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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이제 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양이다. 봄 기운을 드리운 22일 오후, 나는 한 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었다. 제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줄여서 '사대부고'라 부르는 이 곳에 있는 두 가지 볼거리를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곳은 가까운 서한두기와 용두암, 그리고 용연과 더불어 모두 용담동에 드는 곳이다. 지금까지 쓴 여행기의 대부분이 '용담동'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이 동과도 작별을 고할 때가 된 셈인데, 떠나기 전에 몇 가지 더 찾아 알리기 위해 나선 걸음인 것이다.

용두암에서 서쪽으로 빠져나와 남쪽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걸으면 높은 키를 자랑하는 플라타너스가 줄줄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나무를 낀 긴 담장 안이 사대부고의 교정이 되는데, 지금은 아라동에 있는 '제주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래서 이 주변 동네를 '대학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에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여 1964년에 세운 비행기 모양의 독특한 건축물이 본관 건물로 쓰였으나 1996년에 다만 낡았다는 이유로 없애버려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 학교는 동서 방향으로 건물이 서 있으며 입구는 남쪽에 있다. 한 해를 마감한 교정은 사람의 발길이 그리운 건지 잘 정돈된 모습으로 이방인을 맞이하였다. 건물 안에 들어서서 동쪽이자 오른쪽에 있는 문을 따라 운동장 쪽으로 나가면 매점이 하나 보이는데, 그 매점 앞 언덕에 수령 높아 뵈는 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공간이 눈에 띈다.

금속성으로 반짝거리는 안내판이 보이니 '아, 이 곳이로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하지만 안내판은 훌쩍 자란 까마귀쪽나무에 가리고, 오랫 동안 쌓인 먼지와 세월의 때를 씻지 않아 그 내용을 죄다 까먹어버린 꼴로 다가왔다. 이 곳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는 '힌트'인 셈이다. 저 쪽으로 가면 될까나? 오른쪽으로 난 좁은 목책 길을 따라  들어가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지전,물색,명줄이 매달려 있는 당나무가 특색이다.
▲ 궁당 지전,물색,명줄이 매달려 있는 당나무가 특색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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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궁당'이다. 전에 선보였던 '다끄내' 마을(수근동) 사람들의 본향당이라는 궁당의 안은 서너 사람이 들어서면 공간이 비좁아질 기세이다. 하지만 용연에 있는 고시락당에 비하면 양반이고, 게다가 사라진 내왓당에 비하면 임금님인 셈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10여 분 남짓 걸리는 한천교 너머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고 추측하는 내왓당은 제주도 4대 신당에 꼽힐 정도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 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바 있는 이른바 '전국구'인데, 단종에게서 왕위를 앗은 세조 때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당시 제주분대어사인 강우문이 안무사로 부임한 복승리에 대해 단종의 그림을 그려 요사한 제사를 지낸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는 강우문이 복승리를 음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듬해인 세조12년(1466) 7월 27일에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일에 강우문(姜遇文)이 아뢰기를, '천외당신(川外堂神)의 화상은 이미 불에 타버렸습니다.' 했는데, 지금 강우문이 말을 만들어 일을 발생시킨 정상(情狀)을 알아 내어 이미 죄를 다스렸으니, 그 당신(堂神)은 옛날과 다름 없이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위에 나온 '천외당'이 바로 내왓당의 한자말이며, 또 불에 타버렸다는 화상이 바로 '내왓당 무신도'를 뜻하는 것이니 오늘날 남아 전하는 것이 불에 타버린 그것과 적어도 유사한 방식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 강우문이 증거를 은폐하기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많으므로, 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를 당시에도 있었던 이른바 '진본'으로 여길 만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구설수에 올랐던 내왓당은 그날 이후로 제자리를 찾았으리라마는 고종 때인 1882년에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에 따라  무신도를 집에 가져가 보관하고 있던 심방(무당) 부부가 훗날에 죽게 되니 이를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전한다.

내왓당에서 모셨던 신은 12신위, 오늘날 남은 그림은 10폭, 그러니 2장의 그림이 없는 셈이다. 내왓당 무신도를 처음 보는 이의 십중 팔구는 '무섭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 느낌은 다른 말로 '경외감'이라 고도 할 수 있겠는데 종교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라 여길만한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점은 육지부의 무신도(무화)와 가름하는 특징이 된다.

상사대왕의 신상이다.
▲ 상사위 상사대왕의 신상이다.
ⓒ 제주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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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신 가운데 두 여신이 이곳 궁당에 와 좌정했다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인 상사대왕에게는 중전대부인(큰 부인)과 정절상군농(작은 부인)의 두 아내가 있다.
작은 부인 정절상군농이 또 임신을 했는데 돼지고기가 자꾸만 먹고 싶었다. 돼지고기가 금기 음식에 해당하는 것을 잘 아는 작은부인은 참으려 애를 썼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돼지털 하나를 뽑아다가 불에 태워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 것으로 달랬다.
바깥일을 보고 온 상사대왕은 돼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캐물었다.
이실직고한 정절상군농에게 무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양반 가문에 먹칠을 한 부인과는 함께 좌정할 수 없으니 나가시오!"
의아스럽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큰 부인, 중전대부인도 함께 쫓겨나 궁당에 좌정한 것이다. 큰 부인으로서 단속을 제대로 못했다는 죄목이 붙은 것일까?

