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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도덕적 명령(moral imperative)이 나이브했던

.. 오늘날에는 10년 전의 그러한 도덕적 명령(moral imperative)이 나이브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  <이반 일리히/박홍규 옮김-그림자 노동>(분도출판사,1988) 23쪽

"10년(年) 전(前)의 그러한 도덕적 명령"이란 무엇을 말할까 생각해 봅니다. "열 해쯤 앞서 나온 도덕 명령"이라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도덕 명령"은 또 무엇일는지 궁금합니다. 옮긴이는 '도덕적 명령'이라고 적은 다음 묶음표를 치고 영어를 덧붙입니다. 아무래도 '도덕적 명령'이라고만 적으면 알아보기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면 'moral imperative'는 얼마나 알아보기에 나은 말일는지요? 이러한 글씀씀이가 이 글을 읽는 사람한테 도움이 될까요? 옮긴이가 번역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숨기고자 영어를 덧달아 놓은 셈은 아닐는지요? 그런데 이 글에서는 '도덕적 명령(moral imperative)' 뒤에 잇달아 나오는 '나이브' 때문에 더욱 알아보기 힘듭니다.

 ┌ 나이브하다(naive-) : 소박하고 천진하다
 ├ naive
 │  1a <사람이> 순진한, 소박한, 천진난만한, 숫된
 │   b (특히 젊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단순한, 고지식한
 │   c 믿기 쉬운, 속기 쉬운
 │  2【미술】 소박한, 원시적인
 │  3 (특정 분야에) 경험이 없는;선입적 지식이 없는
 │  4 <동물 등이> 실험[투약]을 당하지 않은
 │
 ├ 나이브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 순진했구나 싶다
 │→ 어렸다고 보인다
 │→ 철없었다고 느낀다
 │→ 우스워 보인다
 │→ 어리석었다고 본다
 │→ 바보스럽다고 느낀다
 └ …

꾸밈없는 마음을 한자말로 옮겨 '순진(純眞)'으로 적습니다. '나이브'라는 영어는 '소박'하면서 '순진'한 모습을 가리킨다는데, 우리들이 쓰는 '나이브하다'는 이런 뜻을 나타내는 자리에 쓰이지 않느냐 싶습니다.

인터넷에서 '나이브'라는 낱말을 넣고 찾아보기를 합니다. "나이브한 이상주의 컴플렉스", "나이브 아트", "나이브 베이시스", "단 2번의 인터뷰로 한 사람을 파악하려는 기자가 '나이브'한 것일 수 있으나", "나이브하고 돌발행동을 잘하는 아이",  "나이브한 인식구조", "박 전 대표가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니냐", "한국은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전략도 전술도 없다" 같은 말이 보입니다.

여러 가지 쓰임새를 뽑아 보지만,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나이브'가 또렷하게 어떤 뜻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느긋'하다? '느슨'하다? '부드럽'다? '얽매이지 않'다? '자유롭'다? 글쎄요.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 '나이브'인가요? 말하는 사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고 있는 '나이브'인지요?

어쩌면, '나이브'라는 말을 쓰는 분들은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대로 모르는 채 이 낱말 느낌이 좋아서 쓰는지 모릅니다. 말뜻은 모르면서 말느낌은 엉뚱하게 짚으며 아무 자리에나 마구 쓰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들온말로 받아들여 쓸 만한 영어인가 아닌가를 살피기 앞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내세운다든지 겉멋을 뽐내려고 끌어들이는 장난스러운 말마디가 아니랴 싶습니다.

말뜻 그대로라면 '소박'이나 '순진'이나 '천진난만'이라는 '나이브'는 '해맑은'이나 '티없는'으로 적바림해야 알맞습니다. 착하거나 맑거나 티없는 사람은 때때로 '고지식하'거나 '어리석'은 짓에 휘말려들곤 하니 '철없다-바보스럽다-꾸밈없다' 같은 낱말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를 찬찬히 살펴 이때에 알맞게 말해야 하고, 곳을 곰곰이 헤아려 이곳에 걸맞게 글써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때에는 이 말이 어울리고 이곳에는 이 글이 들어맞습니다. 토박이말이든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떠나, 옳고 바르게 말하고 글써야 합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말을 더 좋아해서 더 즐겨서 쓴다고 하든, 제자리에 제뜻을 살려 제대로 넣어야 합니다.

