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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채에 봄이 찾아왔다. 토굴을 파고들던 추위도 물러가고 이름 없는 풀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아스라이 보이는 강경강의 은빛 강물이 햇빛에 반짝이고 회색 계룡산도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머지않아 부처님오신 날이다. 산채꾼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총석사 보살들이 우물가에 모였다.

바위에 새겨진 총석사 글씨
▲ 총석사 바위에 새겨진 총석사 글씨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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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한 날 풀만 주냐고 아우성인데 어떡하면 좋으우?"

취나물과 머위를 씻던 아낙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절집에서 고기를 내줄 수야 없지 않소."
"초파일 하루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춘정(春情)이 넘치는 사내들에게 고기를 먹여 어떻게 감당하려고."
"장정들이 겨우내 시래기 국만 먹고 지냈으니 속에 풀 날만해요."
"그렇다면 평생을 절밥만 먹고 살아온 스님 속은 가시덤불이겠네."
"그야 스님들은 가끔 마을에 내려가 군것질도 하고 곡주도 한 잔씩 하고 돌아오잖아요."
"맞아요, 맞아. 내려가면 부드러운 속살도 만져보고 온다던데요. 흐흐흐."
"속살까지요?"
"그렇데요. 마을에 내려가면 옷고름을 스스로 푸는 아낙들이 있대요."
"설마 그럴 리야 있겠수?"

이때였다. 우물가 버드나무에 앉아있던 박새가 요란하게 울었다.

봄을 시새움하는 여인들의 수다

"저 새는 오늘따라 극성스럽게 울어?"
"우는 게 아니라 짝을 찾는거라우."
"짝이요?"
"목덜미가 유난히 푸른빛이 감도는 저놈 좀 봐요. 저 녀석이 수놈인데 곱게 몸단장하고 목청을 높이며 암컷을 꾀고 있는 중이라우."
"옳은 말이야. 춘삼월 호시절에 얼른얼른 거시기해서 머시기 낳으려고 그라겠져."
"그렇게 말하는 언냐의 머리에 꽂은 꽃은 무슨 꽃이우?"

그녀의 머리위에 노란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이거요? 시들어가기에 아까워서…."

말꼬리를 흐리던 여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얼래리 랄라."
"하하하"
"호호호"

여인들의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것은 봄을 시새움하는 아낙들의 웃음꽃이었다.

"그렇구 보면 산채에 있는 남정네들이 불쌍 혀. 두고 온 기집이 얼마나 보고 싶을꼬?"
"그러게요. 혈기 넘치는 남정네들이 분출하는 정기를 주체할 수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무슨 일 있었어요?"
"남정네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요. 금방 폭발할 것 같아요."
"일영오배도 안 한대요."
"참말이요?"
"그렇다니까요. 요새는 산채꾼들이 해맞이 절도 안 한대요."

계룡산에 걸쳐있던 태양이 환한 얼굴을 내밀었다. 새 아침이다. 토굴에서 나와 기지개를 켜던 장정들이 대석(臺石) 주변에 모여들었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산채꾼들

"화승총은 몇 정이나 만들어졌는가?"

권대식의 시선이 대장장이에게 멈췄다.

"그믐날까지 서른 정이 목표인데 넉 정이 부족합니다."
"스물여섯 정은 만들었다는 애기냐?"
"네, 대장님."
"칼과 창은 몇 자루나 만들었느냐?"
"창 일백이십 자루,  칼 삼백 자루. 목표량을 이미 만들고 추기로 더 만들고 있습니다."
"알겠다. 두령은 손이 떨리지 않은 자들을 골라 화승총 쏘는 법을 익히도록 하라."

좌우를 휘둘러보던 권대식의 눈동자가 유탁에게서 멈췄다.

"염초는 진즉 들어왔습니다만 소리 때문에 아직 훈련을 못하고 있습니다."

화승총을 방사하면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곧 관가에 알려질 것이고 산채의 안위가 위태롭다.

