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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분을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1985년 봄쯤이었는데 경남 진주 어느 교회에서였다. 그 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여든 다섯 몸으로 역사와 민중을 향한 열정만을 읽을 수 있었다.

 

씨알 함석헌 선생. 그가  오늘(4일)로 21년이 되었다. 오래 전 읽었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다시 들었다. 이 책은 선생께서 1934-35년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과 해방 이후 쓴 글을 묶은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역사를 전공한 분도 아니다. 하지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우리 역사에 대한 통사(通史)다. 그리고 단순히 '역사'만 아니라 '사상'이 혼합된 사상사에 가깝다.

 

그가 <성서조선>에 연재할 당시는 일제식민지였다. 그러니 조선 역사에 대해 글을 쓴 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일제의 강압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자료와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가 없었지만 그는 머리와 가슴으로 씨름하면서 글을 섰다고 했다.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지,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인 오지이지,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출판사리뷰)

 

가슴과 머리로 씨름하여 준비한 내용을 강연하고, 글로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 선생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 우리 민족을 '수난의 여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난은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무기력하게 고난 앞에 패배자로 남을 것이 아니라 이겨내 보다 높은 차원을 나아가 역사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난은 인생을 심화한다. 고난을 역사를 정화한다. 평면적이던 호호야(好好爺)도 이를 통하고 나면 입체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고, 더럽던 압박과 싸움의 역사도 눈물을 통하여 볼 때는 선으로 가는 힘씀이 아닌 것이 없다. 중국의 교만, 만주의 사나움, 일본의 영악, 러시아의 음흉이 다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면 언제 망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요, 살고자 함은 살아 있기 때문이요. 살아 있음은 살려 주시기 때문이다. 살려 두시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증거다. 우리의 맡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고난의 초달(楚撻)을 견디어야 한다.

 

우리가 고난과 수난 앞에 패배자가 아니라 고난이라는 회초리를 이기고 남아가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한 역사가 우리 앞에 있지만 역사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실패한 역사를 이겨내게 되면 역사는 무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는 허다한 실패가 있다. 실패가 허다하다기보다는 잘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저 실패로 그치는 실패는 아니다. 영원한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잘못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기 위하여 늘 다시 힘쓸 의무가 남아 있다. 다시 함이 삶이요, 역사요, 뜻이다. 열번 넘어지면 넘어지는 순간 열한번째로 일어나야 하는 책임이 이미 짊어지워진 것이다

 

그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식민지배를 당한 지 25년이 지나고 있었다. 25년이면 패배주의가 그들을 지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말한다.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는다고. 실패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자에게 역사는 주어진다고. 열번 넘어지면 열한번째 일어나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식민지 인민을 향한 그의 부르짖음은 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 울림이 지금도 우리를 향하고 있다. 역사를 책임지는 것, 바로 그것은 인민인 우리가 감당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역사라지만 그 역사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 없는 고난은 무엇이냐? 사실은의미 없이는 고난 조차도 없다. 죽음 뿐이지. 그러나 의미는 어디서 오나? 의미는 전체에 있다. 전체는 명한 것이다. 그 명은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사명 없이도 하는 고난, 그것이 바위가 무너짐이요. 중생이 넘어짐이다. 그러므로 사명하는 자각이야말로 재생의 원동력이다. 거의 쇠망하도록 자친 민족일수록 세계적 사명을 자각시킬 필요가 있다. 쇠망은 결국 정신적 쇠망이요, 정신은 결국 명이다.

 

우리가 주인이라고 한다. 인민이 주인요. 인민이 주인이라는 역사 의식을 가질 때만에 역사를 말할 수 있노라고 한다. 그런데 함석헌에게 '고난'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고난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이 남긴 업적이 아니라 그들이 양심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업적에 매몰되지 말고, 그들은 가졌던 양심 곧, 자유하는 정신을 가졌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함석헌의 시각이다.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 이 하나밖에 없다. 이 마음이 자유하는 마음, 자유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제라도 해야 된다. 이제라도 우리가 하려면 될 수 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빈 소리 하지 말고 공상하지 마라. 우리가 받은 유일한 역사적 유산은 이것뿐이다. 사실 어느 나라 무슨 문화도 복잡한 듯하지만 들추고 보면 수북한 껍질뿐이요, 마지막에 정말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유하는 정신.

 

자유하는 정신을 가졌는가 당신은. 함석헌 다른 책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역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이라야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자유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는 사람, 자유하는 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역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씨알은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소리를 내야 씨알이라고 했다. 속에 알이드는 것은 싹이 트기 위해서였다. 자기가 죽고 못하거든 여러분이 내라,  천천만만으로 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 자유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역사를 향해 말해야 한다. 그것이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사람들에게 던진 뜻이다.

이제는 민주주의 시대다. 대중이 스스로 하기로 깨는 시대다. 집권자가 잘하면 좋겠지만 못하는 경우는 민중 스스로가 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면 해야 할 의무가 분명해질 것이요. 하자는 의지를 발동시키면 할 수 있는 높고 거룩한 사명이 저 위에서 손짓해 부르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 의무가 분명해지고 그 사명이 빛나게 되면 그 신념이 한층 더 높아지고 더 굳어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지음 ㅣ 한길사 펴냄 


뜻으로 본 한국역사 - 함석헌저작집 30

함석헌 지음, 한길사(2009)


태그:#함석헌, #한국역사,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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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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