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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기로 했어."

집에 돌아온 중2 딸이 말했다.

"또 노래방이야? 매번 홍대앞 가는 것 지겹지 않니? 이번엔 교보같은데 가보면 어떨까? 아님 공연 보든지. 엄마가 표 끊어줄게."

딸이 좋아하는 간식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힐끗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럴까? 애들한테 물어볼게."

딸의 태도에 안심했는데 시험 끝나고 집에 온 딸이 "애들이 또 책이냐고, 지겹대. 홍대 가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그날 결국 딸은 용돈 3만 원을 타내서 친구들과 홍대 앞으로 갔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딸 친구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아인 서울랜드 갔어요. 찜질방 가서 피로나 풀고 왔으면 좋겠는데 문화가 그런지 원."

나직한 한숨이 섞인 말이 배어나온다. 목동 사는 중3 자녀를 둔 또 다른 엄마는 "아이가 친구랑 가지 엄마랑은 재미없대요. 공연이나 체험학습도 좋은데. 중학생은 보낼 데가 없어요"라고 안타까워했다.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 풀려고요

중간고사 끝나고 홍대앞에 몰려온 청소년들
 중간고사 끝나고 홍대앞에 몰려온 청소년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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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중고등학교는 중간·기말고사 시험기간을 4 - 7일 정도로 길게 잡고 하루에 2교시전후로 시험을 본다. 내신이 강화되면서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학교 측의 배려라고 학교 관계자는 말했다. 시험 끝난 날은 그동안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이 보통이다.

학생들은 어디로 놀러 갈까? 노래방, PC방, 음식점, 패션몰까지 들어서 있는 이대 앞, 홍대 앞, 명동은 서울에 사는 청소년들의 문화의 중심지가 된 지 오래다.  5월초, 7월 중순에 이곳을 지나다 보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학생들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오후 12시 홍대 앞을 찾아갔다. 골목마다 가게에서 옷을 만지작거리는 여학생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PC 방으로 줄줄이 들어가는 남학생들, 무언가를 고르고 있는 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오후 1시경 홍대앞 S 노래방 앞에서 여학생 세 명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친구들로, 시험 끝나고 노래방에 가는 중이라 했다.

"중 1때부터 쭉 다녔어요."
"다른 것 할 시간이 안돼요"
"놀이동산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노래방 가요"
"이것 말고 다른 프로그램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에 만족해요. 그냥 재미있어요."

나와 헤어지자마자 여학생들은 노래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들을 따라 들어가 보니 여러 무리의 학생 손님들과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잘생긴 웨이터가 취재한다는 말에 바쁜 중에도 친절을 베풀었다.

"이 기간에는 비싼 특실을 제외하고는 빈방이 거의 없습니다. 시험 끝난 학생들이 교복입고도 많이 옵니다."

이 노래방은 학생들이 오면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고 평일 낮에는 추가시간 서비스도 많이 준다고 했다. 시간당 10,000원 - 13,000원(한 사람당 2000원 이내)으로 5, 6명의 학생들이 한 시간 이상 맘껏 떠들며 놀 수 있다. 놀이동산 청소년 자유이용권 30,000원(엄마 카드로 최대한 할인 시 17,500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다.

2010년 5월 4일 본 기자는 딸에게 부탁하여 마포구 모 중학교 2학년 1반 38명의 학생들에게 시험 끝난 후 실제 무엇을 했는지 조사해 보았다. 19명의 남학생은 PC방 - 노래방 - 놀이동산 - 집(게임), 19명의 여학생은 쇼핑(이대 앞, 홍대 앞) - 노래방 - 놀이동산 - 카페(수다)에 갔다. 왜 이런 공간을 찾는지 물었더니 대답은 단순했다. "놀려고요."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 풀려고요."

이런 것 외에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연예인 콘서트 관람, 번지점프, 1박2일 여행을 꼽았다. 포털 사이트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점프 하는 곳"을 쳐봤다. 위쪽으로는 철원, 아래쪽으로는 분당 율동공원이 나온다. 비용은 30,000원, 학생들이 시험 끝나고 부담없이 갖다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 먼 가격이다.

학교 선생님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6년을 휴직했다 얼마 전에 복직한 은평구 모 중학교 과학교사는 "한 두 번 가다가 재미없다고 안 가요. 너무 염려마세요"라고 했다. 성북구 모 중학교 도덕교사는 "예전에는 몇몇 아이들만 그랬는데 요즘은 대부분이 그래요"라고 답한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글쎄요"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부천의 모 고등학교 과학교사는 "보통 그런데 많이 가요"라며 그것 말고는 없느냐는 질문에 "시험 끝나고 농구하는 애들 보기 좋던데... 우리 학교 어떤 애는 대학가는 포트폴리오 때문에 친구들끼리 과학실험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시간 날 때마다 토의하고 실험하는 애들도 있어요. 시험 끝나고도 모이던데, 그 앤 아마 서울대 갈 것 같아요"라고 답을 했다.

취재 중에 만난 모든 학생들이 시험 끝난 후 몰려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엄마랑 함께 시간을 보내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시험 끝난 후 노래방과 PC방에 가는 추세다.

친절하지 않은 청소년 프로그램

<한겨레21> 2003년 11월 27일자에는 문화관광부가 운영하는 전국의 청소년관련시설이 603곳으로 각 구청에서 운영하는 구립 청소년센터, 청소년 단체들이 만든 문화시설을 다 합하면 청소년 문화 인프라가 부족하지 않다고 나온다.

그런데 왜 청소년관련 시설에 가는 학생을 만날 수 없고, 학부모는 보낼 데가 없다고 할까? 중2 여학생 3명에게 청소년 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지 물었다. "그게 뭔데요? 그런게 있어요?" 라고 되묻는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5명에게도 물어봤다. 아이 교육에 열심이고 학원에 대해 물어봤으면 줄줄줄 말했을 엄마들이다. "전혀 모른다" "아는 곳이 없는데 알면 나한테도 알려줘요"라고 말했다. 여기 저기 물어보고 다니며 대안 교육에 관심 있는 한 엄마가 "그런 곳 있어요. 민들레나 하자센터 가면 될텐데"라고 알려줬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해봤다. "우리아이가 중2이고, 7월 8일 기말고사가 끝나는데 그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나요?"라고 물어보자 민들레는 6월말- 8월 중순까지 방학이란다. 하자센터는 학교에서 단체로 신청해야 하고 개인 접수는 안 받는다고 한다. 개인은 주1회 저녁에 가서 하는 4주짜리 프로그램을 권했다. 이것도 아니었다. 마포구 청소년 수련관 홈페이지를 가봤다. 정규 프로그램, '놀토' 프로그램만 있지 청소년들이 여유 있는 시간에 자유롭게 가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취재를 통해서 느낀 것은 청소년 센터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을 찾아가기에는 청소년들이 학교, 학원 다니느라 너무 바빴고, 그런 프로그램조차도 보통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것들은 시간, 거리, 가격 면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

시험 끝나 쉬고 놀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에게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들이 오히려 더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청소년들이 노래방, PC방, 쇼핑, 놀이동산으로 몰려다니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 우리 딸을 보낼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은 엄마인 나에게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온다. 이번에도 시험 끝나는 날 딸은 친구들과 함께 어디를 갈지 고민할 것이다. 딸의 고민 앞에 "노래방 말고는 없는거야?"라고 물어볼 용기가 안 난다. 그러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딸의 질문에 답할 시원한 대안을 지속적으로 찾아볼것이다.


태그:#청소년, #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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