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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사건 현장을 떠나 죽은 자의 주변부터 탐문했다. 평소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부지기수였지만 상처의 예리함이나 상흔의 깊이, 잔혹함으로 볼 때 범행은 사내의 손에서 이뤄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도 안면이 있는 사내, 자주 만나는 사내, 힘이 있고 칼 쓰는 법에 이골이 난 사내. 그런 사내를 찾아야 했다. 있었다. 수표교 뒷골목에서 힘깨나 쓰는 장정들을 데리고 투전판을 기웃거리거나 남의 빚돈을 대신 받아주는 일을 도맡아 했던 박종구(朴宗俱)란 자였다.

쭉 찢어진 눈에서 내뿜는 살기가 오싹 소름이 돋게 한다는 그의 주특기는 쌍검술이었다. 어쩌다 무녀 초복이와 인연을 가졌지만 죽일 만큼 자신에겐 원한이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괜한 수고 마시고 돌아가쇼. 나 그 여자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오. 무당 년이 어느 놈과 붙어 아이가 생겼는지, 요 앞 제중당(濟衆堂) 한약방에 자주 들린 답디다. 뱃속이 지저분한 까마귀 같은 년이라 내 신경을 안 썼수다."

말하는 도중에 턱밑에 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들어와 귓속말을 하고 나갔다. 박종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급한 일이 있어 나가보겠습니다. 언제든 시생이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한달음에 달려가겠습니다."

박종구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염낭이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안에서 빠져나온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러 정약용의 발치 어림에 머물렀다. 은반지였다. 반지 안쪽에 기록한 날짜가 얼핏 나타났다. 박종구는 상기된 낯으로 반지를 건네받자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으리, 무녀 초복이와 여주 최정랑 댁 따님 사건이 연관있는 게 아닐까요? 고독으로 오장이 녹아내려 목숨을 버리게 하는 일은 무녀만이 할 수 있는 무고(巫蠱)가 아닙니까. 이젠 그런 무당이 필요없게 됐으니 사람을 시켜 죽인 거구요."
"네 생각도 일리는 있다."

사헌부로 돌아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송화가 가져온 최정랑의 서찰을 읽어볼 생각도 않고 정약용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최정랑의 여식이 무고에 의해 목숨을 버리고 무녀 초복도 살해당했다. 이 두 사건을 잇는 끈은 뭔가?

연적의 투기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많았으나 초복이 궁 안을 출입했다는 정황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송화로 하여금 주변을 뒤지게 했고 박종구 주변을 관원과 파헤쳤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오후 늦게 관원이 돌아와 그런 보고부터 올렸다. 박종구의 첩 설연(雪蓮)이란 계집이 자주 마포를 다녀오는데 특별한 일이 있다기보다 소일 삼아 하루나 이틀에 한번 다녀온다는 것이다. 그곳은 세도가의 집이 아니라 산파 할멈의 집이었다.

귀가 약간 어두운 할멈을 찾아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한번 들르면 반나절은 허비하고 돌아왔는데 갈 때마다 듬직한 물건을 싸 가는 걸 잊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잖습니까. 왜 산파 할멈에게 공을 들이는 걸까요? 혹시 이숙원(李淑媛) 마마의 산후와 관계있는 걸까요?"
"이숙원 마마의 산후?"

"예에, 궁에 들어온 후 몇 해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회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워낙 학문을 가까이 하시는 전하시니 후사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겠어요."

'후사 문제라···.'

그럴법한 일이었다. 송화의 그 말이 왜 강하게 압박해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최정랑이 보낸 서찰을 생각하고 그것부터 개봉했다. 간단한 안부였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정약용이 돌아가고 난 뒤 떠올랐다는 것이다. 반지(環)였다. 딸아이가 왼손에 끼었던 것으로 반지에는 '陰 十二月 五日'이라 써있었다고 서찰의 말미에 적어놓았다.

"반지라···, 후궁으로 들어와 주상 전하와 잠자리를 하면 보통 반지를 내린다. 날마다 잠자릴 하는 경우면 그럴 필요 없겠지만 가끔 일을 치르면 은반지를 후궁에게 내린다. 후궁의 뱃속에 자라는 씨가 주상 전하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했다. 아들을 낳으면 오른손에 금반지를 끼우는 데 그건 나중 일이고···."

