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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새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SBS 새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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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주말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는 소위 '막장 드라마'다. 개연성과 설득력은 어디론가 내다 버리고 이해도, 납득도 가지 않는 상황과 캐릭터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놀랍게도 30%대. 결국 '욕하면서 본다'는 불변의 진리에 힘입어 얼마 전 <수상한 삼형제>는 20회 연장 방송이 결정됐다.

이 <수상한 삼형제>의 막장스러움에 반기를 들고 나선 MBC 주말 드라마 <민들레가족>. <그대 그리고 나> <누나> 등을 집필한 가족 드라마의 대가 김정수를 내세워 '따뜻한 가족애'를 표방하며 <수상한 삼형제>의 독주에 제동을 걸려 했던 <민들레가족>은 그러나, 한 자리수 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 역시 착한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하며 안타까움에 절로 탄식이 튀어나온 그 순간, 그 분이 나타나셨다. "가족 드라마의 '가'자도 모르는 것들이, 저리 비켜!"라고 말한다 해도 결코 어색할 것 같지 않은 위엄과 포스의 소유자, 김수현. 이 노(老)작가가 KBS <엄마가 뿔났다> 이후 2년 만에 우리 앞에 내놓은 작품은 SBS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다.

꼬장꼬장한 할머니부터 찜질방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증손녀까지, 4대가 한 울타리 안에서 모여 사는 <인생은 아름다워>는 전형적인 김수현식 가족 드라마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은 병태(김영철 분)네 가족. 펜션을 운영하는 병태는 성격 좋고 가슴 따뜻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다.

4대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김수현식 가족 드라마

민재와 태섭의 갈등은 재혼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다.
 민재와 태섭의 갈등은 재혼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다.
ⓒ SBS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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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나이에 상처한 뒤 아들을 데리고 딸 가진 민재(김해숙 분)와 재혼해 가정을 꾸려 수십여 년 단란하게 살고 있는 그에게는 늦도록 결혼 안 한 장남과 남동생 둘이 있지만 그리 큰 걱정거리는 아니다. 아내에게 뼈가 없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물러터진 호인인지라 어지간해서는 걱정이나 당황 같은 것을 않는 병태.

그런 그에게 방송 1회 만에 핵폭탄 급 걱정거리가 던져졌으니, 바로 오래 전 집을 나간 아버지(최정훈 분)가 그 장본인이다. 돈 많고 인물 좋아 젊은 시절 숱한 외도를 한 끝에 어머니(김용림 분)로부터 이혼당하고 집에서 나간 아버지가 죽을 때는 본부인 옆에서 죽고 싶다며 컴백홈 선언을 한 것. 아버지라면 진저리를 치는 어머니와 첫째 동생 병준(김상중 분) 때문에 병태는 아버지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한다.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사는 김수현식 가족 드라마는 지금까지 수차례 그려져 왔으나 시청자들은 '식상하다', '빤하다'는 식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역시 김수현!'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이야기에 공감하며 드라마에 빠져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김수현의 가족 드라마에는 '가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갈등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한 가족은 없다. 아니,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드라마의 소재로는 적합하지 않다. 무슨 재미인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여러 갈등이 싹트고, 발전하고, 무르익고, 해결되고, 봉합되는 과정에서 비 온 뒤 땅이 굳듯 가족애는 더욱 돈독해지고 그들은 가족이란 울타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한다. 이것이 보통의 가족 드라마다.

문제는 갈등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명색이 드라마 작가라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게 작금의 가족 드라마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 어째서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들은 다 똑같은 갈등만 하는 것일까. 남편의 외도에 아내는 괴로워하고 남편과 불륜 상대는 한 치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못마땅해 죽고, 며느리는 시집살이가 넌덜머리 난다.

그들 가족 드라마 안에는 가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고민 따위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하면 상황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어 갈등을 증폭시킬까,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더 극단으로 치닫게 해 긴장감을 고조시킬까 하는 말초적인 고민뿐이다. 그래 놓고선 말은 번지르르하다. "막장은 아니다. 지금은 그래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 가면 안 그렇다. 기다려 달라." 기가 막힌다.

가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을 하는 김수현 작가

극중 동성애자를 연기하는 송창의와 이상우.
 극중 동성애자를 연기하는 송창의와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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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에는 바로 이런 클리셰가 없다. 극의 초반 병태네 가족의 갈등의 축은 결혼하지 않는 장남 태섭(송창의 분)과 어머니 민재다. 태섭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힐 수 없어 매번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그를 보며 민재는 속이 탄다. 혹시 자신이 계모라서, 친아들이 아닌 의붓아들이기 때문에 신경을 덜 쓰는 게 아닌가 싶어 더 유난을 떨고 걱정한다. 하지만 태섭은 오히려 그런 민재가 부담스럽다.

나날이 이혼율이 급증하고 그에 따라 재혼가정이 늘어나면서 계모, 계부와 의붓자식 간의 소통의 문제는 작금 우리 사회의 가족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하나다. 김수현은 이미 전작 <엄마가 뿔났다>에서 어린 딸 가진 이혼남(류진 분)과 결혼한 장녀(신은경 분)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갈등을 그려낸 바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말하자면 <엄마가 뿔났다>의 20년 후 이야기인 셈이다.

태섭이 동성애자라는 설정은 김수현이 가족 드라마라는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울타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신선하고 새로운 갈등과 고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형식에서 다소 자유롭고 시청자 층이 어느 정도 정해진 미니시리즈도 아닌, 말 그대로 온가족이 시청하는 주말 가족 드라마에서 조연급도 아닌 주연 캐릭터가 동성애자라는 설정은 그야말로 파격이다.

영화 <왕의 남자>와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성공을 거두면서 미디어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도 조그마한 변화가 있었다. 금기시되고 터부시되던 이전과는 달리 조금은 자유롭고 개방적이 됐다. 하지만 그 어느 가족 드라마도 현실 세계의 동성애자가 짊어지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와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려는 시도를 하진 못했다.

타고나길 내성적인 것인지,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겨온 세월 탓에 내성적이 되어버린 것인지, 자기 생각을 도통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고 꽁꽁 싸매는 성격 탓에 태섭의 본심은 민재뿐만 아니라 가족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친아버지마저도. 민재는 태섭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서운하고, "네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서 그런다"고 하는 시어머니의 말에 상처 입는다.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이 모자 사이는 앞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태섭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뒤 또 새로운 갈등의 국면에 접어들고 이 문제는 가족 전체의 것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는 갈등은 평범하진 않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가정에선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문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으려 했던, 조심스럽고 민감한 문제를 노련한 노작가는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앞서 막장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의 상상력 빈곤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상상력의 빈곤은 자기복제로 이어지기 쉽다. 막장 가족 드라마의 내용이 어디서 봤던 것 같고, 왠지 눈에 익은 것은 출연 배우들이 '아무개 사단'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명색이 가족 드라마를 쓴다면서 진짜 가족의 모습은 보려 하지 않는 몇몇 막장 드라마 작가들에게 김수현이 내준 숙제다. 부디 잘 보고 배우길.


태그:#인생은아름다워, #김수현, #정을영, #김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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