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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판문점 3자 연합대회 참가를 위해 서울대 정문으로 나오고 있는 지도부와 참가단.(빨간 상의 박창균 총대장, 왼쪽으로 강희남 대회장, 김양무 본부장, 서상권 부경연합 의장, 박해전 대변인, 박정숙 김선분 고문).
 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판문점 3자 연합대회 참가를 위해 서울대 정문으로 나오고 있는 지도부와 참가단.(빨간 상의 박창균 총대장, 왼쪽으로 강희남 대회장, 김양무 본부장, 서상권 부경연합 의장, 박해전 대변인, 박정숙 김선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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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아스팔트에는 폭염이 쏟아졌다. 걷기조차 힘든 한낮의 도심거리를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내달렸다. 시골에서도 마찬가지, 때론 논둑을 가로지르고 철로를 내달렸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을 만나며 홍보물을 건네고, 어느 사이 신호가 떨어지면 일사분란 대오를 갖추고 약속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불쑥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르는 청량제였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경계의 눈빛은 더 빛났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시커먼 제복에 파란 헬멧을 쓴 그들이 덮칠지 모르는 늘 긴장된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걷고 뛰고를 반복하며 오가는 시민들과 얘기하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축 처진 몸을 이끌고 교정에 들어서서야 그나마 안심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 취침시간에도 교대로 불침번을 세워야 했다. 자기 전에는 땀으로, 소금으로 얼룩진 몸을 씻고 하루를 점검한다. 활동 사항, 시민 반응, 부상자 현황, 그리고 자기반성과 동지들 상호간의 비판, 간단한 교육과 다음날 활동 계획 등이 공유되면 시멘트 바닥에 깔린 얇은 깔개 위에 지친 몸을 던진다.

박창균 총대장은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 대견하다. 벌써 9일째, 내일이면 드디어 서울로 입성, 대회가 열리는 서울대학교로 진입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박창균은 지친 몸을 뉘고 눈을 감았지만 좀체 잠을 들 수가 없다. 지난 8박9일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아른거린다.

한총련 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청년단체에서 지원한 500여 명의 통일선봉대의 총대장으로서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왔다. 서울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한 동군과 광주로 내려간 서군이 내일이면 다시 대전에서 만나 서울로 향할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늘 경찰에 쫓기면서도 웃음과 열정으로 여기까지 온 대원들이 한 없이 자랑스럽다.

최대한 전경들과의 충돌을 자제하며 평화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기에, 지금까지 큰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몸싸움이나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은 다반사였다. 며칠 전에는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서 선전전을 진행하던 대원들을 전경들에게 연행당할 뻔한 상황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5.18광주항쟁의 도시라 그런지 시민들의 반응도 뜨겁다. 고생한다고 생수며 빵을 건네는 시민들, 노래를 부르며 시내를 지날 때 함께 구호를 외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큰 힘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창균에게는 무엇보다도 대원들에게 미안함이 앞선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함께 행진하지 못한 점,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투쟁의 원칙을 앞세워 다그쳐 대원들을 힘들게 했던 일, 사전 체포영장 발부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은밀히 이동한 부분들을 생각할 때, 갖은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대원들에게 총대장으로서 면목이 없다. '내일이면 끝난다. 무사히 서울대로 입성, 대회만 성사시킨다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다. 마지막 하루, 힘을 내자. 투쟁 투쟁 전진 전진.' 박창균은 스스로를 달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통선대의 활동이 시작됐다. 각자 짐을 챙기고 오늘 일정에 대해 다시 한 번 공유하고 각 조별로 움직였다. 오후에 들어 대전의 한 학교에는 경상도에서 올라온 동군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서군이 속속 집결했다. 반가움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무용담을 나누며 대오를 정비했다. 박창균 총대장은 500여 명의 대원들 앞에 오랜만에 섰다.

"동지들 정말 고생했소. 여러분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8월의 폭염을 이기며 흘린 한 방울의 땀과 열정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이오. 먼 훗날 통일조국의 후손들이 여러분을 기억하며 자랑찬 조국의 통일 일꾼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오."

대원들의 함성과 박수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청년학생 선봉투쟁 조국통일 앞당기자"
"통선대가 앞장서서 10차 범민족대회 사수하자"
"총대장 중심으로 통선대 일치단결, 범민련을 강화하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총대장의 말이 이어졌다.

