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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독자들의 많은 관심 속에 '프랑스는 어떻게 저출산을 극복했는가'를 27회에 걸쳐 심층보도한 데 이어 '스위스의 지방자치와 직접민주주의, 나의 한 표는 알프스보다 아름답다'를 현지에서 연재한다. [편집자말]
글 : 박정호·앤드류 그루엔 기자
사진 : 남소연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스위스편> 특별취재팀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전용 야외 공연장 입구. 노란 들꽃과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적한 곳이지만, 공연장 안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전용 야외 공연장 입구. 노란 들꽃과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적한 곳이지만, 공연장 안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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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봄을 맞은 스위스 베른 주의 작은 마을 인터라켄(Interlaken)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은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쉴새 없이 기념품 가게를 들락거렸다. '자전거 빌려 드립니다' '스위스 퐁듀 있습니다'라는 한국어 광고판과 컵라면 같은 한국 인스턴트 식품도 눈에 들어왔다.

동서로는 브리엔츠 호수와 툰 호수, 남북으로는 알프스 산맥에 안긴 인터라켄에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알프스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산악 철도가 인터라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인터라켄을 찾는 이유가 융프라우 때문만은 아니다. 매해 여름마다 인터라켄에서는 아주 특별한 연극이 공연된다. 이 연극은 출연배우가 2백여 명인데 그들이 모두 인터라켄이나 그 주변의 동네 사람들이다. 경력은 필요없다. 인터라켄과 베른 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연극의 배우로 참여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은 배우다!

그런데 이렇게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연극이 무려 98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다. 관람객은 매년 약 3만명인데 그들의 반이 인터라켄과 베른 주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들이다. 마을주민들이 만들어낸 이 특별한 연극이 인터라켄의 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된 것이다. 

2백여 명의 출연배우가 모두 마을주민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공연장을 찾은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자전거로 공연장 앞에 막 도착한 프란카 바소리 감독을 만나 인사하고 있다.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공연장을 찾은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자전거로 공연장 앞에 막 도착한 프란카 바소리 감독을 만나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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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공연하는 연극은 '빌헬름 텔'(Tell-Freilichtspiele)이다. 배경은 14세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스위스. 연극은 빌헬름 텔이 폭정을 펼치던 오스트리아 총독 게슬러에 저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텔이 자신의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활로 쏘아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 등을 담은 이 연극은 우리에게는 영어식 이름 '윌리엄 텔'로 익숙하게 알려져왔다.

권력에 저항하는 영웅담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연극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연극 속의  영웅보다 그 연극을 만들어가는 평범한 시민들의 힘이다. 이 주민참여 연극은 지난 1912년 한 고등학교 교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그때도 무대는 지금 야외극장이 마련된 곳과 똑같은 한적한 숲속. 이 교사는 그곳에서 자기 학교의 평범한 학생들과 함께 빌헬름 텔을 공연했다. 지금 인터라켄에는 이 교사를 기리는 표식이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인터라켄 주민들은 98년 동안 '모든 시민은 배우'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들이 배우가 되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 배우가 된 시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때마침 6월부터 시작되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한다는 소리에 공연장을 찾아가봤다.

인터라켄역에서 차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벨헬름 텔 전용 야외 공연장. 노란 들꽃과 아담한 집만 보이는 한적한 곳이었지만, 공연장 안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2천석 규모의 무대에는 놀랍게도 14세기 당시 집과 가구 그리고 성채까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매년 약 2백명의 배우가 20마리의 말과 15마리의 소와 함께 빌헬름 텔을 공연한다.

4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찾은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전용 야외 공연장에선 6월부터 시작되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2천석 규모의 무대에서 14세기 당시 집과 가구 그리고 성채까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는 세트를 볼 수 있다.
 4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찾은 스위스 인터라켄의 주민연극 '빌헬름 텔' 전용 야외 공연장에선 6월부터 시작되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2천석 규모의 무대에서 14세기 당시 집과 가구 그리고 성채까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는 세트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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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시간이 다가오자 감독과 배우들이 하나 둘씩 공연장으로 들어왔다. 배우 겸 조연출인 산드라 슈미츠(35)는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슈미츠는 빌헬름 텔 공연을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연극"이라고 강조했다.

