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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국민의 방송', 행동은 '정부의 방송'인 KBS에서 사라진 '공영방송' 개념이 다시 돌아올까.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 노조․본부장 엄경철)의 '개념탑재' 파업 13일차인 지난 13일, 새 노조는 세 번째 지하철 선전전을 통해 국민에게 KBS 노동자들의 파업을 알려냈다. 지하철 6호선을 담당한 보도국 조합원들의 대국민선전전에 동행했다.

 

"'가문의 영광'이던 KBS기자직이 부끄러워졌다"

 

"집에 'KBS를 살리겠습니다'고 적힌 파업수건을 갖고 갔더니 5살인 아이가 '엄마, KBS가 죽었어?'라고 묻더라고요. '어, 사장 아저씨가 엄마한테 자꾸 거짓말하라고 해'라고 했더니 '나쁘네. 내가 경찰 아저씨한테 말해 줄까?'라고 하더군요."

 

지하철 승객들에게 "KBS가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일일이 설명을 하던 송명희 기자 역시 파업에 참가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입을 열었다. 송 기자는 남편과 함께 번 돈의 상당부분이 입주해서 아이를 돌봐주는 아주머니 월급으로 쓰이는 상황에서 '무노동 무임금'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두려움을 뚫고 파업에 참여한 건 '가문의 영광'이던 KBS 기자직이 점점 부끄러움으로 바뀌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추진한 무상급식이나 학생인권조례 같은 아이템을 올리면 위에선 계속 '그게 먹히겠어. 그거 될 것 같아?'라면서 부정적으로 얘기하죠. 그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면 '이거 올려봐야 잘 안 될 텐데 위랑 싸우는 시간에 다른 걸 취재하자'는 식으로 바뀌게 되죠." 송 기자는 자기검열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보도국 대의원이기도 한 황현택 기자는 "우연도 계속되면 필연이라는데 어쩌다 가끔도 아니고 계속해서 기사 아이템들이 접히면서 스스로 기사를 걸러내게 됐다, 파업 직전에는 '이러다가 취재 출입처에서 쫓겨나든가 아니면 내 발로 스스로 나오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면서 기자로서 가졌던 고뇌를 털어놓았다.

 

상부 압력에도 파업 대오 늘어나

 

 

공덕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일행이 잠시 멈춰 선 사이, 지난 겨울 폭설보도로 일약 유명인이 된 박대기 기자가 뒤늦게 선전전에 결합했다. 파업 중임에도 양복차림이다.

 

선배들의 "웬 양복이냐?"라는 반응에 박 기자의 대답은 "바지가 하나 밖에 없는데 빨았어요"였다. 땀을 뻘뻘 흘리던 박 기자는 양복 상의와 파업 특보묶음을 함께 든 채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선배 기자들의 걱정이 이어졌다. "대기가 말은 안 해도 속 많이 썩히고 있을 거야. 얼굴도 많이 알려졌는데 파업 문화제 때 율동도 하고 그랬으니 위에서 압력이 있겠지…." 기자들한테 상관들의 말은 무시 못 할 압력이라는 게다.

 

황 기자는 "정치부 등 보수적인 부서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부서에서 소수이기도 하고 부서 분위기상 파업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파업 3주차에 접어든 이번주부터는 그 조합원들도 전면 결합할 예정이다"라면서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조합원들의 파업열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파업 결의대회에서부터 지하철 선전전까지 새 노조 조합원들의 표정은 밝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연일 30도가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서 보름 가까이 파업한 사람들 같지 않아 그 비결을 물으니 한 기자가 "우리 노조는 순도가 높아요"라고 답했다. 전혀 사측을 견제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노조를 개별적으로 탈퇴한 후 새 노조에 가입한, 의지가 강한 조합원들이라는 뜻이다.

 

송 기자는 "(낙하산이던) 이병순 사장 때부터 쌓였던 조합원들의 불만이 (대통령 특보 출신인) 현재의 김인규 사장에 이르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폭발했다"면서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파업 중에 새 노조 조합원이 오히려 100여 명 늘어난 것만으로도 KBS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읽힌다.

 

버라이티 정신은 대체될 수 없다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지하철 선전전 동안 이들에게 시비 건 '보수 할아버지'는 없었다. 선전물을 받아든 시민들은 유심히 선전물을 들여다봤고, 달라고 먼저 손 내미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보도국의 한 고참 기자는 "우린 복 받은 거죠, 요즘 어떤 노조가 파업한다고 국민들이 관심이나 가져 주나요, 그래도 우리는 시민들 만나면, 특히 젊은 분들 반응이 좋죠"라면서 시민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아직 아쉬움도 많다. 송 기자는 "MBC 파업 때는 국민들이 MBC 파업 하는 줄 다 알았는데 저희는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방송에 차질이 생기지 않아서…, 오히려 사측이 <해피선데이-1박2일> 스페셜 방송하면서 '불법파업' 자막을 넣어줘서 홍보가 됐어요"라고 말하면서도 'KBS 파업'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걸 안타까워했다.

 

파업 첫 주에 방송되지 못했던 <해피선데이-1박2일>이 둘째 주엔 대체인력이 투입돼서 편집돼 방송됐다. 이에 대해 예능국 조합원들은 파업 13일차 결의대회에서 '대체인력 투입? 버라이티 정신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촬영현장을 본 적도 없는 외부 PD가 투입되면 방송의 질이 현저히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방송의 질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단지 파업이 숨겨지기만을 원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열망과 국민의 요구를 모른 척 묵살하겠다는 자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들은 "우리에겐 '버라이어티 정신'이 있다. 편안함과 아늑함을 거부하고 불편함과 고단함을 지향한다, 좋은 게 좋은 적당함을 배제하고 지칠 줄 모르는 독기와 끈기를 표방한다, 현재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KBS의 공익적 예능은 지난 수십 년간 숱한 예능PD들이 숱한 밤을 지새우며 '버라이어티 정신' 하나로 구축해 온 성과"라면서 '버라이티 정신'은 대체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KBS 개념탑재에 시민이 나설 차례

 

뉴스로 세상의 소식을 전하고, 예능으로 세상을 웃겼던 KBS 새 노조 조합원들이 마이크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파업하면 이길 수 있을까' 송명희 기자의 이 질문에 그의 남편은 "싸우기 싫으면 당하고 살든가!"라는 한 마디로 그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단다. 900여 새 노조 조합원들의 가슴 곳곳에도 "KBS 공영방송 맞아?"라는 시청자들의 매서운 질타가 박혀있다.

 

프랑스 시인인 폴 발레리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당신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사측의 계속된 아이템 차단으로 스스로 자기검열에 들어가고, 어느 순간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희미해져 가는 자신이 두려워졌다는 새 노조 조합원들은 파업을 통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제 이 선언에 공영방송 KBS를 살리겠다는 국민이 대답할 차례다.

 

새 노조는 파업 15일차인 15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KBS 개념탑재의 밤' 2차 문화제를 연다. KBS에 개념탑재가 필요하다고 보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제다.


태그:#KBS 파업, #새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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