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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여선생 한장면
 검사와 여선생 한장면
ⓒ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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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리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저렇게 어머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한번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병든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어린 장선이는 점심시간이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부모님이 싸준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을 부럽게 훔쳐본다.

이런 장선이를 본 담임 선생님은 자기의 도시락을 준다. 하루 이틀도 아닌 오랫동안. 장선이는 병든 할머니의 약값을 벌고자 학교가 끝난 후 빵을 받아 팔기도 한다. 여선생은 외톨이로 이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장선이를 늘 격려하고 힘이 되어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은 학교를 떠난다. 그동안 푼푼이 모은 목돈 통장과 도장을 장선이에게 쥐어준 채.

선생님이 떠난 후 설상가상으로 할머니마저 돌아가신다. 이제 전혀 의지할 사람이 없는 장선이는 고향을 떠나 책도 팔고 가정교사도 하는 등 힘든 고학 끝에 검사가 된다. 그렇게 세월은 10년이나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여선생과 장선(민검사)은 남편을 살해한 살인범과 검사로 법정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검사와 여선생> 대략의 줄거리다. 변사가 화면을 보고 설명하는, 1940년대 무성영화다. 1948년에 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지난 28일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았다. 말로만 듣던 무성영화를 직접 볼 수 있고, 우리나라 마지막 변사라는 신출(82·본명 신병균) 선생의 전설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잔뜩 품고.

우리나라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을 만나다

우리 시대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님이 <검사와 여선생> 16mm필름이 걸린 영사기 앞에서 변사로서의 삶과 영사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 시대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님이 <검사와 여선생> 16mm필름이 걸린 영사기 앞에서 변사로서의 삶과 영사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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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동안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무성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었다. 1930~1950년대가 배경인 드라마에서 간혹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언니 손을 잡고 읍내로 가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간신히 봤던 약장사 연극 몇 장면들이 꿈결처럼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는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싶었다.

찾아뵙고 싶다고 전날 전화로 미리 약속했던지라 연극 1시간 30분여를 앞둔 시각에 영화를 상영할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에 도착했다. 선생은 이미 영사기사와 함께 영사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잠시 <검사와 여선생> 첫 장면이 나와 가슴이 설렜다. 인사를 드리고 취지를 말씀드리자 "기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며 묻고 싶은 것을 물으란다.

하지만 '지장이 있을까봐 변사를 앞두고 식사는 물론 그 어떤 것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이미 박물관 측 담당자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간단한 대화라도 지장이 될까 싶어 영화 상영 후로 미뤘다. 그럼에도 결국 로비에서 선생과 간단한 이야길 나누게 되었다.


"배가 부르면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기 때문에 점심을 먹지 않아. 하루에 몇 번씩이나 했냐고? 옛날에는 하루에 5번은 보통으로 했는데 그때도 절대 배부르게는 먹지 않았어. 옛날에는 지금처럼 자동차가 있었나. 주로 기차를 타고 움직였지. 며칠은 수원에서, 그리고 그다음 며칠은 조치원에서. 이렇게 기차 따라 내려가면서 공연을 하다 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배부르게 먹으면 지장이 많으니 늘 신경 쓰곤 했지."


선생께 물었다. "선생님이 우리나라 마지막 변사로 알고 있는데 후진 양성은 왜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한 시절을 대표하는, 우리 영화사의 귀중한 한부분인데 누군가는 그 뒤를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쉽지 않은가?"라고.

"한때 후진 양성을 생각해본 적도 있는데, 돈벌이도 안 되는데 누가 배울라고 하나. 달나라 가는 세상인데 말이야. 그걸 야속해하면 안 되지. 물론 아무도 이어갈 사람이 없어서 아쉬움도 있지만 할 수 없지 않겠어요."

남몰래 변사를 연습하던 소년에게 온 기회

영화상영 변사를 하고 있는 모습
 영화상영 변사를 하고 있는 모습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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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선생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귀가 약간 들리시지 않는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6·25 때 포탄을 맞고 난 후 그렇단다. 때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령이신 분이 어떻게 1시간 동안이나 변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하여 어서 이야기를 끝내자 싶어 "오랜만에 하시는데 어떠세요? 친정 아버지도 올해 팔순이신데 가까이 계시면 함께 볼 수 있을 텐데 전라도에 계셔서 아쉬워요"라며 애초의 약속대로 영화 상영 후 뵙겠다고 하니 덧붙이신다.

"아니 얼마 전에도 몇 번 했어요. 역사박물관에서도 했고 강북구에서도 했고, 무슨 도서관인데?(응암 정보도서관)에서도 했는데…, 어른들이 많이 와서 보고 옛날을 떠올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요즘 청소년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많이 보고 옛날 어른들은 이렇게 살았구나. 참 배고프고 힘들게 살았구나를 알 수 있으면 좋겠어!"