"빌헬름 텔은 다음 해에는 관객이었던 시민이 배우가 될 수도 있는 연극입니다. 전문적인 연극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주민들이 참여하는 이 공연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슈미츠는 배우들의 대기실과 무대 구석 구석을 안내하며 "연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지역 이웃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4일 스위스 베른 주에 있는 소도시 인터라켄에서 시민참여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 '빌헬름 텔'의 부인 역할을 맡게 된 24세의 여성 마리아 테레시아를 만나 "모든 시민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인터라켄 시민공연팀의 철학을 듣고 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4일 스위스 베른 주에 있는 소도시 인터라켄에서 시민참여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 '빌헬름 텔'의 부인 역할을 맡게 된 24세의 여성 마리아 테레시아를 만나 "모든 시민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인터라켄 시민공연팀의 철학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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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시아(24)는 올해 처음으로 배역을 맡았다. 그것도 꽤 비중이 있는 주인공 빌헬름 텔의 부인 역. 연극을 배운 적이 전혀 없는 테레시아의 인생에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간호사인 그는 작년부터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 연극팀의 운영를 도와주는 보조사무원으로 자원봉사했다. 그러다가 올해는 직접 큰 배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지만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빌헬름 텔 부인 역을 했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주민들을 상대로 자원을 받았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6명이 지원했어요. 발성테스트, 연기 테스트 등을 거쳐 제가 운 좋게도 뽑혔어요. 저처럼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도 여기에서는 이렇게 배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9살 어린이부터 80살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연극에서 어떻게 조화를 만들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9살 어린이부터 80살 할아버지까지 배우로 참여

스위스와 독일에서 연출 경력이 있는 프란카 바소리 감독
 스위스와 독일에서 연출 경력이 있는 프란카 바소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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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극 '빌헬름 텔'이 100% 일반 시민들의 힘으로 무대에 올려지는 것은 아니다. 연출과 음향 효과 등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은 '프로'들이 도와주기도 한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환상적인 결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연출 경력이 있는 프란카 바소리 감독은 "공연을 할 때는 모두가 배운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소리 감독은 단지 연기만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교육학에 대해 토론하는 등 부족한 것을 서로 채워주고 공부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다고 했다. 또한 베른 주 지역 라디오 방송의 한 직원은 기차로 1시간을 달려와 조명과 음향을 조작해주기도 한다.

이제 리허설에 들어갈 시간. 바소리 감독을 중심으로 대여섯명의 배우들이 둥글게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바로 리허설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우리와 대화하며 수줍게 웃던 시민들은 어느새 배우가 되어 숲속의 무대를 가로지르며 진지한 연기를 보여줬다. 마치 '모든 시민은 배우다'라는 슬로건을 증명하듯이.

이내 빗줄기가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리허설은 멈출 줄 몰랐다. 배우들의 대사는 마이크로폰을 통해 숲속 공연장으로 울러퍼졌다.

그 연습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지난 2일 경험한 글라루스 주민총회 란츠게마인데가 떠올랐다. 주민들이 안건을 제안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주민총회장과 주민들이 배우가 되는 연극 무대는 닮았다. 글라루스에서는 '모든 시민이 의원'이었는데 인터라켄에서는 '모든 시민은 배우'였다. 직접민주주의의 나라 스위스에서는 정치는 물론 연극같은 문화에서도 직접민주주의 문화가 배어 있었다.

스위스 인터라켄의 관광 안내소에서 만난 연극 '빌헬름 텔'의 비즈니스 매니저 마셀 퓨러는 "많은 주민들이 연극에 2,30년 동안 참여해 오고 있다"며 "자발적 참여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의 관광 안내소에서 만난 연극 '빌헬름 텔'의 비즈니스 매니저 마셀 퓨러는 "많은 주민들이 연극에 2,30년 동안 참여해 오고 있다"며 "자발적 참여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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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빌헬름 텔'의 비즈니스 매니저 마셀 퓨러는 "자발적 참여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올 여름에 22일간 공연하기 위해 우리는 작년 11월부터 준비했습니다. 연습일수는 50일입니다. 다들 직장다니니까 저녁에만 합니다. 출연료는 연습 때 하루 5프랑(5천 원), 실제공연때 하루 20프랑(2만 원)입니다. 그 적은 돈을 받고도 주민들은 기꺼어 자기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는 연극이 동네 주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공연하고, 함께 관람도 하고, 우리는 하나의 큰 가족인 셈입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스위스편' 특별취재팀 : 오연호 대표기자(팀장), 안성호(편집자문위원, 대전대 교수), 윤석준(기획위원), 남소연 기자(사진), 박정호 기자(동영상), 앤드류 그루엔(Andrew Gruen, 영문판)


태그:#유러피언드림, #스위스, #인터라켄, #주민연극, #빌헬름 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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