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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리> 작가 김혜나씨
 소설 <제리> 작가 김혜나씨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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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꼴찌를 도맡아 했다. 자연히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출에 정학을 훈장처럼 달고 다녔고, 대학 따위는 애당초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수능도 보지 않았다.

"20살에 호프집이나 바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클럽 가고, 그렇게 매일매일 삶을 소비하면서 살았어요. 노는 게 편하고 노는 게 좋고, 그냥 이렇게 술이나 먹으면서 멍청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삶이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매일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집에 들어가고… 그런 삶이 일 년 정도 반복이 되니까 20살이 끝날 무렵에 '나는 과연 어디에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던 김혜나(28)씨가 한수산, 이문열 등의 쟁쟁한 문인들을 배출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사건(?)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같다.

"신문에 '오늘의 작가상' 수상한 것이 보도가 됐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친척 분들과 지인 분들께 '우리 혜나가 신문에 났다'고 하니까, 무슨 큰 사고를 쳤는데 신문에 다 났느냐고 하시더래요. 만날 가출하고 정학 받고 그랬으니까요. 제 친구는 전철에서 신문을 보다가 제 기사를 발견하고 '억' 소리를 지르면서 신문을 떨어뜨렸다고 하더군요."

'오늘의 작가상' 김혜나에게 꿈은 뭐였을까

김혜나씨의 수상작인 <제리>는 그녀의 20살 시절의 삶과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주인공인 '나'는 인천에 있는 2년제 대학 야간반에 재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간 스물두 살의 여성. 매일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고 이미 헤어진 남자 친구 '강'과 의미 없는 섹스를 나누며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주인공 '나'는 우연히 노래바에서 시간당 3만 원에 불러들인 열 명의 남자 선수들 중에 '제리'라는 남자에게 왠지 모르게 끌리게 된다.

<제리>는 필자에게 소설이라기보다는 20대 청년들의 부유(浮遊)하는 삶을 세밀하게 묘사한 임상병리 보고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노골적인 성애장면 묘사도, 술과 유흥으로 점철되어 초록색 위액을 쏟아내며 흐느적거리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전혀 과장되거나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표현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인터뷰나 취재를 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 답에서 내가 <제리>를 읽으면서 느낀 자연스러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따로 취재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제 주변의 사람들을 정말 주의 깊게 봅니다. 오랫동안 깊게 들여다 보는 것 같아요. 20살에 만났던 친구들, 그러니까 백화점이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친구들, 바나 클럽에서 일하는 친구들, 단란주점 일하는 여자애들, 호스트바나 나이트 일하는 남자애들, 이 친구들과 술 먹고 어울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제리>에 나오는 호스트바의 내밀한 얘기들도 일부러 찾아가서 취재한 것이 아니라 호스트바에서 일하던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제 머릿속에는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잔상처럼 남아있습니다. 저는 제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제 머리로 생각하고 제 가슴으로 느낀 것을 쓰고 싶어요.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방식은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내가 경험한 삶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와 닿지가 않아요. 와 닿지 않으면 제 언어로 쓸 수가 없거든요."

"노는 것 말고 재밌는 게 뭐 있을까 고민했어요"

필자가 <제리>를 읽으며 인상에 남았던 부분이 있다. '꿈'에 대해서 얘기하는, 바로 아래의 내용이다.

소설 <제리>의 표지
 소설 <제리>의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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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 부름이 하도 생뚱맞고 또 악에 받친 듯해 나는 목구멍으로 넘기던 소주를 발칵 내뱉을 뻔했다. 구강에 힘을 주어 소주를 꿀꺽 삼키고 나서 왜? 하고 되물었다.

"언니. 언니는 꿈이, 뭐야?"

애써 넘긴 소주가 목구멍에서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마신 소주를 죄다 뱉어 놓아도 부족할 정도로 기가 막힌 질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차 선배, 임 선배, 박 선배, 그리고 여령 언니까지 모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꿈이 무엇이냐니. 서울도 아닌 인천의 2년제 대학 야간반에 재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간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니.

…(중략)…

"술이나 마셔."

