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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남편과 함께 강릉을 거쳐 주문진항을 돌아볼 일이 생겼다.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예약하려는데 뉴스에서 강원도 대설주의보를 전한다. 시간에 쫓기는 일이 아니었지만 길에서 눈과 씨름할 일도 은근히 걱정 되었고, 명절 귀성교통지옥에서 막 빠져나온 시간이었기에 다시 길에 갇히기 싫었다. 이참에 기차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기차로 강릉을 가려면 중앙, 태백, 영동선을 잇는 기차를 타야 한다. 강릉 가는 무궁화호는 대략 6시간 20분이 걸린다. 긴 시간이다. 봄방학으로 집에 있던 큰 딸도 데리고 나섰다. 짐은 신문과 책, 카메라가 전부다. 버스는 멀미를 해서 차안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등을 의자에 꼿꼿이 기댄 채 '꼼짝마'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차에서는 멀미를 하지 않아 그 긴 시간을 잠도 자고 책도 보고, 풍경도 구경할 생각에 차를 타기 전부터 설렜다. 고속버스에서는 느끼지 못할 여유다. 기차를 타고 보니 열차카페 차량도 있다. 목적지에 닿아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열차카페조차도 낭만을 느끼게 했다.

 

청량리를 출발한 기차는 경기도 양평 일대에 있는 역을 군데군데 들르고 강원도 원주 방향으로 향하다가 충북 제천시로 넘어가 그곳에 걸쳐 있는 몇 개의 역을 정류하고서 다시 강원도 영월로 접어들었다.

 

강원도 원주역과 신림역을 지날 때 가끔 햇볕 속에서 뿌리던 눈은 충북지역을 지날 때는 오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군에 속해 있는 자미원역을 지나면서부터는 눈이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강원도 산천은 아직도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낮게 드리워 맞대고 있는 농가의 지붕들은 하얀 광목천을 펄럭이고 있는 듯했다. 가파른 산악지대를 오르던 기차는 가끔 "부우" 소리를 힘겹게 내면서, 달리는 차안에서 창밖의 산천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 만치의 속도로 달렸다.

 

딸이 "이상해라, 이 기차는 왜 경적을 울릴까? 요즘도 이렇게 경적을 울리는 기차가 있나보네" 한다. 평지를 달릴 때도 소리를 냈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그리고 높은 산악지대를 오르는 중에 기차의 속도가 '느려졌다'를 느끼며 창밖으로 내다본 철로 아래는 벼랑이었다. 기차가 철로에 기대어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외로움'이 '느려졌다'와 동의어가 되어 가는 어느 순간부터 기차의 경적소리가 귀로 확 달려든 것이다. 산 속의 나무들은 키를 가늠하기 어렵도록 눈 속에 파묻혔고, 여전히 내리는 눈으로 나뭇가지들은 온통 눈꽃을 달고 있었다.

 

산악지대를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딸에게 40년도 넘은 옛이야기를 했다. 강릉에서 서울로 오는 밤기차 속에서 새벽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던 시간까지 '샛노란' 맹물을 토해냈던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기차의 속도는 느렸고, 선반마다에 보따리 보따리 올려놓은 사람들로 붐볐고, 기차는 연신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친정엄마의 고향은 강원도 퇴곡이다. 친정 아버지는 고향이 서울이었기에 결혼 후 친정엄마는 서울살이를 하셨고, 그 고달픔에 당시 네 살이었던 나를 당신의 친정 아버지가 올라 오셨을 때 그 분의 등에 업혀서 시골로 보냈다. 그리고 후딱 시간이 가버렸고, 친정 엄마는 내가 여덟 살 때 오셨다.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밤에 탔던 기차가 바로 이 노선이었다. 정들었던 외조부모님과의 이별에 대한 충격과 낯선 땅에서 견뎌야 할 어떤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밤새도록 '똥물'까지 게워내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이후로는 기차멀미가 없었다.

 

12시 50분쯤에 '민둥산'역을 지난다. 이 역은 원래 '증산'역이었지만 근처에 민둥산이 있어서 역명을 바꾸었다는데 산이 겹겹으로 기찻길을 에워싸고 있는 듯하다. 사북과 고한역은 번화했다. 바로 강원랜드와 스키장과 같은 위락시설 단지가 있는 곳이다. 기차는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을 달리다가 어느 순간 첩첩 깊은 산 중으로 들어와 '부우'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듯했고, 시시때때로 굴도 지났다. 젊은 딸은 지루하다고 했지만 중년의 남편과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졸다가 책보다가 바깥 풍경에 입 벌리다가 옛날이야기도 하고 열차카페도 들락거렸다.

 

추전역을 지나는데 함박눈으로 변한 눈이 추전역의 고지를 알리는 돌표지석에 소복이 내려앉는다. 추전역은 역 중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눈꽃열차를 이용하면 이곳에 내려서 관광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탄 차는 표지석의 '해발 855M'의 숫자만 눈에 들어오게 하고 슬그머니 지나친다.

 

태백역에 잠시 머무른 기차는 흥전역 즈음에서 안내방송을 한다. 간간히 들려오는 방송 소리를 종합해 보니 "약 4분간 기차가 뒤로 운행할 텐데 이것은 정상 운행이니 안심하라"는 것이다. 조금 있다 보니 정말 역방향으로 운행을 한다. 어떤 정보도 없이 전혀 예상 밖의 일이라서 신기했다. 지나가는 역무원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 스위치백 구간 흥전역에서 기차가 약 4분간 후진하는 모습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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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백 구간이라고 합니다. 흥전역에서 나한정역으로 가려면 높은 산악지대에 절벽이  있어 전진을 할 수 없기에 다시 후진 후에 앞으로 나아가는 지그재그 형식으로 선로가 놓여 있습니다."

 

역에서 내려 기차가 후진하는 모양을 볼 수 있다면 확실히 감을 잡겠지만 그냥 스쳐지나가는 역이기에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무튼지 역무원이 손가락 그림으로 알려주는 것을 보면 흥전-나한정역의 위치는 일직선이 아니라 Z형이다.

 

동해역을 지나면서부터 오른쪽으로 끝없어 보이는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하늘의 눈과 바다의 파도가 서로 만나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 듯한다. 청량리역에서부터 옆자리에 앉아있던 젊은 남녀는 정동진역에서 내렸다. 바다는 종착지인 강릉역까지 기차와 나란히 경주를 하며 우리의 시야에 머물렀다.

 

강릉역에서 시내버스로 주문진항을 가는데 눈이 쏟아지는 고개고개를 넘어 한 시간이나 걸렸다. 버스 안에서 가끔 '~하드래요'하는 사람들의 말투가 정겹게 들린다. 내리는 눈은 지붕과 길에 수북이 쌓여갔지만, 입춘이 지난 날씨는 제설작업을 하지 않아도 도로의 눈을 저절로 녹이고 있었고, 지붕의 눈도 긴 고드름을 만들면서 녹고 있었다.

 

 

돌아올 때는 "오늘 안으로 집에 갈 수는 있는 거야?"하는 딸을 생각해서 고속버스를 택했다. 기차의 절반 시간이다. 터미널에 붙어있던 주문진 일대를 보여주는 지도 속에서 그 어떤 지역보다 크게 보였던 '퇴곡초등학교'. 40여 년 전 잠깐 머물렀던 추억을 곱씹으면서 천천히 시간을 눅인 기차여행길에 만난 풍경은 빠름을 잠시 잊게 해준 고마운 느낌으로 한 켜의 시간을 또 쌓게 했다.


태그:#기차여행, #강릉, #주문진, #추전, #스위치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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