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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지난 2000년 2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시민참여저널리즘의 새 장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매년 시민들과 함께 한 참여민주주의의 현장 속에서 의미있는 뉴스의 인물들을 찾아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해왔습니다. 그들의 면면이 바로 <오마이뉴스>가 만들어낸 지난 10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에, [창간 10돌 기념] '올해의 인물, 그 후'를 조망하는 연속 기획기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전북 군산시 버스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군산산업단지 방향으로 약 10킬로미터를 달리면 옥구저수지를 만난다. 다시 저수지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1킬로미터를 채 못 간 작은 산기슭에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 산을 오르면 군산 미군기지가 내려다보인다.

군산시 옥서면 옥봉리 176-1. 평화유랑단 단장인 문정현 신부가 인혁당 사건 당시 다친 무릎 부상에 대한 민주화보상금 5500만원을 들여 산 집이다. 지난 2008년 1월 전북 익산에 있는 지적장애인 시설 '작은 자매의 집' 원장직을 은퇴한 뒤 그는 이곳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가 1997년 처음으로 미군기지반대운동을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000년 매향리 미군사격장 폐쇄투쟁의 한복판에 있던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관련기사 "그의 뉴스는 땀 찌들고 피가 튀었다" )

설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 11일 오후 그의 집을 찾았다.

"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싸워야 해"

 "그의 뉴스는 땀 찌들고 피가 튀었다"... <오마이뉴스>는 2000년 '올해의 인물'로 문정현 신부를 선정했다. 문 신부가 당시 수상했던 '올해의 인물' 기념액자는 9년이 지난 지금도 문 신부의 책상 바로 앞에 놓여져있다. 지난 11일 문 신부는 액자를 들어보이며 "그 때 모두들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했었는데..."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뉴스는 땀 찌들고 피가 튀었다"... <오마이뉴스>는 2000년 '올해의 인물'로 문정현 신부를 선정했다. 문 신부가 당시 수상했던 '올해의 인물' 기념액자는 9년이 지난 지금도 문 신부의 책상 바로 앞에 놓여져있다. 지난 11일 문 신부는 액자를 들어보이며 "그 때 모두들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했었는데..."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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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갈색(문 신부는 전화로 '분홍색'이라고 했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에 봉고차를 개조해 만든 평화유랑단의 '꽃마차'가 지친 육신을 누인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2003년 말 '효순·미선이 투쟁'을 끝낸 뒤, 문 신부가 평화운동 단체인 '평화바람'을 만들어 유랑 길에 오를 때부터, 꽃마차는 그의 분신이 됐다.

서울 시내에서 이라크 침공 반대를 외쳤고, 노동자·빈민들의 처절한 삶을 어루만지며 환경 파괴의 현장이라면 전국 어느 곳이든 찾아갔다. 평택 대추리에서는 2년 반을 살면서 미군으로부터 주민들의 땅을 지키는 운동을 벌였다. 꽃마차에 대추리의 평화로운 들판이 그려진 것도 이 때다.

며칠 전 만해도 꽃마차는 용산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옆에 경찰 버스와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지난해 3월부터니까, 거의 10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용산참사 현장을 떠나야 할 때, 사람들은 이 '똥차'가 움직이기는 하겠느냐며 넘겨짚었다. 하지만 꽃마차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본거지로 돌아왔다.

꽃마차 앞에 널브러져 있던 평화바람의 막내 '초롱이'는 낯선 방문객이 못마땅한지, 아까부터 사납게 짖어대고 있다. 용산에 있던 문 신부가 "가끔 목욕을 시켜줘야 하는데"라며 사람보다도 더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놈이다.

초롱이를 뒤로 한 채 집안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열자, 자리에 앉아있던 문 신부가 힘겹게 일어나 손을 덥석 잡는다. 막 외출하고 돌아와 회색 운동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문 신부는 얼핏 봐서도 아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몸살이란다.

"용산에서 진을 다 뺀 것 같아."

그가 자리에 앉으며 탄식처럼 토해낸 말이다. 공권력의 횡포로부터 유족들과 세입자들을 지켜내기 위해 목이 터져라 고함치고, 몸부림치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사제들이 땅바닥에 내동이쳐지고, 옷이 찢겨져 나가고, 헤드록(프로 레슬링에서 상대의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죄는 기술)을 당하고……. 온통 멍투성이인 몸은 파스로 도배가 됐다. 그는 "지옥에서 막 빠져 나왔다"는 말도 했다. 

