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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
 MBC 드라마 <동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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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궐 안'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MBC 사극 <동이>가 요즘은 '궐 밖'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장희재(김유석 분)의 수하들이 던진 표창이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는데도, 무슨 방탄조끼라도 입은 것인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평안도 의주에 살고 있는 주인공 동이(한효주 분)는 궁궐 복귀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의주에서 하필이면 장희재를 만나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된 동이는 심운택(김동윤 분)이란 선비의 도움으로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드라마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죽고도 남았을 동이는 '작가의 배려'로 목숨을 유지하면서 오로지 '궁궐로의 귀환'만을 꿈꾸고 있다.

현재, 드라마 속에서 동이의 신분은 '전직 궁녀'다. 죽었을지 모른다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므로, 그는 궁궐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전직 궁녀의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최 숙빈(숙빈 최씨, '동이'는 실명이 아님)은 드라마 속에서처럼 궐을 벗어난 적이 없다. 침방나인(바느질 궁녀)을 거쳐 인현왕후의 시녀가 된 최 숙빈은 왕후 폐위라는 거센 폭풍에도 궁에서 쫓겨나지 않고 침방나인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최 숙빈은 전직 궁녀의 생활을 해볼 여지가 전혀 없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실제의 최 숙빈이 전직 궁녀가 된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이 글에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전직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점이다.

전직 궁녀들의 삶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고찰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이성관계 혹은 성(性)문제에 국한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보기로 하자.

국왕 이외 남자와의 성관계는 '범죄'... 참형에 처한다

궁녀의 성관계를 참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한 <대전회통>. 조선 초기부터 궁녀의 ‘성범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현종 때부터 이에 대한 형벌이 참형으로 고정화되고 이런 규정이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성문화된 것이다.
 궁녀의 성관계를 참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한 <대전회통>. 조선 초기부터 궁녀의 ‘성범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현종 때부터 이에 대한 형벌이 참형으로 고정화되고 이런 규정이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성문화된 것이다.
ⓒ <대전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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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1698년 기간의 왕명을 수록한 법전인 <수교집록>, 영조 22년(1746)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 고종 2년(1865)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 등에서는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을 가한다"라고 규정했다.

위의 법규에서는 궁녀가 국왕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을 '성범죄'로 규정하고 그에 관련된 남녀 모두에게 참형을 가하도록 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란 것은 통상적 사형집행기간인 추분~춘분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형벌을 집행하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오늘날,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 정도의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히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듯이, 궁녀의 '성범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속히 절차를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궁녀의 성범죄가 중대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위와 같은 법령은 조선 초기 이래의 관습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궁녀의 성관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왕명이 국초부터 누적된 끝에 위와 같이 성문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궁녀의 섹스 스캔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현종 8년(1667)에 불거진 '귀열이 사건'이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1670~1718년)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일이다.

대비전의 시녀인 귀열이는 궁녀에게 가해진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에 불복종한 여인이다. 그는 그런 불복종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표출한 여인이다. 그는 형부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 형부 이흥윤은 서리 신분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의 '성범죄'가 발각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엄한 궁궐에서 이 같은 일을 자행하다니!'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분을 참지 못했다. 현종은 궁녀의 '성범죄'에 대해서만큼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형 정도에서 봐주자'는 형조(법무부)와 승정원(대통령비서실)의 주장을 뿌리치고 현종은 결국 귀열이에게 참수형을 가한 뒤에야 분을 풀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왕의 그늘에 있는 궁녀가 '외간남자'와 '재미'를 보는 것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던 조선 왕궁의 무시무시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이것은 궁녀의 '성범죄'에 대한 형벌이 참수형으로 고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귀열이만 참수형을 당하고 '정작 죽어야 할' 이흥윤은 목숨을 보전했다는 점이다. '나쁜 남자' 이흥윤이 아내와 처제를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귀열이의 부모는 '불고지죄'로 유배형을 당했다. 부모는 둘의 관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 전직 궁녀에게도 엄격한 규율 적용

그런데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은 현직 궁녀뿐만 아니라 전직 궁녀에게까지 부과되었다. 한번 왕의 그늘에 살았던 여자는 궐을 떠난 뒤에도 '외간남자'와 웃고 즐길 수 없다는 봉건적 권위주의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세종 때의 '이영림 사건'을 들 수 있다.

세종 21년(1439) 5월 15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영림이란 장교가 전직 궁녀와 성관계를 가진 사건이 발각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다. 사헌부(감사원 또는 검찰청)가 이영림을 참형에 처하자고 주장한 걸 보면, 그의 파트너인 전직 궁녀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중형이 적용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직 궁녀 역시 현직 궁녀 못지않은 속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여자 쪽만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세종실록>에서 이영림이 세종의 배려로 참형보다 2단계 낮은 형벌을 받았다고 한 데에 비해 전직 궁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궁녀는 관행대로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영림이 특별히 감형을 받은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직 궁녀들에 대한 성적 통제를 보다 더 확실히 하고자, 조선 정부에서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했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관료들의 처나 첩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성종16년(1485)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에 전직 궁녀·무수리를 처 혹은 첩으로 받아들이는 관료들에 대해 곤장 100대라는 중형을 가한다는 규정을 둔 것이다. 나아가 이듬해인 성종 17년에는 왕실이 함부로 다루기 힘든 왕족들에 대해서까지 동일한 제약을 가하는 데에 성공했다. 전직 궁녀들과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관료·왕족들의 발목을 제도적으로 묶어둔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드라마 속의 <동이>처럼 궐을 떠난 궁녀라고 해서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궐에서처럼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것 같은 인내심을 미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가혹한 속박이 궁녀들에 대해서만 적용된 게 아니었다. 정식 궁녀가 아닌 '비정규직 여직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속박이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숙종 27년(1701) 3월 27일자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인현왕후와 장 희빈이 모두 죽고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승자가 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이때 불거진 섹스 스캔들의 여자 주인공들은 방자(방아이·각심이) 신분을 갖고 있는 월금이, 영업이였다. 방자란 일종의 비정규직 여직원으로서 궁녀의 방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 궁녀보다 처지가 더 열악한 여인들이었다. 월금이, 영업이 역시 자신들에게 가해진 속박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했고, 그래서 조정이 또 한 번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월금이, 영업이가 성관계를 가진 상대방이 내시(환관)들이었다는 점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놓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을 느꼈을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여자 쪽에 대해서만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숙종이 내시들에게 사형 대신 유배형을 가했다는 기록을 볼 때, 월금이, 영업이는 감형을 받지 못한 채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북경 자금성의 높다란 담장. 궁녀들에게 가해진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은 이 담장보다도 훨씬 더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북경 자금성의 높다란 담장. 궁녀들에게 가해진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은 이 담장보다도 훨씬 더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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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경우에 남자들이 감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남녀 모두가 사형을 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남자가 고위층이거나 왕과 가까운 경우에는 남자 쪽이 특별히 감형을 받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궐을 떠난 궁녀뿐만 아니라 궁녀 아닌 여인에게까지 이성교제 금지의 족쇄가 채워진 것을 보면, 궁궐이란 곳이 여인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며 과감히 상소를 올린 관리가 하나 있었다. 현종 3년(1662) 4월 2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승지(대통령 비서) 김시진이 '전직 궁녀에게도 결혼의 기회를 허락함으로써 그들의 답답한 기운을 풀어주자'는 취지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상소는 가납되지 않았다.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고 <현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하기는 이 상소는 처음부터 가납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궁녀가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 수 있는 현종 임금에게 그런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김시진의 상소를 읽으면서 현종의 미간이 얼마나 많이 일그러졌을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태그:#동이,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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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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