이하 안응칠 역사) 22~23쪽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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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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