빗속에 영화를 보러 오는 어른신들
 빗속에 영화를 보러 오는 어른신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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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을 40여 분 앞두고 비가 내리는 국립민속박물관 뜰에 섰다. 빗속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한 무리의 어른들이 우산을 접어 비닐봉지에 넣고 영화가 상영될 강당 속으로 사라졌다. 신 선생은 영화 상영을 20여 분쯤 앞두고 몰려든 취재진들에게, 자신이 소장한 16mm 필름이 걸린 영사기 앞에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줬다.

계모가 배다른 동생에게만 쌀밥을 주자 동생의 밥을 뺏어먹다 몰매를 맞은 소년은 집을 뛰쳐나와 방황한다. 그러던 중 평양 선교리 극장에서 먹고 자며 청소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극장의 잘나가던 변사 김선동이 밤새 기생을 끼고 술을 먹다 영화상영 시간 직전에까지 나타나지 않는 사건이 터진다. 이때 소년에게 "한 번 해보겠느냐?"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변사를 꿈꾸며 남몰래 연습을 해왔던 소년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이렇게 그의 변사 생활은 시작됐다. 극장 밥을 먹은 지 2년, 14살 때란다. 처음으로 한 작품은 <장화홍련전>, 이후 소년은 김선동을 따라다니며 변사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해방 후 두 형과 함께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며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관객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된다.

장충동에 땅도 사고 포천에서 극장도 운영하고 합동영화주식회사라는 회사도 꾸릴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단다. 하지만 이런 영화도 잠시, 운영하던 포천의 극장에 화재가 났는데 다른 집까지 태우는 바람에 필름들은 물론 전 재산을 날리고 셋방살이를 전전하게 된다. 형제는 좌절하지 않고 천막극장을 빌려 재기를 모색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전장으로 간다.

여선생과 제자, 그들은 왜 법정서 만났을까

▲ <검사와 여선생> 일부 영화가 제작된 1948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는 <검사와 여선생>, 우리의 마지막 변사 신출씨가 변사를 맡았다.
ⓒ 김현자(영화상영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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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영화 상영 시간, 무대로 올라간 그의 인사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아까 로비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팔순 고령의 나이로 어떻게 1시간이나 변사를?'이라 염려했던 내 마음이 뻘쭘해지고 말았다. 정말 팔순이 맞나? 싶을 만큼 쩌렁쩌렁, 절절한 목소리가 날 영화 속으로 푹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월이 흘러간다. 말없이 가는 세월이었건만 이러한 고학을 하면서 세월은 흘러…꽃피고 새 우는 봄철이 지나가니, 만산 유혹은 여름을 꿈에 쥐고 주야장창으로 있으니, 산에서 들려오니 제비는 강남을 찾아가고, 낙엽은 부끄러운 듯이 인간 발밑에 밟히고, 마른 나무 가지에 낮에도 물결치며 찬바람 부는 북풍 엄동설한이 매뻔이고, 매뻔이고 흘러갔던 것. 흘러가는 세월은 잡을 수가 없으며 어영간 세월은 유수와 같이 십년이라는 흘러간 세월이었다. 국민 학교를 사직하고 고향으로가 박상태라는 남편을 맞이하여…"
- 변사 중 채록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여선생, 하필 남편의 한 달 일정 출장을 앞두고 살인범이 탈옥을 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탈옥수는 여선생의 집에 찾아들고 "딸이 보고 싶어 탈옥을 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딸을 볼 수 있다면 자수하겠다"고 통사정을 한다. 그리하여 여선생은 딸을 만나게 해준다. 자수를 한 탈옥수. 여선생은 아빠를 걱정하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 수 있도록 매일 사식을 들고 탈옥수에게 면회를 간다.

남의 말 좋아하는 동네사람들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여선생의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은 살인범과의 치정을 의심한다. 그러다가 아내를 위협하려고 식칼을 들고 문지방을 넘다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제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안타깝고 절통하게도 여선생은 살인범 누명을 쓴 채 법정에서 늘 가련하게 잊지 못하던 제자 장선을 변호사도 아닌 검사로 만나게 된다.

신출 선생 목소리로 다른 영화도 볼 수 있었으면...

영화 상영전 무대에서 인사와 함께 특별한 감회를 말하고 있는 신출씨
 영화 상영전 무대에서 인사와 함께 특별한 감회를 말하고 있는 신출씨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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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사람들에겐 뻔하고 촌스러운 스토리에 불과한 영화다. 민 검사가 법정에서 10년 전 이야기를 들춰 내 여선생의 누명도 벗기고 집으로 모셔 은혜를 갚는다는, 옛날 영화나 소설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그만 콧날이 시큰, 한순간 눈물까지 성큼 돋았다. 화면도 희미하고 지지직거리고, 연기도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유치하고 결말이 뻔한 영화를  보면서 말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배고픈 설움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 세련된 요즘 영화들이 절대, 그리고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 시대의 순정과 순수함 때문이라고 할까. 오랫동안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무성영화를 마지막 변사의 생생하고 절절한 목소리로 봤다는 감동이라고 할까. 아무튼 여러 갈래의 복잡한 감동으로 영화를 봤고 가슴에 팍 새기고 말았다.

