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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남일당 앞에서 용산 참사의 부당함을 깜작 사진전으로 알리고 있다.
▲ 남일당 앞 깜작 사진전 청년들이 남일당 앞에서 용산 참사의 부당함을 깜작 사진전으로 알리고 있다.
ⓒ 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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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3시,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용산 범대위 주관으로 용산 참사 1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추모제가 열렸다. 오연호 기자 만들기 32기 수료 후 오마이뉴스 초단기 5일 인턴 수업을 받고 있는 나는 취재를 위해 남일당을 방문하였다.

용산 참사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 출판 기념식이 열렸고, 이어서 여러 문화 공연들이 진행되었다. 오늘 공연을 하기 위해 멀리서 오신 분도 많았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예술인들이 이곳을 지키거나 이날 용산을 방문한 사람들을 때로는 즐거울 수 있게 때로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공연을 펼쳤다.  문규현, 문정현 신부님이 살던 방에서는 이동수 만화가께서 방문하는 이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 주고 있었다. 이동수 만화가는 예전부터 여기서 캐리커처를 그려줬다고 한다.

나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진도 찍고 누가 어떤 공연을 하는지 메모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곳을 취재하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사람들이 불타죽고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 인터넷으로 중계된 용산 참사는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수구를 싫어하지만 운동권이 썩 내키는 편도 아니어서 '머리로 만 나름 진보'인 나를 처음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친구도 안 데리고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시위를 나가고 참사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몇 번뿐이었다. 그 때 나는 학자의 꿈을 접고 대학원을 떠난 상태였는데 내 미래만을 고민하기에도 벅차다고 생각했다. 용산 관련 시위에 관한 사람들의 열기가 식어감에 따라 어느덧 용산 문제는 뉴스로 몇 번은 보지만 내게서 잊혀진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내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존심에 '나는 저런 건 할 수 없어'하는 건 많고 실패도 도전도 하기는 싫어하는 전형적인 슬럼프에 빠진 88만원 세대 백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방황하는 시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몇 가지를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오연호 기자 만들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만들기 이후 5일 인턴 3일차에 다시 용산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 취재를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경력이 없으니 현장에서 겉도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날은 겉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있고 아줌마 아저씨들끼리 농담도 주고받고 그런다. 기자들도 어느 정도 여기를 방문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하는 사람인 줄 잘 알고 찾아가는 것 같다. 이곳은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기자가 아니라 전학생이 된 기분이다. 아무나 붙잡고 여기서 무엇을 돕고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돕고 있느냐, 느낌이 어떠냐고 물으려고 하면 속으로 '야 이 자식아, 넌 여태껏 뭐 했느냐?'고 할 것 같았다. 물어도 다른 지역에서 재개발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많아서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여기서 단순한 나열 이외의 무엇을 취재할 수 있을까 다른 기자들이 못 보는 걸 찾아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인터넷 사전 취재로는 매스컴에 잘 나오지도 않는 이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여기서 뭘 하는지 세세히 알기가 힘들다. 오랫동안 방문하고 쌓은 인간관계가 없으면 피상적인 취재 이외에는 할 수가 없어 보였다.

물으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니 참으로 많은 이들이 유가족들을 돕고 그리고 같이 슬퍼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내 동연배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오늘 <내가 살던 용산> 출간 기념식 사회를 맡은 이도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그는 <내가 살던 용산> 제작 작업에 참여하면서 제작하면서도 수도 없이 울었다고 한다. 여기서 유족들을 돕는다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큰 사회적 명예도 얻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참으로 보람 있게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여태껏 무엇을 위해 살았나는 생각도 들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처럼 혼자 있는 여학생을 붙잡고 어떻게 여기 왔느니 물어봤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가 여기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면서 오라고 해서 찾아왔단다. 그녀도 나처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제대로 된 명예회복도 못하고 밀러가듯 떠나게 되어서 친구가 착잡해 한다며 자신 역시 유족들 얼굴 쳐다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아무런 취재도 못한 것 같지만 오늘 나는 <내가 살던 용산> 출판 기념식이 끝난 후 용삼 참사 희생자 유가족 중 한 분이 아픔을 함께해 준 이와 끌어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슬퍼하는 모습만 보았는데 서로를 놓으며 얼굴을 바라보면 살짝 미소 짓는 것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포옹을 하는 그분의 표정에서, 그리고 난 후 그 분의 미소에서 슬픔을 함께 이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여태껏 본적이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세상에 나 같은 이만 있었다면 그분은 슬픔을 이겨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부다 여기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유가족과 슬픔을 함께 하고 같이 살아주고 이야기 해주고 노래해 주고 그림 그려 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나는 그분들 덕에 유족들이 앞으로의 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래 사진은 내가 봤던 장면을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같이 올린다. 사진기도, 나의 사진술도 별로이지만 그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포옹하는 희생자 유족
 포옹하는 희생자 유족
ⓒ 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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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용산참사, #추모제, #백수 인턴,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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