내왓당무신도 10폭 가운데 궁당에 모신 두 여신의 신상이다.
▲ '중전위'와 '상군위' 내왓당무신도 10폭 가운데 궁당에 모신 두 여신의 신상이다.
ⓒ 제주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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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뒤 정절상군농은 돼지고기를 제물로 받고, 중전대부인은  쌀로 된 정결한 음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농경신에 해당하는 상사대왕이 볼 적에 돼지는 인간의 음식을 축내기만 하는 동물이다. 오늘날에야 음식쓰레기가 많아 처리에 문제가 될 정도이지만 옛날에는 어찌 그랬을까? 반면에 소는 농경에 보탬이 되면서도 풀을 먹기 때문에 먹이가 겹치지 않는다. 농경신에게는 금기 음식인 이 돼지고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여성의 임신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중전대부인은 출산과 육아에 관여하는 산육신('불도'라고도 하며 '삼신할미'와 같은 일을 한다), 정절상군농은 육아와 피부병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는다고 전해온다.

나무들이 만든 서늘한 기운을 몸에 담으며 잠시 이곳을 둘러 보았다.

움푹 들어간 곳에 초가 놓여 있다
▲ 초 움푹 들어간 곳에 초가 놓여 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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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굴 형태의 공간 안에는 채 태우지 않은 초가 놓여 있고, 들어오는 입구 쪽에 놓인 돌 위엔 막걸리 한 통이 서 있었다.

심하게 굽은 밑동에서 뻗어나온 모습이 신비롭다.
▲ 당나무 심하게 굽은 밑동에서 뻗어나온 모습이 신비롭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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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연석으로 된 제단 지붕 아래에 뿌리를 박은 당나무의 굵은 밑동은 제단 상부로 휘어져나와 위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용으로 승천하려는 이무기 같다. 두툼한 줄기에는 지전, 물색과 명실이 풍성하게 걸려 있어 이 신당의 주인이 여성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부 바닥과 주변도 정갈히 청소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을 찾는 이가 아직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좁다란 길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걷는다.
운동장 구석에 마련된 농구장에서 남학생 몇이 농구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운동장을 빠져나와 나무가 몇 그루 자란 얕은 언덕에 서면 마치 책상같은 모양의 돌이 그 틈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번엔 신이 아닌 옛사람이 누운 자리인 고인돌인 것이다.
철책으로 넓게 조성한 공간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제주도식 고인돌이다.
▲ 고인돌 제주도식 고인돌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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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이 언덕 지형인 독특한 모습의 고인돌이다.
이가 빠진 할아버지마냥 앞부분에 굄돌이 보이지 않는 이 고인돌은 그 덕분에 내부를 잘 관찰할 수 있다.

큰 굄돌 사이를 작은 돌들로 채웠다
▲ 고인돌 내부 큰 굄돌 사이를 작은 돌들로 채웠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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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를 보면 잘 다듬은 네모지고 큰 돌이 각 면마다 힘을 받쳐 주고 그 옆을 상대적으로 작은 돌들로 메워놓은 것이 보인다.
이 고인돌은 굄돌이 땅 위에 놓여 있어 '지상위석형'이라 하는데, 이러한 특징에 그 주검도 지상부에 놓는 특징을 더해  '제주도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용담동, 주로 한천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들은 이 곳 말고 5기가 더 있다.
특히 제주국제공항 주차장 너머 동쪽에도 2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원래 '먹돌새기'라는 곳에 있던 것을 활주로가 확장되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 제주국제공항에 있는 고인돌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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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고인돌'에는 그 상석에 둥근 알 모양으로 구멍을 내고 문지르며 기원을 하였다고 알려진 성혈과, 원석을 나무와 물을 써서 쪼개어낸 흔적인 치석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낮은 높이의 굄돌을 써서 상석을 덮은 것으로 위 '사대부고 고인돌'과 달리 주검을 지하에 매장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치석이 보인다
▲ 고인돌 치석이 보인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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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고인돌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찾아나서 볼 일이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돌아갈 때이다. 잘 가꾸어 놓은 뜰을 여유로이 거닐다가 한 켠에 둥글게 늘어서 있는 동자석들을 발견하였다. 이 곳 학생들이 미술 시간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데, 내 눈엔 앞선 과거 어느 때에 이곳을 무대로 숨쉬었던 인간과 신들에게 건내는 후손의 작은 선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풋풋한 감성이 묻어나는 학생들의 작품이다.
▲ 동자석들 풋풋한 감성이 묻어나는 학생들의 작품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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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주, #궁당,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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