단 한 번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한마디라도 놓칠까 몰두하여 본 영화는 이제껏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화면에 따라 설명을 하는지라, 화면이 이어지지 않고 다른 장면이 나오면 말이 어정쩡하게 끊기기도 했다. 4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니 화면인들 오죽 희미하고 어색하랴. 그래도 재밌다는 감동만 거듭되는 것을 어쩌랴.

배역과 장면에 따라 쏟아지는 구구절절한 그 설명, 그 감정의 표현들을 어찌 다 설명할까나. 내 나이에 신출 선생의 목소리로 무성영화를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불현 궁금해질 만큼 참 특별한 횡재를 했다 싶기도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로 다른 영화들은 또 볼 수 없나? 많이도 말고 딱 한편만이라도….' 이런 바람까지 갖게 되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큰 만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서 봤다면 좋았을 걸 싶고, 멀리 김제에 계신 터라 친정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해 자꾸 아쉬워지는 이 마음은 언제나 쉬이 털어지랴. 함께 간 시어머니와 동네 분들도 "너무 재미있게 봤다"며 거듭 거듭 말씀들을 하시는 통에 우리 어머니 어깨가 한자는 넘게 올라간 듯하다.

한때 선생은 '천진난만한 신출 변사', '천재소년 신출'이라 불렸단다. 선생이 승승장구 할때 투자한 작품이 <검사와 여선생>, 현재 국립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필름도 선생이 기증한 것이란다. '우리의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이 돌아가시면 우리의 변사는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영화 잘보고 그저 아쉽게 돌아왔다.

영화 상영 후 관객들로부터 감회와 감동을 듣는 신출씨
 영화 상영 후 관객들로부터 감회와 감동을 듣는 신출씨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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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사람들
영화 상영 전, 국립민속박물관 로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선생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몇 분 있었다. 몇 분의 이야기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마련한 추억의 영화보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마련한 추억의 영화보기
ⓒ 김현자(포스터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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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공부하기 때문에 무성영화가 궁금해서 왔어요. 기대가 돼요." - 20대 여성

"<검사와 여선생>? 그때 정말 대단했지. <성벽을 뚫고> <장화홍련전> <아리랑>도 재밌었어. 요즘 영화들이 어떻게 그때 영화들을 따라갈 수 있어. 그때는 말이야. 아예 손수건 준비하고 갈 만큼 재미가 있었다니까. 말도 마. 오늘 오길 참 잘했네. 뭐 그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같아.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언제 또 들을 수 있겠어." - 74세 할아버지

"제 아내가 신출 선생님이 변사라고 꼭 오고 싶어해 함께 왔는데 오길 잘했습니다. 아까 선생님을 직접 뵙고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인사도 드렸어요. 우리의 무성영화들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영상과 함께 목소리로 기록하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 40대 남성

"그때는 19세 미만 불가 같은 것이 전혀 없었어. 그럴 필요 없이 영화들이 참 순수했거든. 요즘처럼 오염되지도 않았고. 멜로 영화라고 해도 요즘과 질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제한할 필요가 없었어. 요즘 영화들은 아마 절대 따라갈 수 없을걸. 그때 그 영화들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와서 볼 수 있어서 감개가 무량해. 학교 빼먹고 천막을 뚫고 몰래 들어가 볼만큼 정말 좋아했었거든." - 60대 후반 남성

"저 나이에 한 시간 동안 화면만 보고 어떻게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대단하네. 나오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구구절절 잘 할 수 있을까. 많이 보러 다녔지. 변사를 짝사랑하는 동네 처녀들도 있었어. 언제 또 볼 수 있겠어. 이런 기회가 좀 많았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못 먹던 옛날 생각도 나고, 정말 반갑네." - 70대 할머니

이번 영화 상영은 국립민속박물관이 65세 이상의 어른들을 위해 마련한 추억의 영화보기 그 마지막이었다. 박물관은 4월 한 달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추억의 영화들을 무료 상영했었다. 민속박물관은 이후에도 노년 생활을 즐겁고 생을 잘 마감할 수 있는 '행복한 여정', 만들기와 배움 프로그램인 '언제나 청춘' 등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들은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 안내돼 있다.


태그:#검사와 여선생, #신출, #변사, #무성영화,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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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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