정약용은 다시 최정랑의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하단에 쓰인 '陰 十二月 五日'이란 문구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만약 작년에 이 반지를 받았다면 출생일은 음력 시월일 것이다. 지금은 음력으로 시월이다. 만약 반지의 주인공이 주상 전하의 은총을 받아 아이를 회임했다면 이 달이 산후 달이다. 문득 스쳐가는 게 있었다.

박종구가 서랍에서 꺼낸 염낭에서 굴러 떨어진 은반지.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반지 안쪽의 글귀는 분명 '陰 十二···'였다. 거기까지 쓰인 것만으로도 정약용의 뇌리는 예리한 바늘 끝으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내 급히 이판 대감을 만나 보마!"
정약용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겨울 문턱이지만 안개 기운은 도성 안에 깔려 있었다. 궁 안으로 들어오는 선화문(宣化門) 앞엔 장사꾼 차림의 사내 서넛과 기생 차림의 아낙이 광주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들어서는 참이었다. 수문(守門)하는 장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안에든 건 뭐요?"
"떡입니다."
"떡?"

그때 선화문 안에서 무수리 하나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반색하며 광주리를 가져온 아낙에게 말했다.

"이제야 오면 어떡하우? 이숙원 마마께서 그토록 드시고 싶어 하시는데, 자, 어서 들어와요."

아낙이 다시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수리의 품에서 노리개 등속 한 움큼이 수문하던 장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예전 같으면 두 말 없이 받아 챙겼을 터인데 장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아낙을 가리켰다.

"그 광주리 내려놓으시오."
"예에?"
"내 말이 안 들리는가? 어서 광주릴 내려놓으래도!"

엉겁결에 광주리를 내려놓자 이번에는 뚜껑을 벗겼다. 곱게 싼듯 붉은 비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만지려 하자 무수리가 질겁했다.

"무엄하다! 어디서 함부로 손대는가! 이것은 이숙원 마마께서드실 떡이다. 한갓 궁문을 지키는 천한 놈이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게 말이 되느냐! 어서 비켜서라!"

무수리와는 달리 시골 아낙 차림의 여자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바로 그 순간, 선화문지기 사내는 칼을 뽑아 어깨위로 치켜들었다.

"아니! 저,저!"
수직으로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 광주리를 내려치자 퍽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아침 안개를 흔들었다. 다시 한 번 장졸의 칼이 광주리를 내려치자 네 조각이 났다. 숙원 이씨를 모신다는 무수리는 넘어지고 곤두박질치며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시골 아낙도 한쪽 신발이 벗겨진 걸 모르고 궁장(宮墻)을 끼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장졸이 흥건히 젖은 붉은 비단을 젖히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게···, 뭐···야? 갓 빠진 핏덩이다!"

영아에게 무참히 칼을 댄 장졸 역시 얼이 빠진 듯한 눈빛으로 광주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귀엔 이판 대감의 호통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비켜서라!"

무조건 함지박이나 광주리를 들고 오는 자가 있으면  불문곡직 그것을 네 토막 내라는 명을 시달 받았었다. 저녁이나 아침일 것이라는 귀띔도 있었다. 영아를 토막 낸 장졸은 사헌부로 끌려가 다음날 방면되었다. 이내 사건이 한눈에 드러났다.

<···숙원 이씨는 평소 주상 전하의 총애를 받은 최비(崔妃)를 투기해 무녀 초복으로 하여금 고독(蠱毒)으로 살해했으며, 장안의 부랑배 박가를 끌어들여 초복을 살해하고, 이미 최비에게 빼앗은 은반지에 쓰인 날짜를 참조해 산파로 하여금 아이를 구해와 궁으로 데려 올 생각을 하였다···>

경위서가 올라가고 묻혔던 일들이 드러나자 궁 안은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어갔다. 내금위 별감이 이숙원 처소에 갔을 때, 이미 그녀는 독약을 마시고 절명한 뒤였다.

무당의 저주로 정신이 혼미해 궁원을 벌거벗은 채 돌아다녔던 최비는 다시 신원되었다. 형조정랑 최경식에게 복직하라는 명이 떨어졌으나 그는 병을 핑계해 벼슬자릴 사임했다. 이날 정약용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일이든 보약이든 약간 부족한 듯 마시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없으니 화를 부르는 게야!"

안개가 걷히고 촉촉이 내리던 빗발은 점점이 진눈깨비를 뿌리더니 점차 함박눈으로 변해 겨울이 깊어져 감을 그려내고 있었다.

[주]
∎고독(蠱毒) ; 무당이 사술로 부리는 저주


태그:#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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