그에게 용산은 '불통과 생지옥'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칼춤을 추는 자본의 굴착기 앞에 무릎 꿇고 목 내어놓아야 하는 지옥은 용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은 떠나와 있지만, 그가 여전히 용산을 생각하며 몸서리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대추리 투쟁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음을 잡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보면 이 사회가 별로 희망이 없어. 협상을 해서 유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고 세입자들이 보상을 받았다고 하지만, 용산 문제를 해결했을 뿐 용산처럼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거야. 서울뿐만 아니라 대도시 도처에서 작은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있다니까.

용산에서 나올 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 근본적인 문제를 놓아둔 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데……. 우리가 용산에서 철수하면 금방 굴착기 건설 장비 소리가 요란하게 날 텐데…….  그렇다고 유족이나 세입자들과 근본적인 문제를 걸고 함께 싸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야."

"그냥 거기서 먹고 자고 하겠다는 마음을 처음부터 먹고 간" 게 10개월이다. 사실 그도 그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단다. 그가 싸우는 방식이다. 매향리가 그랬고, 대추리가 그랬다.

"그렇게 몸을 댈 수밖에 없는 게, 행사나 기자회견장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더라고. 용산도 (기자회견이나 집회 참석 등을 위해) 왔다 갔다 했으면 일찌감치 상황이 끝났을 거야. 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싸워야 해."

"4대강을 봐, 국민을 무시하고 있잖아"

 문정현 신부는 11일 "이명박 정권이 독재 정권 흉내를 내는데, 지금 30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과소평가 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문정현 신부는 11일 "이명박 정권이 독재 정권 흉내를 내는데, 지금 30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과소평가 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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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긴 싸움이었기에, 돌아오면 다만 얼마만이라도 휴식을 취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다음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질곡에 찬 이 사회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셈이다. 그는 "사제단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사안이 너무 많다"며 "특히 4대강 사업 문제는 많은 신부들이 함께 하고 있지만, 여차하면 나도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용산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음 현장을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시동 걸릴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지. 용산은 내가 시발이 됐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게 되지는 않아. 내가 용산에 들어가니까, 천주교 서울교구가 들어오고, 오체투지가 들어오고, (전국의) 사제단들이 들어오고……. 그런데 매사가 그렇지 않아. 4대강은 각 교구별로 특별히 관심을 두는 신부님이 여럿 있지. 그것을 엮어내고 무르익어서 시동이 걸리면 당연히 가야지. 가야 할 곳은 당연히 가야지."

- 이명박 대통령이 강한 의욕을 가지고 4대강 사업 등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막을 수 있을까?
"영원한 정권은 없어. 유보 없이 물러서지 말고 계속 표현을 해야 해. 이명박 정권이 독재 정권 흉내를 내는데, 지금 30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과소평가 하고 있어. 우리 민중들은 엄청나게 성장했어. (정권이) 칼을 뽑으니까, 물러나는 것 같고, 잠잠한 것 같지. 칼이라는 것은 뺐으면 베든가, 처지게 돼 있어. 칼 든 팔이 처지는 날엔 걷잡을 수 없게 되지.

그동안 겨울 공화국 깨고, 민주화 이루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것을 과소평가해서 옛날 3공, 5공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야. 4대강을 봐.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잖아. 국민을 무시하고 3공, 5공으로 회귀하려고 한다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야. 예를 들어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이라도 하나 뺏긴다면 저 정권은 더 이상 유지를 못 해. 선거는 내 손을 떠난 문제이지만……."

지난해 12월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출범한 천주교연대는 3월부터 전국적 규모의 기도회와 미사를 계획하고 있다. 4대강이 흐르는 지역의 각 교구는 권역별로 강과 함께 하는 순회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이들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제작, 전국 성당에 게재하는 '현수막 게재 운동'과 함께 '4대강 기도 순례', '4대강을 살리기 위한 기도문' 등을 통해 4대강 사업의 부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려나갈 예정이다.

천주교연대는 지난 11일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통해 "4대강 사업은 향후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금석"이라며 "우리 사회가 맘몬의 성채, 탐욕의 망루만을 높이 세우며, 무죄한 이들과 빈곤한 이들을 거침없이 팔아넘기는 폭력과 억압의 사회로 갈 것인지를 가늠하는 잣대"라고 말했다. 

