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수리가 된 동이.
 무수리가 된 동이.
ⓒ MBC

관련사진보기


숙종 시대 궁중 여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지난 21일과 22일의 제27부 및 제28부에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동이(최숙빈, 한효주 분)가 무수리의 신분으로 다시 입궁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장 희빈(이소연 분)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 분)의 핍박을 피해 평안도 의주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동이는 천신만고 끝에 한양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장희재의 지휘를 받는 군사들이 시내 곳곳에 배치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궁에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수리의 길이었다.

무수리가 된 동이가 배치된 곳은 세답방(洗踏房)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세탁소. 동이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세답방에서 궁녀의 지휘를 받으며 힘든 빨래 일을 하다가 장희재에게 발각되어 또다시 궐을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이의 짧은 무수리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궁녀 시절의 최 숙빈이 궐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하다. 또 최 숙빈이 본래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이야기 역시 아무 근거가 없다. "무수리 출신이 아니었겠느냐?"는 식의 이야기는 있었어도, 그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궁녀 문제의 권위자인 김용숙도 196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최 숙빈이 무수리였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23년 뒤인 1987년에 발간한 저서인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서는 최 숙빈이 무수리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며 이전의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은 적이 있다.

이처럼 최 숙빈이 무수리였다는 근거는 전혀 없지만, 최 숙빈 문제와 관계없이 무수리란 존재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무수리 문제를 추적하다 보면 조선시대 정치의 본질적 구도에까지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궁녀를 선발해도 될 텐데, 왜 하필이면 무수리를 따로 두었을까? 궁녀라는 것은 궁에서 근무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무수리도 궁에서 근무했으므로 궁녀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굳이 궁녀라는 명칭을 피하고 무수리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불렀을까?

이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조선 왕실에서 무수리를 뽑을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가 조선의 정치구도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영조가 궁녀 문제로 울음을 터뜨린 사건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의 아들이 임금이 된 뒤였다. 때는 영조 13년(1737) 3월 26일, 장소는 조선 왕궁의 어전(御前, 임금의 앞).

조정과 비변사의 고위 인사들이 조선 제21대 영조 임금 앞에 모여들었다. 비변사란 요즘 말로 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같은 기구라 할 수 있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영조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영조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이현필이란 과거 응시자가 제출한 답안지가 정국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현필이 아주 당돌한 태도로 영조 임금의 실정(失政)을 낱낱이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 답안지의 내용이 영조에게는 큰 쇼크였다. 게다가 그 내용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영조의 쇼크는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이 일로 인해 영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현필이 지적한 영조의 문제점 중 하나는 궁녀를 지나치게 많이 뽑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할 때에, 이현필은 영조가 "600명의 궁녀도 부족하다"고 말한 사실을 근거로 영조를 코너로 몰아세운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대비(인원왕후)를 위해 궁녀를 더 뽑고자 한 것인데 이현필이 자기의 뜻을 왜곡했다면서, 영조는 자신을 위로하러 찾아온 대신들 앞에서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임금 노릇 하기가 정말로 어렵다"면서 그는 이현필에게 욕을 당했다며 분개했다. 게다가 그런 이현필이 과거에 합격하기까지 했으니 영조의 분노는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 영조. 사진은 51세 때의 모습.
 신하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 영조. 사진은 51세 때의 모습.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44세가 된 왕(영조는 1694년 출생)이, 그것도 보위에 오른 지 13년이나 된 왕이 일개 선비의 답안지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연상해 보라. 영조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난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왕실에서 궁녀를 뽑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궁녀를 더 뽑으려고 하면, 이현필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국왕을 비난하고 제동을 거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관직을 얻고자 하는 선비가 과거 답안지에 국왕의 궁녀 선발을 비판하는 내용을 기재하고 시험관들 역시 그런 선비에게 합격의 영예를 주고 임금은 그것 때문에 자기 혼자 속을 끓이는 이 장면은, 조선시대에 국왕이 궁녀를 선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나마 영조는 궁녀를 많이 선발한 임금에 속한다. 영조 때에는 600명 정도의 궁녀를 확보했지만, 그 이전 같으면 그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제4대 세종 때에는 궁녀의 숫자가 1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이 두고두고 칭찬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궁녀가 100명을 넘은 때는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77년 만에 즉위한 제9대 성종(재위 1469~1494년) 때였다. 병력 증강보다도 더 힘든 게 바로 궁녀 증원이었다.