"동지들! 이제 마지막 투쟁이 남았소. 오늘 우리는 7천만 겨레의 조국통일 염원을 담은 제10차 범민족대회가 열리는 서울대에 입성할 것이오. 동지들이 입성하지 못하면 이번 대회는 성사될 수 없소. 혼신의 힘을 다해, 통일선봉대의 자존심을 걸고 끝까지 임무를 수행해 주길 바라오. 투쟁 투쟁 전진 전진!"

그날 밤, 어둠이 짙게 깔린 관악산 입구에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최종 약속 시간은 밤 9시. 박창균의 마음도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모든 대원들이 모여야 출발할 수 있다. 낙오자를 남기고 떠날 수는 없었다. 들려오는 소식으론 전경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서울대 정문과 후문 등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전경들이 이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다. 하지만 대원들은 마지막 약속, 과업을 완수했다. 정각 9시, 박창균은 각군 대장들에게 출발명령을 내렸다. 드디어 관악산을 가로질러 서울대 입성의 마지막 행군이 시작됐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관악산에서 대원들은 서로의 숨결과 발자국 소리를 나침반 삼아 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바쁘고 앞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원들은 침착하면서도 당당하게 계곡을 건너고 능선을 넘었다. 지금쯤 산 입구에는 전경들이 추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정작 큰 위험 부담이 있어 함부로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칫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념할 그들이 아니다. 분명 대오를 흩트리고 낙오자를 체포하는 등, 최대한 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자정을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행군 선두에서 낮은 소리로, 기쁨에 찬 소식이 전해졌다. "불빛이다. 교정이 보인다." 이 소식은 전달되고 이어져 결국 가장 후미를 지키며 뒤따르던 박창균 총대장에게까지 들려왔다. '드디어 입성이구나.' 땀으로 얼룩진 박창균의 얼굴에 한 줄 물줄기가 흘렀다.

박창균은 통일선봉대 총대장이 이번이 세 번째다.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제7차 범민족대회를 김영삼정권이 무차별적으로 탄압하고 한총련과 범민련의 씨를 말리는 작전으로 전개되면서, 90년대 통일운동의 최대 위기를 맞이한 상태에서 97년과 98년 연이어 통일선봉대 총대장을 맡아왔다. 최악의 상황에서 성사시켰던 97년 조선대에서의 8차 범민족대회, 각고한 노력으로 역량을 복원하여 치른 지난해 서울대에서의 9차 범민족대회. 그리고 이번에 치러지는 제10차 범민족대회까지. 

박창균에게는 이번 대회가 더욱 남달랐다. 바로 90년대 남북해외 3자연대 통일운동을 총결산하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햇수로 10년, 범민련 운동과 자신의 3자연대 운동 10년을 총화하는 대회인 것이다. 그리고 몇 년간 계속된 남측 통일운동 노선 차이에 따른 분열을 마감하고 원칙과 중심을 세우며 통 큰 단결을 이뤄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나의 대회'다 '범민족대회'다 얼마나 분란이 많았던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범민족대회에 대해 알리고 통일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범민족대회의 꽃이자 핵심 조직인 '통일선봉대'를 이끄는 총대장으로 박창균은 이번 대회가 끝나면 또다시 감옥신세를 져야 한다. 벌써 사전 체포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감옥은 또 다른 자기 수양의 학교이자 투쟁의 장이었다. 88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사건으로 남산 안기부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구속됐던 기억이며, 지난 2년 연속 범민족대회와 관련한 체포와 구속의 경험이 박창균을 담담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남북해외 3자연대 통일운동의 금자탑으로 빛나는 '제10차 범민족대회'

1999년 8월 13일 밤 10시, 서울대학교 노천극장은 5만 명이 운집, 통일의 열기로 넘쳤다.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에서 달려온 사회각계 인사들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그리고 시민들로 꽉 찬 노천극장에서 드디어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첫 공식행사인 통일선봉대 환영식과 전야제가 시작된 것이다. 범민족대회사상 가장 큰 통일축전으로, 남북해외 3자 연대 행사로, 온 겨레의 통일염원을 담은 민족대단결의 빛나는 역사의 한 장으로 새겨진 '제10차 범민족통일대축전'의 시작은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열기와 함성은 15일 판문점 3자연합대회 출정식과 폐막식까지 계속됐다. 

박창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87세)은 지금도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고백한다. 