철딱서니없는 말이 아닌 철든 말을 해야겠습니다. 철부지 말이 아닌 철있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생각있는 말, 생각하는 말, 생각을 고이 담고 나누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ㄴ. 나이브naive한 사고

..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브naive한 사고를 가진 그들은 영화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바수밀다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  <김석원-영화가 사랑한 사진>(아트북스,2005) 69쪽

"세상 물정(物情)을 모르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물정(物情)'이란 "세상의 이러저러한 실정이나 형편"을 가리키니 겹말인 셈입니다. "세상을 모르는"이나 "물정을 모르는"이라고만 적어야 한결 낫습니다. "사고(思考)를 가진"은 "생각을 하는"으로 다듬는데, 이 자리에서는 "-하게 생각하며 사는"이나 "-하게 살아가는"으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원조교제를 하는 행위(行爲)를 정당화(正當化)하면서"는 "원조교제를 정당하다고 내세우면서"나 "원조교제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면서"로 손보고, "그랬던 것처럼"은 "그랬듯이"로 손봅니다. '체험(體驗)하고'는 '하고'로 손질하거나, "성행위(性行爲)를 체험하고"를 "살을 섞고"나 "몸을 섞고"로 손질해 줍니다. "그 속에서"는 "그러면서"로 고쳐쓰는데, 앞말과 묶어 "살을 섞으면서"나 "몸을 섞는 가운데"로 고쳐써도 됩니다. "자신(自身)의 정체성(正體性)을"은 "제 모습을"이나 "제 참모습을"이나 "내가 누구인가를"로 고쳐 줍니다.

 ┌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브naive한 사고를 가진
 │
 │→ 세상을 모르는 물렁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처럼 살아가는
 │→ 세상을 모르는 바보 같은
 └ …

세상을 모르는 생각이라 한다면 말 그대로 '세상 모르는 생각'일 터이니, 이 보기글에서는 "세상을 모르는 생각인 그들은"으로 손보거나 "세상을 모르는 그들은"처럼 적으면 됩니다. 보기글을 가만히 되읽어 보니, 이렇게 단출하게 적으면 한결 낫구나 싶습니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그들은 영화에서 원조교제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면서, 바수밀다가 그랬듯이 다른 남자와 살을 섞으면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 간다"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굳이 이 보기글처럼 말을 길게 늘어뜨릴 까닭이 없습니다. 갖가지 꾸밈말을 끼워넣지 않아도 됩니다.

손쉽게 적으면 됩니다. 말하는 사람부터 손쉽게 말하고, 듣는 사람 누구나 손쉽게 들을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괜한 말치레는 걷어치우며, 빛나는 알맹이를 환하게 밝혀 주면 좋습니다.

 ┌ 세상을 모르고 생각이 어린
 ├ 세상을 모르며 생각이 얕은
 ├ 세상을 모르며 생각이 어줍잖은
 └ …

꼭 어떤 꾸밈말을 넣어야겠다면, 어떠한 꾸밈말이 알맞을까를 깊이 살펴보고 널리 헤아려 봅니다. 어줍잖게 영어 나부랭이를 늘어놓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생각이라 한다니, 철없거나 철부지 같은 생각일 텐데, 이런 생각은 참 물렁물렁합니다. 아직 단단히 여물지 않았기에 세상을 모를 뿐 아니라, 아직 배우고 받아들일 이야기가 많기에 말랑말랑 물렁물렁 하다고 할 테지요.

한 마디로 하자면 "생각이 어립"니다. "생각이 얕"아요. "생각이 모자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없"다고 해 볼 수 있겠지요. 또는 "생각을 잃"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스스로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기보다 어른들 때문에 생각을 버리거나 빼앗기거나 놓친 셈이기도 하니까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영어, #외국어,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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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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