문 신부가 가야 할 곳은 비단 4대강 공사 현장만이 아니다. 그는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 기륭전자, 콜텍 등도 가서 몸이라도 대야 하는데, 가지 못해서 마음이 참 아프다"고 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도 그가 마음에 걸려하는 곳 중 하나다. 그는 지난 3일 동생 문규현 신부와 40년 만에 떠난 제주도 여행 중에도, 강정마을을 잊지 않고 방문했다.

- 문 신부가 하는 운동의 정체성, 혹은 방향성은 무엇인가?
"1973년 이후에 운동을 놓아본 적은 없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지. 물론 성직자로서 한계도 있어. 그러나 항시 밑바닥에 처져있는 사람들과 머물러 있는, 그래서 그것을 '남은 자'라고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힘을 키워서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몸 대주고, 마음 대주고 하는 게 전부야. 관변으로부터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관과의 관계, 정치적인 관계, 이런 곳은 철저하게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 난 강도 만난 사람 찾아가서 위로하고 치유하고 함께하는 것에 전문가야. 그게 내 자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지."

"나이 드는 나... 세상은 그렇게 절망스럽지 않아"

 문정현 신부는 11일 "항상 길 위에 살아야지. 억압받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야"라고 말했다.
 문정현 신부는 11일 "항상 길 위에 살아야지. 억압받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야"라고 말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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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신부'라는 필명 외에도 그에게는 '깡패 신부', '노동자의 아버지' 등 다양한 별칭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는 '깡패 신부'라는 표현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가 '고난의 길'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지켜줬던 근간이기 때문이다.

- '길위의 신부'라는 별칭도 있지만, '깡패 신부'라는 별칭도 있다. 싫지 않나?
"성서로 보면, 예수님도 노상 길 위에 살았어. 내가 얼마 살지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길위의 신부'로 살아야겠다는 것이 내 모토야. 다른 별칭이 많은데, 어떤 별칭보다 이 게 좋아. 항상 길 위에 살아야지. 억압받고,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야. 이 별칭은 하루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니야. 73년 이후 항상 유보(타협)가 없었고, 항상 길 위에서 살아왔어.

경찰이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고 하는데, 어디서 어디까지가 경찰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개인인가? 경찰로서 인격을 얘기해야지, 처와 자식이 있다고 그 자체로 존경을 받나? 경찰로서 못된 짓을 하고 폭력적이고 불법적으로 하는데, 존경을 받아? 난 그렇게 타협이 없었기 때문에 '깡패'라는 말을 듣는데, 그래도 절대 타협할 수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고.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 됐을 거야.'

"'투사 문정현'이 타협하지 않았다면, '인간 문정현'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내가 눈물이 많아"라는 말로 짧게 답했다. 그가 부쩍 눈물이 많아진 건 그의 육체 나이와도 무관치 않다. 워낙 강골이지만 올해 칠순을 넘긴 그도 세월은 어찌 할 수 없는 노릇. 그가 가장 먼저 느끼고 있었다. 지난 2004년 7월 그가 홈페이지에 남긴 '나이 드는 나'라는 제목의 시다.

"집에 들어앉아 쉬라한다. // 그루터기의 새싹/불꽃같은/젊음이 보인다 // 불길이 솟아오른다. // 함께 어울려 피는 상처의 꽃잎일지라도/함께 모아 짓이겨진 봉숭아꽃이고 싶다. // 저승길이 따로 없다."

문 신부는 "나이와 관계없이 살아지는 것 같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조금 기가 죽고 위축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아예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다. 계속 움직여야지"라고 웃어보였다.

그에게 '희망'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현장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 속에서 '희망'의 가닥을 찾고 있었다.

"현장에서 노상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내 처지가 가장 낫지. 나는 호화스런 운동가야. 먹고 자고 하는 곳이 확실히 있고, 여비 안 떨어지고……. 그런 활동가가 몇이나 되겠어. 그럼에도 그렇게 현장에서 항상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지.

아마도 이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야. 소수지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에 희망이 있고 고목나무와 같은 사회에서 새싹이 나게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유보 없이 가야 할 때 가서 함께 하는 모습이 있는 한, 세상은 그렇게 절망스럽지 않아. 그런 사람 100명, 아니다. 10명만 있어도, 아니다. 단 1명만 있어도 세상은 새로워 질 거야."

 용산참사 현장에서 돌아온 문정현 신부가 지난 3일 동생 문규현 신부와 함께 40년만에 여행길에 오르면서 평화유랑단 '꽃마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돌아온 문정현 신부가 지난 3일 동생 문규현 신부와 함께 40년만에 여행길에 오르면서 평화유랑단 '꽃마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평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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