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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의 성균관 유생인 이선준 역할을 맡은 믹키유천(본명 박유천).
 명문가 출신의 성균관 유생인 이선준 역할을 맡은 믹키유천(본명 박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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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소재로 한 KBS-2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월화 오후10시 방송)이 8월 30일 첫 전파를 탔다. 전도유망한 명문가의 자제인 이선준(믹키유천 분)과 몰락 양반가의 남장여인인 김윤희(박민영 분)가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빚어지는 각종 해프닝이 시청의 재미를 더하게 될 청춘 사극이다.

이 드라마의 제1·2부는 이선준과 김윤희가 소과(생원·진사 선발시험)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 경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좀 황당하다.

좌의정의 아들인 선준은 본래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소과를 통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의 합격은 떼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윤희는 처음부터 소과에 응시할 생각조차 없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어머니와 병든 남동생 윤식을 대신해 소녀가장 역할을 하는 윤희가 생계유지를 위해 남장을 하고 과거시험에 대리응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윤희는 이른바 거벽(巨擘)이 되어 큰돈을 벌기로 결심한 것이다.

클 거(巨)와 엄지손가락 벽(擘)이 합쳐진 '거벽'의 본래 의미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이 어휘는 '과거시험에 대리응시자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학문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기에 거벽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남장여장의 성균관 유생인 김윤희 역할을 맡은 배우 박민영.
 남장여장의 성균관 유생인 김윤희 역할을 맡은 배우 박민영.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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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벽이 돼 시험장에 들어간 윤희. 그를 고용한 사람은 알고 보니, 일전에 알게 된 선준이었다. 윤희가 남장여자인 줄을 모르는 선준은 거벽이라는 미끼를 놓아 윤희를 시험장으로 유인하고 그런 뒤에 윤희가 직접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윤희의 실력이 아깝다는 생각에 윤희에게 기회를 주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자신이 거벽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윤희는 무사히 시험장을 빠져나오기 위해 동생 윤식의 이름으로 답안지를 작성했고, 그 답안이 마음에 든 정조 임금은 윤희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 집어넣었다.

선준 역시 합격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선준과 윤희는 임금의 명에 의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향후 성균관을 무대로 벌어질 스캔들의 두 주인공이 그렇게 그곳에 입학한 것이다.

좀 황당한 출발이기는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은 위와 같이 정조시대의 '거벽'을 소재로 이야기의 첫 단추를 풀었다. 과거시험 제도의 음침한 치부 즉 시험부정의 만연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것이다.

정조시대, '어둠'과 '밝음'의 양면의 시대

'정조시대'와 '시험부정의 만연'. 어쩐지 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정조시대는 르네상스니 문예부흥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건전한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정조시대에 시험부정이 만연했다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르네상스'란 말은 '재생'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존의 것이 낡고 병들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정조 즉위 이전부터 조선왕조의 시스템이 낡고 병들지 않았다면 정조가 르네상스나 정치개혁 등을 추구했을 리 없다.

따라서 정조시대는 재생을 추구했다는 측면에서는 '밝은 시대'이지만, 재생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부패했다는 점에서는 '어두운 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시대의 그 같은 어두운 측면을 이룬 것 중 하나가 바로 시험부정이었다.

시험부정의 만연을 갖고 '어두운 시대'를 운운하는 것이 좀 과하다고 느낄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오늘날 행정고시 그 이상의 것이었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굳이 고시를 패스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출세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만이 거의 유일한 출세 코스였다. 과거 합격자들이 권력·경제력·명예 같은 사회적 가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과거시험의 부정은 곧 사회적 가치의 분배를 왜곡시키는 사회악이었다.

그리고 군주를 도와 국가를 운영할 관리들이 이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뽑히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국가 운영 역시 막대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큰돈 들여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시험에 합격할 수 없는 '깡통'들이 관직들을 차지했으니, 국가 경영에서 덜커덩 덜커덩 소리가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물론 조선 시대 내내 시험부정은 항상 골칫거리였지만, '4백 살'이나 된 왕조가 피로로 지친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특히 문제가 된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의 4인방. 왼쪽부터 문재신(유아인 분), 이선준, 김윤희, 구용하(송중기 분).
 <성균관 스캔들>의 4인방. 왼쪽부터 문재신(유아인 분), 이선준, 김윤희, 구용하(송중기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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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부정이 이루어졌을까? 시험부정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정조 1년(1777) 1월 29일 자 <정조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정조 임금이 즉위 직후부터 시험부정 타파를 시급한 국정현안으로 설정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 앞에서 커닝페이퍼 돌려봐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을 정시(庭試)라 불렀다. 조교가 감독하는 시험도 만만치 않는데, 하물며 임금이 참관하는 시험이라면 부정행위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영조 25년(1749) 가을에 열린 정시에서는 한 사람의 답안지를 열 명이 돌려가면서 베끼는 부정행위가 발생했다(영조 25년 11월 5일 자 <영조실록>). 물론 똑같이 베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심이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한두 마디라도 자신의 생각을 첨가했을 것이다. 아무튼 임금이 지켜보는 시험에서 답안지를 돌리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과거시험의 권위가 이미 땅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뒤에 소개될 영조 41년의 사례에 나타난 것처럼, 감독관이 시험 시간을 '너무 충분히' 주다 보니, 한 사람의 답안지를 열 명이 돌려보는 사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사료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어쩌면 시험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임금이 지루해서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에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임금 역시 사건의 공동책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답안지를 다음날 새벽에 제출해도 된다?

