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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5년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 매년 나아질 것이 없는 노동자의 삶만큼이나 팍팍한 분위기. 금방이라도 노동해방과 사회혁명을 이뤄낼 것 같은 구호들이 여기 저기 난무하지만, 구호는 그저 구호일 뿐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자 종소리를 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필자의 손이 올라갔다. 나 자신이 팔뚝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1년마다 돌아오는 이 시간은 공장의 기계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듯 흘러가고 있었다.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배우 오세혁씨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배우 오세혁씨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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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엄혹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웃기는 것밖에 못하고요. 고민 끝에, 노동절을 맞이해서 사장들도 데모를 하는 것을 만들었어요. '자본가가 왕이 되는 세상은 언제 오는가!' 막 이러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서서 이윤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거죠. '자본도 부동산도 모조리 남김없이...' 노동절 전야제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우리 공연이 웃기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인터넷 뉴스에도 나오고, 그 다음부터 여기 저기 불려 다니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목말랐던 것 같아요. 그런 집회나 데모에서 웃고 싶은데, 항상 엄숙하니까요."

2005년의 노동절 전야제에서 <신자유를 쏘다>라는 공연으로 메가톤급 웃음보를 터트리며 혜성처럼 등장한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http://www.gulpan.com). 지난 1월 22일,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걸판 연습실에서 연출 및 상임작가 겸 배우인 오세혁씨를 만났다.

"걸판의 장점은 이런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집회에 가면 공연에 필요한 시스템도 없고, 핀 마이크도 없고, 앰프도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보탬이 돼야하니까, 마이크 두 개만 있어도 되는 공연을 만듭니다. 그래서 의상만 들고 가서 공연하는 거죠.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을 흉내 내는 연설극이 그런 예이죠. 이렇게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보니까 부르는 분들도 편하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창작의 유동성과 공연형식의 단출함이 우리의 장점입니다. 서로 없이 사는 것을 확인하는 거죠. 하하하"

공연중인 걸판 멤버들. 김태현 대표(좌)와 오세혁 단원(우)
 공연중인 걸판 멤버들. 김태현 대표(좌)와 오세혁 단원(우)
ⓒ 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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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판이 공연하는 극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오세혁씨는 입담만큼이나 글발도 좋다고 소문이 나 있다. <삶이 보이는 창>이나 <민중의 소리> 같은 매체들에 꾸준히 고정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미국과 맞짱 뜬 나쁜 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쿠바 편을 맡아서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naver.com/osenose)도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도 극단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인 오세혁씨, 그가 문예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출발지는 학교였다.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의 풍물 동아리 '한우리' 출신인 오세혁씨는 같은 동아리 선배인 김태현씨(극단 걸판 대표)와 함께 극단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2005년 3월에 극단 걸판을 창립했다. 2000년에 언론광고사회학부에 입학한 오세혁씨는 풍물패 '한우리'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이야기를 걸판답게 풀어낸다.

"2학년 때 사회학과 전공 수업에 처음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콩트에 대해서 배우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여기 우리가 앉아있는 것이 의자인데, 이것의 본질은 과연 의자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다음 주에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하시데요. 그래서 그 이후로 수업에 안 들어갔죠. 하하하. 동아리 활동 하면서, 풍물치고 연극하고 집회에도 참가했습니다."

오세혁씨가 쿠바 편을 쓴 책 <미국과 맞짱 뜬 나쁜 나라들> 표지
 오세혁씨가 쿠바 편을 쓴 책 <미국과 맞짱 뜬 나쁜 나라들> 표지
ⓒ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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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치적인 얘기를 가장 재미있게 풀어낸다.'
'걸판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