기마무등을 탄 박창균.
 기마무등을 탄 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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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대단했지. 통일운동 내부적으로는 노선을 가지고 분열하고 외부적으로는 당국의 광폭한 탄압이 있는 상황에서 대회를 성사시킨다는 것이 좀체 쉽지 않았거든. 하지만 우리는 당당히 해냈지. 특히, 한총련 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지. 원칙을 세우고 끝까지 굳세게 지키며 대회 성사를 위해 온 열정을 다 바쳤어. 결국 우리는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명실공히 20세기 최고의 범민족통일대축전으로 만들었지."

"참 영광스런 자리였지. 5만 명이 꽉 채운 서울대 노천극장에서 통일선봉대 환영식이 있었는데, 내가 왜 그때 총대장이었잖아. 그래 대원들이 나를 기마무등을 태우고 입장하는데 모두 일어서서 통일선봉대  찬가를 부르는 거야. '한 점 부끄럼 없는 내 청춘이다. 이 한 목숨이다. 자주민주와 통일의 한길에서 투쟁 투쟁이다...... '. 내 비록 팔순 가까이 된 몸이었지만 청춘이 따로 없었지. 그동안의 고난과 역경이 모두 날아가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청년들이 있어 조국통일의 앞날이 있다는 걸 참 많이 느꼈지."

"다 좋을 수만은 없고, 가슴 아픈 기억도 있지. 당시 김양무 동지가 범추본 본부장을 맡아 대회를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은 했는데 말이야, 그때 그 동지가 말기 직장암을 앓고 있었거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뭐야 '장루'라고, 그것을 배에 차고 다녔다는 거야. 배변을 보지 못하니까. 그 몸으로 원천봉쇄 된 서울대를 동지들의 손을 잡고 낙성대 입구 전철역에서부터 뛰어서 들어온 거지. 지금도 많이 미안하고 고맙고, 그만한 통일일꾼이 없어......."

10차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장을 맡아 대회를 성사시킨 김양무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부의장은 대회가 끝난 후 체포연장이 발부된 다른 지도부를 이끌고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간다. 김양무 부의장은 3개월 가까이 '국가보안법 철폐' '미국과 일본의 전쟁책동 분쇄'를 기치로 농성을 계속하던 중 앓고 있던 직장암이 온 몸에 퍼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다음해 1월 26일 그토록 바라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기뻐했을 6.15공동선언을 맞이하지 못하고 별세한다. 박창균 고문도 함께 농성을 진행하던 중 99년 12월 27일 구속되면서 김양무 부의장의 임종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두고두고 한이 됐다.

2003년, 평균 나이 74세의 '이라크 파병 저지 천리 민중행진단' 참가

'영원한 통일선봉대' 박창균 고문은 이후 2003년 10월 또다시 국토를 종단하는 천리행군에 들어간다. 바로 '이라크 파병 저지 목포-서울 도보 민중행진단'이다. 박 고문은 고인이 된 강희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과 청주의 정진동 목사, 전주의 김범태 명예교수, 그리고 서경원 전 국회의원, 강순정 전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등 통일원로들과 20일 간 행진에 결합한다. 평균 나이 74세의 이들 행진단은 목포-무안-나주-광주-장성-정읍-태인-원평-전주-익산-논산-계룡-대전-청주-조치원-평택-오산-수원-안양-서울을 거치는 천리길 행군을 완수하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정당성 없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우리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낼 순 없었지. 비록 다들 늙어 골골했지만, 의기만은 충천했어. 가는 곳마다 지역 인사들이 나와 응원하고, 민중들은 또 고생한다며 격려하고 식당에선 밥값을 안 받는 일도 많았지. 민중들은 참 대단하단 말이야. 민중의 힘을 얻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어.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어려운 행진을 마칠 수 있었다고 봐야지."

'영원한 청춘' 박창균 고문은 주한미군 철수 운동에도 적극 결합, 2005년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 69일간 노숙농성을 시작으로 매년 맥아더동상 철거 농성,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앞 주한미군 철수 농성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더위와 추위, 눈과 비바람도 이들 노투사들의 의지는 꺾지 못했다.

'일편단심'의 통일애국열사 강희남

박창균 고문이 있는 곳에는 늘 강희남 목사가 있었다. 지난해 6월 별세한 강희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은 박 고문보다 4살 위. 하지만 둘은 70년지기 친구이자 동지다. 어떤 속마음도 다 털어놓고 허심탄회 상의할 수 있는 마지막 동지를 보내고 박 고문도 기력이 더 쇠했다.

