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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해외여행을 앞두고 가장 염려하는 것이 '말(language)'일 것이다. 이미 정해진 길을 안내자의 통솔 하에 따르는 패키지가 아닌 스스로 계획해 혼자 가는 자유 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본인도 남 얘길할 처지가 아닌지라 일본행 티켓 다음으로 산 게 회화책이었다. 히라가나 가타가나도 모르는데 몇 자 외운들 뭣하며, 물어도 답을 알아들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소통 이전에 예의의 문제가 아닐까. 그리고 현지에서 직접 경험한 바 쉬운 말 한 마디가 실제로 큰 역할을 했다.  

영어가 만국공통어라고 하나 엄연히 자국의 나랏말이 있는데 노력도 없이 영어로만 '쏼롸쏼롸' 하는 저변에는 맹목적 사대주의가 깔린 게 아닌가 하는 복잡한 생각도 해본다. 차치하고 한국에서 마주친 외국인이 서툰 발음이나마 "안뇽핫쎄요오" 하면 괜히 고맙고 대견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나도 그런 외국인이면 좋겠구나' 싶었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18시간여 만에 오스카항에 정박한 여객선
 부산항에서 출발해 18시간여 만에 오스카항에 정박한 여객선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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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3월5일 정오, 승선한 지 18시간이 조금 넘어 오스카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분위기는 부산항과 다를 바 없는데 당연하지만 보이는 글자와 들리는 말이 전혀 달랐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먼저 도착해 있는 자전거를 찾아 세관을 통과했다. 이제부터 본격 여정이다. 

일단 첫 번째 목적지를 신이마미야로 잡았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저렴한 호텔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처음부터 영 난감하다. 물론 터미널 바로 앞에 시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나의 '애마'는 자전거다.

먼저 지리를 파악할 수 있는 시내지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터미널 내에 당연히 있겠지 생각한 상점이 없었다. 긴장한 탓에 눈이 어두워진걸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대합실 문으로 들어왔다. 제복을 입었으니 직원으로 여기고 얼른 달려가 "스미마셍, 시나이노 지즈와 도코데 가에마스까?(시내지도는 어디서 살 수 있나요?)" 했다.

환갑쯤 돼 보이는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엷게 미소를 짓더니 "아~ 시나이노" 하고 답했다. 말이 통한 것 같아 뿌듯함이 밀려왔다(배에서 내리기 전 당장 필요한 회화표현 몇 개를 수첩에 적어 두었다). 이어 자신있는 손짓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는데, 생각한 것이 없던지 부산한 걸음으로 옆의 매표창구에 갔다가 돌아와 아래 서랍들까지 죄다 열어본 뒤 급기야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5분여쯤 중지를 모으나 싶었는데 결국 무척 미안한 표정이 되어 "스미마셍" 하고 뭐라고 더 말을 이었다. 되레 이쪽이 미안해질 정도라 어쨌든 감사하단 뜻으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하고 돌아서는데 그때 급히 달려온 같은 유니폼의 젊은 남자가 근처 관광지가 담긴 팸플릿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비록 원하는 지도는 아니었지만 이국에 와서 마치 환대를 받은 듯 감개무량해졌다. 

재일교포라는 할아버지들이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아 대신해서 길을 물어보고 있다.
 재일교포라는 할아버지들이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아 대신해서 길을 물어보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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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어두워지기까지 시간도 넉넉하고, 가다보면 답이 나오겠지 싶어 자전거를 몰아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일단 출발해서 누구라도 보이면 길을 물을 요량으로 주변 지리를 살핀 뒤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는 왼쪽 도로로 진입했다. 

그렇게 10분쯤 달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이어 자전거 전용도로로 들어섰는데 저만치서 노인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좀전 얻은 용기로 망설임 없이 "스미마셍" 하고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곧바로 지도를 펼치는데 돌연 "한국에서 왔어? 우리도 한국 사람이야" 한다. 놀라서 "어, 한국 분들이세요?" 하고 재차 물었더니 이번엔 "하이" 한다. (응?)

알고보니 근처에 놀러온 재일교포 할아버지들이었다. 긴 세월 한국어와 일본어가 완벽히 체화되어 당신들도 모르게 두 언어가 섞이는 듯 했다. 대충 일본에 온 목적을 얘기하고 신이마미아로 가려는데 길을 가르쳐 주십사 청했더니 대뜸 한 분이 "자전거로?" 하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마음이 헤아려져 "녜!" 하고 웃었더니 고개를 갸웃하시곤 옆에 친구 분과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코스모스 퀘어섬은 일종의 거대한 물류창고로, 땅을 매워서 만든 인공섬이다. 그러니까 시내로 가려면 여길 벗어나야 하는데 지금 온 길로 되돌아가서 우회전을 하고... 그리고 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그게 자동차 전용이다. 자전거로는 안 된다"였다. 그제야 빨려들어갈 듯 엄청난 속도로 차들이 달리는 걸까 싶어 걱정이 되려는데 이번엔 할아버지들이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행인을 직접 불러세운다.  

