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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 죽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어르신들. 노인세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늦은 나이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 노인세대가 할 수 있는 직업 하면 흔히 '지하철 택배, 경비원, 청소부' 등을 떠올리지만 실은 이보다 훨씬 다양한 분야에 노인들이 진출해 있다. 63세 나이에 미용실에서 머리손질을 하는 방효옥 할머니와 발 마사지를 맡고 계신 손순덕(67) 할머니, 북카페에서 일하는 변정숙(63) 할머니, 그리고 즉석 두부전문점에서 두부를 판매하고 계신 권정순(72) 할머니를 만나봤다. [편집자말]
          
방효옥(63) 할머니가 손님 머리를 염색하고 있다.
▲ 실버 뷰티샵 방효옥(63) 할머니가 손님 머리를 염색하고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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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낮 서울 서대문종합사회복지관 1층 '실버 뷰티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효옥(63) 할머니가 양 손에 비닐을 낀 채 한창 염색작업 중이다. "실장님, 캡 씌워야죠" 옆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방 할머니는 양 손으로 손님 머리 구석구석에 꼼꼼히 염색약을 발랐다.

방 할머니는 염색약으로 손 끝이 까매진 비닐장갑을 벗으며 "'미스' 때 미용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면서 미용일을 그만 두었는데 나이 먹으면서 집에만 있으려니 무기력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지난해 6월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요. 우리 며느리도 미용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일 시작했다는) 말을 안했죠. 나중에 얘기하니까 며느리가 '너무 좋다고, 감동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며느리하고 나중에 작은 미용실 하나 하고 싶어요. 여기서 기술도 더 연마하고요."

'언제 가장 보람되냐'고 묻자, 그는 "내 손으로 한 머리가 예쁘게 됐을 때"라고 말했다. "아까 어떤 손님도 커트 후 드라이까지 해 드리자 고맙다는 말을 했다"며 "그럴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방 할머니로부터 머리 손질을 받은 송금안(81) 할머니도 "머리 잘 한다고 해서 왔는데, 꼼꼼하게 잘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몸 아파 받았던 '발 마사지'가 '제2의 직업'으로

"이발합니까? 그리 가요?"

코트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한 분이 미용실에 들어서자, 방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목도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연분홍 가운을 꺼내 손님 목에 두르는 손길이 능숙하다. "머리가 너무 빠져 걱정"이라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분무기로 적시면서도 "예, 많이 자르지 말라는 말씀이시죠?"라며 손님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한 손엔 하얀 이발기를, 다른 한 손엔 빗을 든 방할머니의 손길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방 할머니와 같은 미용실에서 발 마사지 일을 하고 계신 손순덕(67) 할머니는 발 마사지를 하게 된 계기가 본인의 질병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엔) 내가 (발마사지를) 받으러 다녔어. 다리가 아프고 관절 때문에 고생했거든. 계속 다녀 보니 좋아지더라고. 그러다가 나도 배워 남 해줘봐야 겠다고 생각한 거지. 여기 복지관 선생님한테서 배웠는데, 처음엔 발 마사지만 배우다가 나중엔 전신 마사지까지 배워서 자격증을 땄지."

손 할머니는 "손 힘 없는 사람은 (발 마사지 일을) 하지도 못한다"면서 "손님이 많을 때는 힘도 많이 들지만, 허리 아프고 어깨 결리던 사람들이 마사지 받고 나서 '선생님 다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할 때 가장 보람된다"며 웃으셨다. 이어 그는 "나는 그래도 지금 힘이 있으니까... 나이가 더 돼서 움직이지 못하기 전까지는 이 일을 하고 싶어, 남한테 뭘 해줄 수 있는 건 좋은 거잖아"라는 말을 덧붙였다.

북카페 '알바생'은 할머니... "힘드냐고? 아직 69세밖에 안 됐어"

미용, 발 마사지와 같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곳에만 어르신들이 계신 건 아니다. 카페에서 여느 젊은이들처럼 일을 배우며 '제2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도 있다.

강정순(60, 앞), 변정숙(63, 뒤) 할머니가 커피를 만들고 있다.
▲ 삼가연정 강정순(60, 앞), 변정숙(63, 뒤) 할머니가 커피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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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 하나에 에스프레소 하나"

지난 8일 오후 5시, 투명 출입문을 밀고 들어가자마자 막 주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문서를 받아든 강정순(60), 변정숙(63) 두 어르신은 곧장 커피 만들 준비를 한다. 강 할머니가 원두를 분쇄하는 동안 변 할머니는 곁에서 커피잔과 따뜻한 물을 준비한다. 변정숙 할머니는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정순 할머니를 도우며 일을 배우고 있다. 기자가 옆에 서서 취재를 하는 게 떨리셨던지 변할머니는 "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며 컵에 담긴 물을 조금 덜어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신다.