강희남 의장(오른쪽)과 함께.
 강희남 의장(오른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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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목사는 통일에 대해 '일편단심'이라고. 그 어떤 것도 그것을 꺾지 못했어. 오로지 전진, 투쟁, 민중 이런 걸로 살았지. 어떤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은 전사이면서 마음이 그렇게 여린 휴먼니스트였지. 그러면서도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청빈한 선비라고. 지난해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닌데 참 마음이 아파.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고 한 말 있잖아. '내 가슴 반쪽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 똑같은 심정이었지."

목사 박창균의 종교관은 이채롭다. 흔히 얘기하는 예수, 기복신앙으로서의 기독교를 철저히 부정하고 민중신학을 설파한다. 어린시절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형 박흥균의 영양이 크다. 박창균 목사는 1950년부터 설교를 시작하며 늘 민중들과 동고동락 했다. 쫓기는 노동자, 학생, 재야인사들을 돌보며 민중신학, 통일신학이 더욱 깊어졌다.

"예수는 바로 민중이야. 민중은 노동자, 농민,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를 믿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 민중을 믿고 민중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거야. 특히, 우리 민족에게 민중을 사랑하는 것은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는 거란 말이야.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이 모든 억압과 착취, 부조리가 해결될 수 없어. 통일은 꼭 되고 말거야. 암 되고 말지."

박창균 고문은 지금도 매일 운동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산책을 하며 사색을 하고, 일부러 소리 내어 크게 웃는다. 이것이 87살의 기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귀띔한다. 경기도 연천의 시골마을에서 두 시간 넘게 기차와 전철, 버스를 갈아타며 오늘도 당 노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민주노동당 행사, 시민사회단체의 각종 집회와 회의에 참석하는 '열혈청춘' 박창균. 작별인사는 역시 "투쟁 투쟁 전진 전진"이다.

박창균 고문 약력

1924년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사지동에서 출생
1938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공립초등학교 졸업
1943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공립농업학교 4학년 중퇴
1944년 일본 동경시립제3중학교 졸업
1948년 조선신학교(한신대) 3년 졸업
1950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4년 졸업
1954년 신광여자중고등학교 교목 시무
1955년 숙명여자고등학교 심리학 강사
1960년 서울행화정교회 시무
1965년 한시대학교 총동문회 회장
1966년 민주화운동 목요기도회 회원
1970년 통일사회당 간사장/ 통일운동 참가
1972년 세계 사회당 지도자 동경대회 한국대표
1978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발기인
1988년 민자통 사건으로 옥고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통일선봉대 대장
1998년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통일선봉대 총대장
1999년 범민련 남측본부 감사/통일선봉대 총대장
2002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연방통추 상임고문
2003년 통일연대 고문
2007년 민주노동당 중앙당 노년위원장
2008년 한국진보연대 고문

1999년 9월 10차 범민족대회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등 농성 투쟁을 보도한 범국민투쟁본부 신문 보도. (왼쪽부터 박창균 고문, 김양무 범투본 본부장,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구금통일인사 윤희보 선생).
 1999년 9월 10차 범민족대회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등 농성 투쟁을 보도한 범국민투쟁본부 신문 보도. (왼쪽부터 박창균 고문, 김양무 범투본 본부장,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구금통일인사 윤희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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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천리행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민중행진단. (오른쪽부터 김창규 김범태 정진동 강희남 박창균 강순정 서경원).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천리행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민중행진단. (오른쪽부터 김창규 김범태 정진동 강희남 박창균 강순정 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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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명동성당 농성 당시 기자회견 모습.(오른쪽부터 박창균 고문, 김규철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 ,정연오 한학협 공동대표, 강희남 의장).
 1999년 명동성당 농성 당시 기자회견 모습.(오른쪽부터 박창균 고문, 김규철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 ,정연오 한학협 공동대표, 강희남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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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판문점 3자 연합대회를 위해 서울대를 나서고 있는 지도부.(앞줄 오른쪽부터 윤희보 박창균 강희남 서상권 김양무) .
 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판문점 3자 연합대회를 위해 서울대를 나서고 있는 지도부.(앞줄 오른쪽부터 윤희보 박창균 강희남 서상권 김양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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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개막식.(오른쪽부터 김범태 박창균 김양무 신창균 김석형 강희남 등 대회 지도부).
 1999년 10차 범민족대회 개막식.(오른쪽부터 김범태 박창균 김양무 신창균 김석형 강희남 등 대회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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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사람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10차 범민족대회, #박창균, #인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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