나는 미주의 잔 앞으로 내 잔을 들이밀며 말했다. 미주는 그제야 조금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언니는 꿈이 없단 말이지?"

"나는 그냥…."

"그냥 뭐?"

나는 그냥,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면,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였던 적이 없었다. 여럿이 술을 마시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같이 술 마셔 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인생에서 꿈이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인생을 살까? 아마도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자극에서 오는 행복으로 살 것이다. <제리>가 유독 목적 없고 의미 없는 성애장면을 빈번하게 다루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꿈이 없는, 아니 꿈을 빼앗긴 세대가 도대체 무엇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김혜나씨가 20살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난 것은 '언니는 꿈이 뭐야?'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슬픈(?)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20살이 끝날 무렵에 나는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 않고 빈껍데기만 남아서 여기에 이렇게 있나,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그러면서 처음 존재에 대한 고민이 들었습니다. 노는 게 더 이상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노는 것 말고 재밌는 게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안 떠오르더라고요. 한 달 반 동안 계속 좋아하는 게 뭘까 고민했는데요. 예전에 수업시간이 재미없어서 국어책에 있는 문학작품들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소설책 가져와서 교과서 사이에 끼워놓고 읽었거든요. 그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거예요. 수업을 견디기 위해서 읽긴 했지만 소설이 싫지는 않았거든요. 그냥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전에는 요가강사로, 오후에는 작가로

소설 <제리> 작가 김혜나씨
 소설 <제리> 작가 김혜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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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열심히 소설을 읽으면서 어려운 책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려운 소설들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서 부랴부랴 입시학원에 가서 공부를 한 후 수능을 치르고 청주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다. 김혜나씨는 말 그대로 노는 것처럼 공부했단다. 천재도 즐기는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예전에 꼴찌를 도맡아 하던 김씨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설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물론 현실의 장벽도 만만치는 않지만.

"대학을 졸업했는데 너무 막막한 거예요. 저는 그냥 공부만 했거든요. 취업준비를 따로 한 게 아니었어요. 자격증을 딴다거나 토익을 본다거나 그런 걸 안 했어요. 지방대 나왔고 스펙도 안 되고요. 설사 스펙이 돼서 취직을 해도 그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직장을 다니면 소설을 쓰기는커녕 읽을 시간도 없거든요. 그래서 너무 삶이 괴로웠어요. 결국 여기저기 취직했지만 한 달 이상 다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돈은 안 벌 수 없어요. 어머니랑 둘이 사는데, 어머니는 경제적 능력이 없으시니까 제가 어떻게든 취직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소설을 쓴다고 해서 등단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설사 등단이 된다고 해도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요. 누가 꾸준히 책을 내줄 것도 아니고… 정말 암울했죠."

소설을 쓰고 돈도 벌기 위해서 김혜나씨는 레스토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에 6시간 정도 일을 했다. 그래서 한 달에 60~70만 원 정도 벌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남은 시간에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러다가 마침 건강을 위해서 꾸준히 해오던 요가로 강사 자격증을 따면서 요가 강사를 하게 됐다. 다행히 예전에 하던 아르바이트 일보다는 벌이가 괜찮아서 오전에 요가를 가르치고 오후에 집에서 글을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단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런 후에 주변의 눈치를 보거나 하지 말고 정말 내 마음의 울림을 따라 가봤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 길이 잘못된 길이거나 안 좋은 길일 수도 있지만, 길 잘못 갔다고 해서 저는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잘못 갔기 때문에 배우는 게 반드시 있거든요. 과감하게 도전해보면 좋겠어요."

또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또박또박 이렇게 얘기한다. 사실 김혜나씨가 특별히 색다른 얘기를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누구도 말로는 쉽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혜나씨의 말에 울림이 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올해 안에 단편 하나, 장편 하나를 준비하고 있다는 김혜나씨. 그는 앞으로도 자신의 얘기, 그리고 자신과 친한 사람들의 얘기를 쓰고 싶단다. 그렇다면 아마도 <제리>에서처럼 팍팍한 삶에 상처받고 사회의 모순 속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김혜나씨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제리 -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혜나 지음, 민음사(2010)


태그:#김혜나, #제리,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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