궁녀를 증원하려는 왕실의 지속적인 '투쟁'이 결국 영조시대에 성과를 거두어 600명의 궁녀를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현필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영조가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왕권 강화를 막기 위해 궁녀 선발에 제동을 걸었던 기득권층

이렇게 국왕의 궁녀 선발에 제동을 건 사람들은 관료나 지주를 포함한 양반 기득권층이었다. 그들이 제동을 건 이유는 무엇일까? 국왕이 궁녀들을 어떻게 할까봐 그랬을까? 그것은 아니다.

기득권층이 국왕의 궁녀 선발을 반대한 것은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내시(환관)이든 궁녀든 간에 왕 옆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왕이 그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히 왕권 강화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기득권층 자제들은 과거에 합격해서 왕의 신하가 되더라도 왕의 정책이 자기 계층의 이익을 침해하면 어김없이 "아니 되옵니다!"라며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내시나 궁녀들은 사회적 연고가 별로 없기 때문에 왕의 정책이 자기 계층의 이익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왕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사람들이 왕 옆에 많아지면 왕권이 신권(臣權, 양반들의 권력)을 능가할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층이 국왕의 궁녀 선발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데에는 이런 정치원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힘겨루기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궁녀의 증원을 어떻게든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 있는 품계석.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이곳에서 품계에 따라 도열했다. 양반 관료들은 형식적으로는 계단 아래에 섰지만, 계단 위에 있는 왕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능가했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 있는 품계석.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이곳에서 품계에 따라 도열했다. 양반 관료들은 형식적으로는 계단 아래에 섰지만, 계단 위에 있는 왕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능가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이처럼 궁녀 선발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의 국왕들은 편법을 생각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득권층이 반대한다고 해서 궁녀 선발을 자제하면 왕궁을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실질적으로는 궁녀나 마찬가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궁녀가 아닌 여인들'을 보다 많이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런 필요에 부합했던 여인들이 바로 무수리들이었다. 이들은 정식 궁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궁녀 명부에 이름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궁녀 명부에 없는 여인들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들에 대해 마땅히 개입할 명분도 없었다. 일손이 너무 딸려서 궐 밖에서 좀 데려다 쓰겠다는데 그것까지 말릴 명분은 없었던 것이다.

조정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무수리에게 일종의 비정규직 신분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궁녀나 마찬가지였다. 궐내에서 가장 힘든 책임인 물 긷는 일과 불 때는 일은 이들의 몫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궁녀를 보조하기 위해 임시로 데려다 쓰는 여인들이라고 했지만, 이들이 맡은 일은 본래 궁녀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궁녀보다 훨씬 더 힘들게 일하면서도 궁녀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신분은 궁녀보다 훨씬 더 열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희궁 숭정전에 있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이 자리의 주인들은 항상 양반 관료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 옆에는 서울역사박물관도 있다
 경희궁 숭정전에 있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이 자리의 주인들은 항상 양반 관료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 옆에는 서울역사박물관도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위와 같은 점들을 볼 때, 조선 왕궁에서 무수리를 많이 선발한 것은 기득권층의 견제를 피해 궁궐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권이 왕권을 압도한 조선 정치의 현실이 무수리를 양산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사에서 조선왕조 때처럼 왕권이 신권에 눌렸던 적도 없을 것이다. 왕이 의욕적으로 무슨 일을 추진할 때마다 툭 하면 "아니 되옵니다!"를 외친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인 학자들도 매우 신기해 할 정도다.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영조 같은 임금조차도 "임금 노릇하기 힘들다"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면 다른 왕들은 오죽했을까?

이처럼 무수리는, 기득권층에 눌려 궁녀조차도 제대로 선발하기 힘들었던 조선 국왕들의 처지를 반영하는 존재였다. 궁녀 선발을 막기 위해 양반 관료들이 임금을 압박하면 할수록 무수리들이 그만큼 더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태그:#동이, #최숙빈, #숙빈 최씨, #무수리, #조선시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