세 노인이 도로와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일본어로 한참 얘기한 끝에, 행인이 수첩을 꺼내 지도를 그리며 다시 내용을 정리해주었다. 못 알아듣는 표정을 하자 앞서 만난 할아버지 한 분이 동시통역을 해줬다. 정리를 하면 "앞에 보이는 ATC(아시아 태평양 트레이드센터) 건너편 도로 우측으로 직진해서 사거리를 만나면 좌회전을 해라. 그 길로 아주 오래 가야 한다. 그러면 스미노에코엔역이 나올 건데 거기서 또 우회전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 도시락 가게 주인. 이 곳에서 산 돈가스 덮밥은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 도시락 가게 주인. 이 곳에서 산 돈가스 덮밥은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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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도를 받아들고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할아버지들께 감사인사를 드렸다. 행인이 먼저 가고 신호등 쪽으로 같이 걸어오던 할아버지들이 "신이마미아는 일본의 노숙자나 일용직 근로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일본)가 치안이 나쁘진 않은데 상대적으로 거긴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에 얼마나 사셨냐 여쭸더니 50년이 넘었다 했다. 문득 마음이 저릿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어 밝은 표정으로 인사만 드리고 돌아섰다.

일러준 길들을 다시 한번 숙지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곧바로 숲이 우거진 자전거도로를 만났는데 간밤에 비가 온 터라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달리다 행인이 보이면 서슴없이 다가가 길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그 사이  "스미마셍, 스미노에코엔와 도꼬데스까(스미노에코엔이 어디인가요?)"란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

그렇게 두 시간여쯤 달렸을 때 문제의 다리를 만났다. 그러나 우려했던 만큼 가파르지도 않고 차도 옆에 갓길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넘을 수 있었다. 대교를 건너가니 주변 분위기가 한층 활기를 띠었다. 다양한 아파트와 상점들이 보이고  행인의 수도 늘어났다. 시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제서야 점심 때가 한참 지났음이 기억났다. 일단 밥을 먹고 남은 길 힘내서 가자 싶어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 봉착. 어느게 식당이고 술집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흰 게 종이요 검은 게 글이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모양새의 도시락 전문점을 발견했다. 한자로 '본가(本家)'라고 적혀 있고 안팎의 모습이 우리나라 그것과 흡사했다. 얼른 길을 건너 가게로 들어가 사진을 보고 돈가스 덮밥을 주문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산 돈가스 덮밥. 육교를 건너다 한뻔 떨어뜨린 탓에 모양이 망가졌지만 맛이 정말 황홀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산 돈가스 덮밥. 육교를 건너다 한뻔 떨어뜨린 탓에 모양이 망가졌지만 맛이 정말 황홀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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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트레블(travel)?" 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다 밖으로 달려나가 수첩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료꼬 데스(여행입니다)" 하고 다시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흐뭇하게 웃는다. 이어서 스미노에코엔역의 위치를 물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노트북을 내 쪽으로 향하게 한 뒤 위치검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스미노에코엔역은 불과 200미터 남았고, 거기서 '하마구치'라는 곳까지 간 다음 다시 우회전을 해서 꽤 오래 가야 신이마미아역이라고 했다. 일단 반은 왔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따끈한 도시락을 받아드니 당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따로 좌석이 없어 자전거 손잡이에 도시락이 든 비닐봉지를 매달고 다시 출발했다. 그 후 얼마지 않아 만난 스미노에코엔역 근처 한적한 공원에서 밥을 먹고(맛이 기가 막혔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하마구치를 찾아 우회전, 서너 시간을 더 달려서 마침내 신이마미아역에 도착했다.

현지인이 친절하게 그려준 손지도.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런 지도가 주머니 속에 네 장이나 들어 있었다.
 현지인이 친절하게 그려준 손지도.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런 지도가 주머니 속에 네 장이나 들어 있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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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시각이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그러니까 배로 18시간, 자전거로 5시간여를 달린 것이다. '뭘 그리 사서 고생인가' 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게 또 상당한 매력이 있다.("모르면 말을 하지 마세요")

신이마미아역은 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이 말했듯 여행자 뿐만 아니라 노숙자와 일용직 근로자들이 모이는 곳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드북에서 봤던 저렴한 호텔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 하루 숙박비 2000엔에 인터넷 서비스를 무료 이용할 수 있다 했던 'CHUO'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가이드북의 설명과는 달리 싱글룸(침대)은 2500엔, 다다미방은 2300엔이었는데 5일 예약 조건으로 2070엔으로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방은 TV와 냉장고가 갖춰져 있으며 작지만 정갈하다. 입고 온 패딩 점퍼를 벗는데 주머니에서 행인들이 그려준 지도가 넉 장이나 나온다.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오늘 만난 일본인들에게서 느낀 것은 여태껏 들어왔던 그들 특유의 '가식적인 친절'이 아니었다.

일단 잠을 좀 자야겠다. 샤워를 하고 오니 온몸이 젖은 솜 같다.

덧붙이는 글 | '맘대로 떠나 무조건 살다오기' 일본 편, 세 번째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태그:#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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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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