"북문 쪽에 있는 동굴 입구에 덮개를 씌우고 연습하라."
"네, 알겠습니다. 건 그렇고 한양에 올라간 꺽쇠소식을 몰라 답답합니다."
"나 역시 그렇다. 궁궐에 들어가 조소용의 처소를 염탐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거사를 했다는 소식은 나도 못 들었다. 경비가 삼엄한 대궐에 들어가 일을 벌이기란 그렇게 녹녹하지 않을 것이다. 잘하고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자."

"세자빈 마마를 사사하기로 했다는데 그것이 참입니까?"

안익신이 나섰다.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산채에 머물러 있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현세자를 죽인 도당들이 세자빈의 오빠와 동생 강씨 4형제를 죽이고 이제 세자빈을 죽이려 하니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원손을 죽일 것입니다. 한양으로 쳐들어갑시다. 올라가서 임금과 조소용을 요절내버립시다."

"우리가 쳐들어가도 세자빈은 죽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지험이 말문을 열었다.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권대식이 눈을 크게 뜨고 이지험을 노려보았다.

호랑이의 대적자는 용이지만 물이 없어 안타깝다

"여기 우리 산채에 수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만 각기 다른 기(氣)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를 자신도 모르게 뿜어내고 역시 자신도 모르게 동지의 기를 받는 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고 합니다. 나의 기가 강하면 상대의 기를 밀어내고 상대의 기가 강하면 내 기가 위축됩니다. 이는 바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대했던 구름이 산산 조각나는가 하면 조그맣던 구름이 큰 구름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다 같습니다. 궁궐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대궐에는 임금님이 있습니다. 우리 전하가 95년 을미(乙未)생 양 띠입니다. 세자빈이 11년 신해(辛亥)생 돼지띠입니다. 조소용이 14년생 갑인(甲寅)생 호랑이띠입니다. 호랑이에게 양과 돼지는 대적할 수 없습니다. 밥입니다. 결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산실청에서 승하하신 인렬왕후가 94년 갑오(甲午)생 말띠입니다. 심양에서 돌아오신지 2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하신 소현세자가 12년 임자(壬子)생이고 현재 왕비는 24년 갑자(甲子)생입니다. 말은 호랑이의 밥이 되어 먼저 가셨고 쥐 역시 기에 눌려 세상을 떴거나 경덕궁으로 쫓겨났습니다."

웅성거리던 산채가 조용해졌다.

"궁궐에서 조소용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경진(庚辰)생 석린 뿐입니다. 허나, 물을 만나지 못한 용은 이무기가 되어 단명하고 맙니다. 병자(丙子)생 원손 역시 그렇습니다.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갑신(甲申)생 석견 뿐입니다. 양(羊)위에 올라 탄 원숭이를 호랑이가 잡아먹고 싶으나 양이 다칠까봐 식(食)하지 못합니다. 양은 조소용의 영원한 식량창고이며 비빌 언덕입니다. 양은 을미(乙未)생 임금입니다."

기가 막힌 해석이다.

"닥쳐라. 어디에서 흘러 다니던 요망한 소리냐? 저놈을 토굴에 가두어라."

건장한 사내들이 일어나 이지험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권대식 역시 가슴이 뜨끔했다.

"조소용이 그렇게 강자일까?"

자신의 생년을 견주어 보았다. 계축(癸丑)생 소띠였다.

"그렇다면 소는 호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식감이 아닌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유탁이 소리쳤다.

"지체하지 말고 한양으로 쳐들어갑시다."
"아직 장군님이 안 오시지 않았느냐."
"장군께서 중국을 떠났다는 게 언제입니까? 압록강을 건넜다는 게 언제냐 말입니다. 대동강이 풀려서 강이라도 건너오지 못했다 말입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장군님이 당당하게 위엄을 갖추고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잡혀오고 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경거망동한 자는 우리 산채의 안위를 해치는 악질 반동이다. 그런 자는 단호하게 징치할 것이다. 누구냐? 그 따위 헛소리를 하는 자가?"

큰 소리를 쳤지만 가슴이 찔렸다. 동지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장군이 개선장군이 아니라 죄인 신분이 되어 압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인할 수도 공개할 수도 없었다. 장군의 왕림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산채꾼들에게 장군의 존재가치는 가히 하늘과 같았기 때문이다.


태그:#인조, #소현세자, #강빈, #왕후, #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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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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