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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이>에서 장옥정(장희빈) 역을 맡은 배우 이소연.
 드라마 <동이>에서 장옥정(장희빈) 역을 맡은 배우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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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 제16부에서, 장금이를 사랑한 한성부 판관 민정호를 꼭 '빼닮은' 로맨틱한 군주 숙종(지진희 분)은 장옥정(장 희빈, 이소연 분)을 위한 '깜짝 이벤트' 현장에서 자신의 연인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책봉하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역관과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장옥정. 지배층의 관점에서 보면 미천하기 그지없는 신분의 소유자인 장옥정. 그런 장옥정이 임금의 후궁이 된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승리'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후 수백 년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장 희빈 신화'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동이> 제16부 말미에서, 장옥정은 감격을 감추지 못한 채 눈시울이 붉어졌다.

장 희빈 신화를 낳은 요인에는 ▲ 조선 후기 서민의 사회적 성장 ▲ 장옥정 개인의 자질과 노력 ▲ 장옥정 가문의 경제력 ▲ 남인 당파의 정치적 후원 ▲ 숙종의 파격적 배려 등이 있다. 그런데 이외에도, 장 희빈의 출세를 도운 요인 중에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 베푼 기여가 있다. 나중에 장옥정에 의해 밀려나게 될 인현왕후 민씨(1667~1701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숙종시대 여인천하는, 인현왕후가 장옥정의 길을 열어주었다가 장옥정에게 크게 당하고 이렇게 해서 장옥정이 승리하는가 싶더니 최 숙빈(숙빈 최씨)이라는 의외의 여인이 돌출해서 여인천하를 깨끗이 정리하고 영조라는 걸출한 임금을 배출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이 같은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초기 단계에서 장옥정이 스타덤에 오르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인현왕후였다.

인현왕후는 왜 장옥정 구명운동을 했을까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증언하는 사료로서 숙종 12년 12월 10일자(음력), 즉 서기 1687년 1월 23일자 <숙종실록>을 들 수 있다. 참고로, 오늘날 발행된 많은 문헌에서는 '숙종 12년(1686)'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숙종 12년 11월 18일(음력)부터는 서기 1687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그렇게 표기할 수 없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장옥정이 숙종의 승은을 처음 입은 때는 숙종의 첫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사망한 이후였다. 인경왕후는 음력으로 숙종 6년(1680) 10월 26일에 사망했다. 남인의 후원을 받는 장옥정이 이 틈을 타서 숙종의 품을 차지하자, 숙종의 어머니이자 서인 출신인 명성대비(명성왕후, 1642~1683년)는 그 꼴을 볼 수 없어 장옥정을 궐에서 내쫓았다.

이런 상태에서 숙종 7년(1681)에 후임 중전이 된 여인이 바로 열다섯 살짜리 인현왕후였다. 그런데 이 어린 중전은 라이벌 장옥정과 관련하여 공연한 호기를 부렸다. 시어머니인 명성대비를 찾아가 "장옥정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두 여인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인현왕후 : "(임금의) 은혜를 입은 궁인이 오래도록 민간에 나가 있게 되면, 상황이 심히 불안해집니다. 마땅히 다시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명성대비 : "내전(內殿, '중전'의 의미)께서 아직 그 애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 애는 매우 간사하고 악독해요. 주상은 평소에도 기쁨과 분노를 잘 참지 못하잖아요. (주상의 성품이 그와 같은 상태에서) 만약 꾐을 받게 되면 이는 곧 나라의 재앙이니, 말로 다 할 수 없을 겁니다. 내전께서는 앞으로도 내 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인현왕후 : "어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시어, 나라의 상황을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명성왕후 : "……"

어린 며느리의 말이 '같잖게' 들렸는지, 명성대비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의 건의는 당연히 '기각'되었다.

'장옥정 포용'은 인현왕후의 '본심'이 아니었다

드라마 <동이>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배우 박하선.
 드라마 <동이>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배우 박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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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가 '장옥정 구명운동'을 재개한 것은 명성대비가 죽은 숙종 9년 12월 5일 즉 서기 1684년 1월 21일 이후였다. 위의 <숙종실록>에 따르면, 명성대비가 죽은 뒤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옥정을 다시 불러들이자고 제안했다. 여기에다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숙종의 증조모)까지 장옥정 구명운동을 거듦에 따라 장옥정은 다시 궁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숙종과 장옥정을 붙여주고 싶어 하는 인현왕후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위의 <숙종실록>에 따르면, 하루는 장옥정이 숙종의 '희롱'을 받아주지 않고 중궁전 앞에까지 도망을 오자 "너는 마땅히 전교(왕명)를 받들어야 하거늘,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느냐?"며 장옥정을 정중히 꾸짖었다고 한다. 참으로 바다처럼 넓고 넓은 '대범함'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실록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궐에서 내쫓긴 장옥정을 위해 끊임없이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그가 다시 숙종의 사랑을 받고 후궁의 자리에까지 다가갈 수 있도록 기여한 '일등공신' 중 하나는 '뜻밖에도' 인현왕후 민씨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인현왕후의 태도는 그리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가부장적인 분위기일지라도, 다른 여자가 자기 남편과 잘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여자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 남편이 너무 너무 싫어서 그랬다면 모르겠지만, 인현왕후의 태도는 인간의 상식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현왕후의 태도에 진정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은 그 후의 사실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자기 덕분에 궐에 돌아온 장옥정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그의 종아리를 때리도록 한 사실이나, 장옥정을 통제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자 다른 여인을 불러들여 그를 견제하기 위해 숙종에게 후궁 선발을 권유한 사실 등을 보면, 인현왕후가 처음부터 장옥정을 진심으로 포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장옥정을 '힘껏' 도와줬다, '힘껏' 얻어맞은 인현왕후

원수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을 정도의 넓디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원수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고 얄밉게 군다 하여 원수의 종아리를 때리도록 하거나 원수를 견제할 대항마를 불러들이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자신에게 백해무익할 뿐인 장옥정의 복귀를 위한 인현왕후의 구명운동은 장옥정에 대한 경쟁심을 숨기고 자신의 아량을 과시하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관과 여종 사이에서 출생한 장옥정이 숙종의 사랑을 얻고 후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결정적 기여를 한 요인 중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아이러니하게도 인현왕후의 불필요한 '호기'였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출세를 '힘껏' 도와주었다가 나중에는 장희빈으로부터 '힘껏' 얻어맞은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최 숙빈을 후원한 장옥정이 결국 최 숙빈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장옥정을 후원한 인현왕후가 결국 장옥정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인현왕후가 장옥정 구명운동을 벌인 때로부터 장옥정에 밀려 폐서인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최 숙빈은 아직 일개 궁녀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보다 지위가 훨씬 높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 여인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관찰하고 있었을 궁녀 최씨는 마음속으로 혹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중전마마, 사랑 앞에서 솔직해지세요!'
'질투의 감정을 부끄러워마세요!!'
'용기 있는 여인이 왕을 얻는 법이랍니다!!!'


태그:#동이, #인현왕후, #장희빈, #명성대비,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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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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