수험장에서 눈총을 받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답안지를 너무 빨리 제출하고는 거들먹거리며 수험장을 나가는 바람에 나머지 수험생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사람. 또 하나는 '땡!' 하고 종이 울렸는데도 상체를 숙여 답안지를 가리고는 "딱 1분만 시간을 더 달라!"며 감독관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유형이다. 특정인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것은 시험의 공정성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특정 수험생에게 1~2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음날 새벽까지 기회를 주는 부정행위가 자주 발생했다. 영의정 홍봉한이 영조 임금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밤을 새워 답안지를 작성하는 과거 응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남들 다 돌아간 뒤에 혼자서 밤을 새워 답안지를 쓰다가 새벽에야 겨우 제출하는 것이다(영조 41년 11월 2일자 <영조실록>). 은밀한 불법거래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특정인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문제지만, 텅 빈 시험장에서 밤새도록 답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부정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영의정이 국왕에게 보고할 정도였으니,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합격자보다 더 유명한 거벽들

정조가 시험부정 타파를 천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대리응시자들인 거벽들의 '준동'은 별로 움츠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벽 활동으로 명성을 얻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봉환·이환룡·이행휘·노긍은 당시의 인기 거벽들이었다(정조 1년 1월 29일 자 <정조실록>).

이들이 학문적 실력을 갖추고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대리응시로 돈을 번 것은 관료 봉급보다 거벽 수입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제도권 안에 들어가기보다는 제도권 밖에 머물려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 그만큼 낡고 병들어 인기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균관시험 합격자의 절반이 일자무식?

영조 말년에 성균관 대사성 홍술해가 주관한 두 차례의 성균관시험에서는 합격자의 절반이 글도 모르고 글씨도 못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홍술해가 사전에 미리 합격자를 정해 놓고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관한 두 차례의 성균관시험은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정조 1년 1월 29일 자 <승정원일기>).

사료에 자세히 설명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홍술해가 주관한 시험은 성균관 유생들을 상대로 한 시험인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는 성균관 유생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것도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합격자의 절반이 일자무식이었을 리는 없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장 중 하나인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장 중 하나인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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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공부 않고 과거에 합격하는 장관 자제들

대체로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그만큼 든든한 재정적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든든한 지원을 받는다 해도 본인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최소한의 학습량이 전제될 때에만 재정적 지원도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최소한의 학습량'이 없어도 '돈'만 있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사간원 관료인 김익조는 정조 4년(1780)에 올린 상소문에서 "십몇 년 전부터 재상집에서 자제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그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해서 좋은 관직을 받고 있다"고 개탄했다.

최소한의 학습량도 없는 '깡통'들이 부모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상소문의 내용을 보아 그런 현상이 영조 집권기의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특히 정조 즉위 이전 시기와 정조 집권기의 시험부정은 위에 소개한 몇몇 사례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사례들만 열거해도 아마 책 몇 권은 나올 것이다. 사회가 그렇게 심각하게 썩었기 때문에, 정조 임금이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니 문예부흥이니 하는 것들을 그처럼 정력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그의 개혁이 취소된 뒤부터 조선이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구한말의 파국을 맞이한 사실은 정조시대가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정조시대는 곪을 대로 곪은 시대였다.

그처럼 병들고 썩었다는 점에서는 '죽어가는 사회'요, 그런 조선을 되살리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는 '살아나는 사회'이니, 정조시대는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등장한 드라마가 KBS-2TV의 <성균관 스캔들>이다. 이 드라마가 그 같은 당시의 사회상을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줄지 관심이 주목된다.


태그:#성균관 스캔들, #과거시험, #정조, #거벽, #커닝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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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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