책-다실이라 이름 붙여진 '삼가연정(三嘉連亭)'. 젊은이들 표현대로 하면 '북카페'다. '책과 차,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울리는 장소'란 이름의 이곳은 북카페답게 책이 가득하다. 갈색 책장에는 <오페라의 유령>부터 차(茶)로 유명한 초의선사에 관한 책까지 삼가연정을 찾는 손님만큼이나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큰 창문에는 하얀 한지로 만든 주마등이 걸려 있고 그 너머로 운현궁이 보인다.

흰색 셔츠에 갈색 앞치마를 입은 변할머니는 주방에서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틈틈이 찻잔의 물기를 빨간 마른 행주로 닦으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그에게 '일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 저으며 "힘든 건 없어요. 생소한 일을 했지만 좋은 것 같아요. 나이는 많지만 계속 일할 수 있는 것도 좋고요"라고 답하신다. 옆에 계신 김영태(69) 할아버지도 "아직 그럴 (일이 힘들) 나이는 아니다"고 덧붙이신다.

주문을 받고 계신 김영민(70, 앞) 어르신과 서빙 준비에 바쁜 김영태(69, 뒤) 어르신
▲ 삼가연정 주문을 받고 계신 김영민(70, 앞) 어르신과 서빙 준비에 바쁜 김영태(69, 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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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장 보람되냐고 묻자 변 할머니와 함께 일하는 강정순(60) 할머니께서 "전혀 (카페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는데 손님이 맛있다고 할 때 기분이 좋다"며 웃어 보이신다. 어르신들 말씀처럼 커피맛과 카페 분위기에 반한 이들이 벽 한 켠에 저마다 색색깔 메모를 남기고 갔다. '커피 맛있어요', '따뜻한 차와 즐겁게 일하시는 모습 보기 좋아요'라고 적힌 쪽지가 어르신들 사진 옆에 빼곡히 붙어있다. 실버 북카페라고 하지만 세련된 분위기에 재즈 풍의 음악이 나오는 이곳을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안녕히 가세요."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 손님이 나가자 카페에서 일하는 네 분이 모두 인사를 한다. 여느 커피 전문점 젊은 아르바이트생의 쩌렁쩌렁하고 낭랑한 목소리 대신 손자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음성이 손님을 배웅했다.

"장사 잘 됐으면 좋겠어... 젊은이들 좋은 데 취직하고"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고 계신 권정순(72) 할머니
▲ 두부전문점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고 계신 권정순(72)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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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행운동에는 두부전문점 '콩깍지' 1호점이 있다. 이곳에선 매일 아침 할아버지, 할머니가 직접 만든 손두부를 판매한다. 8일 저녁 7시 가게에 들어서자 녹색 윗도리에 주황 위생모자를 쓴 권정순(72)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늘 많이 파셨냐는 말을 건네자 "요즘엔 날이 추워서 그런지 장사가 잘 안 된다"며 "잘하고 싶은데 손님이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말씀하셨다. 일하는 게 힘들진 않으시냐고 묻자, 문제없다고 하시면서 또 다시 줄어든 손님 걱정을 하신다.

"집에서 놀면 뭐해. 건강 허락하는 날까지 이 일 하고 싶어.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없어. 내가 공부 많이 못했어도 젊었을 때 슈퍼를 해서 계산 같은 건 잘하거든. 손님들이 두부 맛있다고 하시면 보람도 되고…또 이게(일하는 게) 운동이 돼요. 가게도 정리하고, 지저분하면 청소도 하고… 손님과 대화도 하고 좋지. 근데 손님이 많으면 마음이 편한데, 요즘엔 월급 받으면서도 미안스러워."

때마침 퇴근 길에 가게에 들른 손님 한 분을 보자 권 할머니는 언제 걱정 어린 표정이었냐는 듯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한 손으론 두부를 건네면서도 "쿠폰 있으세요?"라며 이것저것을 챙긴다. 손님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할머니는 "조심히 가세요, 미끄러우니까"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손님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가게 한 편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무슨 소리냐"고 여쭙자 할머니는 가게 한편 커다란 사각통을 가리키며 "기르고 있는 콩나물에 물주는 소리"라고 하신다. "이것도 날이 추워 안 자란다"며 할머니가 꺼내 보여주신 콩나물은 정말 손가락 반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중지를 내보이시며 "이만큼은 자라야 팔 수 있는데 크질 않아 적자"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권정순 할머니는 "경제가 좋아졌으면 좋겠다"면서 "우리 같은 노인들이야 용돈벌이나 좀 더 되면 되는 거고, 무엇보다 젊은이들 좋은 데 취직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박혜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인턴기자 입니다.



태그:#어르신 일자리, #실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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