이것은 걸판을 만들면서 세운 원칙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걸판이 다니는 곳들은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 용산 참사의 현장, 쌍용 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현장, 미디어 악법 반대 투쟁의 현장뿐만 아니라 공원, 역전, 회사 식당, 학교, 비닐하우스 등 상상 가능한 모든 곳이다. 엄숙하고 비장하고 가슴 막막한 투쟁의 현장에서,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을 전파하고 있는 걸판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웃음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웃는 이유가, 보통 하는 짓이 웃겨서 웃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모두가 공감하는 본질을 건드렸을 때 웃는 것 같습니다. 저희 공연을 보시는 분들은 그 무슨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겁이 나고 나약해지고 우물쭈물하게 되잖아요. 청소 일을 시작했는데, 잘릴 것 같아서 농성천막을 쳤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이도 50이 넘었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게 되죠. 그럴 때 우리는 '사실 이런(겁 많은) 사람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함께 있잖아요. 조금 더 용기를 내 봅시다'라는 이야기를 웃음을 통해 전달합니다. 이런 웃음을 통해서 조금 더 용기를 내는 거죠."

걸판의 웃음은 '용기'의 웃음이다. 어렵고 힘들고 길이 막혀서 좌절할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용기를 일으키는 웃음 말이다. 노동자와 서민이 웃을 일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웃음보를 들었다 놨다 하며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걸판의 활동은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소위 배고픈 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런 활동을 지속하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세혁씨에게 물어 보았다.

"당진에서 여성의 날 행사를 했을 때의 일인데요. <열녀열전>이라는 여성 마당극을 공연했습니다.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내용이 나오는데요. 공연을 끝내고 대기실에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시면서 공연 잘 봤다고 커피 사 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희는 당황해서 사양을 했죠. 그런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말없이 만 원을 쥐어주시고 대기실 밖으로 뛰어나가셨어요. 걸판 대표님이 급히 아주머니를 따라서 나가셨죠. 돌아와서 대표님이 아주머니의 얘기를 들려주셨죠. '… 내가 노동자라 그래요.' 이렇게 말씀하셨다더군요. 그 아주머니는 청소 노동자이신데 그날 우리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으셔서 찾아오신 거였어요. 커피 한 잔이라도 사 주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대기실로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얘기를 다룬 <그와 그녀의 옷장>을 공연하면서 비정규직 투쟁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힘이 나고 보람이 느껴졌다고 한다. 이것이 오세혁씨가 힘들더라도 걸판 활동을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다.

"사랑얘기나 부부갈등, 아니면 아동극만 해도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수 있겠죠. 아니면 곧바로 대학로에 진출해서 코미디극을 할 수도 있겠고요. 자신은 있거든요. 사실 제안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우리가 걸판을 만든 목적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공연 중인 걸판의 모습. 맨 오른쪽이 오세혁씨.
 공연 중인 걸판의 모습. 맨 오른쪽이 오세혁씨.
ⓒ 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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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걸판은 이미 운동판(?)에서는 탄탄하게 입지를 굳힌 극단이다. 집회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걸판의 공연을 여러 번 접했을 것이다. 심지어 집회를 감시(?)하기 위해 온 정보과 형사도 걸판을 알아보고 '안산에서 또 웃기려고 오셨나?'라고 말을 걸 정도니 말이다. 나중에 이 정보과 형사는 구석에서 공연을 보면서 혼자 배꼽을 잡고 있더란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걸판은 다양한 아이디어로 2010년을 준비하고 있다.

"더 많은 대중들을 만나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방송국과 제휴를 통해 옛날 콩트 식으로, 예를 들어 <네로25시>같은 식으로 시사만평을 하는 고정 콘텐츠를 제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0년의 어느 날, 걸판이 만든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다면 분명 그 날은 온 국민이 '용기'를 낼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다. 걸판이 전하는 웃음으로 이미 '용기'를 얻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바로 산 증인들이니 말이다. 우리가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웃음으로 용기를 전달하는 극단 걸판과 오세혁씨에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주변 분들중에 단순히 취업준비와 스펙쌓기를 넘어서 도전적인 삶으로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20대 30대의 청년이 있다면 이메일 reltih@nate.com 로 추천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그:#걸판,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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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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