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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낙안군>에 대한 연재를 마친다. 101년 전인 1908년 10월 15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군되고 형제가 갈려 타 지역의 변방으로 전락한 채 3대째 서자처럼 설움을 겪고 살아야만 했던 옛 낙안군과 지역민들, 그들의 미래가 그동안의 연재를 통해 다소나마 밝아지길 희망한다.

 

필자는 지난 2008년, 낙안군 폐군 100년을 맞아 자전거로 지역을 100회 행군하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2009년에는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뭔가를 하자'는 심정으로 스쿠터(바이크)를 타고 지역을 돌아보면서 연재를 시작했다.

 

오늘, <낙안군>에 대한 연재의 붓 뚜껑을 닫으면서 필자 또한 해소되지 않는 울분이 남아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왜 땅덩어리는 갈라져야 하며, 왜 형제는 헤어져야만 하며, 그것이 해방이 됐음에도 왜 고착화되어 지역은 쇠락으로, 지역민의 삶은 피폐한 채 남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울분이다.

 

연재의 끝에 돌아 본 옛 낙안군

 

연재를 마무리하는 끝 마당에 필자는 옛 낙안군의 시작점인 산에서 출발해 하천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 갯벌을 돌아보고 왔다. 을씨년스런 바람으로 산의 나무들은 황량하고 살얼음이 언 하천엔 겨울철새 몇 마리만이 물위를 떠다니고 있었고 진한 암갈색 갯벌은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오늘 돌아본 곳이 순천시, 보성군, 고흥군 삼개 시·군이었지만 행정적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름 8km의 분지와 같은 평야, 그 끄트머리에 붙은 갯벌과 바다는 이미 지형적으로 한 몸임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 낙안군의 치소인 <낙안읍성>과 낙안향교,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이 한 뿌리임을 말해주고 있는 벌교읍의 고읍과 순천시 외서면 월평구석기 유적지, 옛 낙안군의 가슴 아픈 역사를 한반도에 빗대 확실히 설명해 주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문학관>등은 세 개로 쪼개진 한 몸뚱이의 절규였다.

 

행정의 통합은 무의미, 역사와 뿌리가 같은 한 문화의 나무로 키워야

 

 

<낙안군>연재는 그 절규에서 시작했고 응어리진 한을 풀어보고자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꼭 행정적 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독단적인 행정단위를 만들자는 주장은 시대에 역행일 수도 있다. 반드시 통합적으로 운영되어야만 할 필요성은 절실하지만 무리수를 띄우면서까지 행정적 통합이나 단독 행정구역을 만드는 것에는 반대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지역이 역사와 뿌리가 같은 한 형제이며 지형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대로 계속 방치하거나 외면해서는 역사 앞에 큰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절감(切感)한다. 그것이 바로 뜻있는 지역민들이 얘기하는 '문화, 관광의 한 울타리' 즉, 역사문화관광의 통합적 운영이다.

 

송광사, 선암사, 서재필 기념관, 월평구석기유적지, 낙안읍성, 대원사, 태백산맥문학관, 나철생가, 진석자연갯벌체험장 등 이 지역 굵직한 관광 체험지를 서로 연계하는 행정적 루트는 없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는 지리적 조건에서 한마디로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식이다. 

 

왜 역사문화관광의 한 묶음이어야만 하는가

 

 

필자가 이 지역을 연재하는 도중에 보성군 벌교읍에서는 벌교읍 100년사를 발간했다. 벌교가 옛 낙안군 폐군 이후 신생 도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읍지 편찬위원들은 자료 도움을 받기 위해 현 행정구역인 보성군 보다는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옆집인 순천시 낙안면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자신과는 핏줄이 다르기에 가족 역사를 현재의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고 옆집 할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낙안군에 대한 기록은 벌교읍지에서 크게 취급하지 않았다. 현재 행정구역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불과 6km 밖에 되지 않고 평야로 연결된 낙안읍성과 태백산맥문학관은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지도에 표기하지도 않는다. 대원사에서 서재필 기념관을 지나 고인돌공원, 송광사로 이어져도 될 관광코스를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나친다.

 

순천시 외서면의 월평구석기유적지, 조선시대의 낙안읍성, 근 현대사의 태백산맥문학관을 잇는 관광길은 책에서 배운 내용을 현장에서 다시 한번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인데 행정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개발하지 않는다. 약 12km 정도로, 걸어서도, 자전거로도 충분히 체험 가능한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낙안군 통일 고민하면 남북통일 길 열린다

 

 

행정구역이 다르다고 비켜가고 체재가 다르다고 문화 체육 교류를 막아 놓은 것은 한 형제 한 핏줄을 두 번 갈라놓는 행위다. 낙안과 벌교는 낙안군이라는 지명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고 남한과 북한은 다른 민족이 아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다.

 

외세의 침입으로 낙안군이라는 지명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산과 강이 가로막고 있지도 않은 지형인 그저 눈에 뻔히 보이는 들판에서 서로 살 부대끼며 같은 땅 지어 먹고 살던 가족들이 행정구역이라는 굵은 막대를 세워 세 군데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고.

 

열강의 각축 속에 조선이라는 지명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갖고 있던 한 민족이 휴전선이라는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생활하면서 남한은 반도국가라고 말을 하지만 이미 섬나라로 변한 기구한 운명.

 

역사와 문화가 한 뿌리인 순천시(외서, 낙안, 별량) 보성군(벌교) 고흥군(동강, 대서) 등 옛 낙안군 지역에 역사 문화 교류를 진행하고 공동의 관광개발을 통해 연계하는 것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대입하면 곧 통일을 위한 남북의 실마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낙안군 연재>는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닌 국가적 문제일수도 있다. 

 

낙안군 연재에 못 다한 얘기들

 

 

낙안군은 101년 전에 사라졌고 남겨놓은 것은 낙안읍성과 낙안향교 등 몇몇 건물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낙안군의 치소를 그대로 복원해 놨다고 자랑하는 낙안읍성도 현 행정구역인 순천시 낙안면의 그것을 나열하는데 불과하다. 옛 낙안군 지역이던 벌교, 동강, 대서의 지형과 인물은 내 팽개쳐버렸다. 자성해 봐야 할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좀더 확대 해석해 <낙안군>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문제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봐서도 낙안군이라는 단어가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불편해 할 분열을 고착화시키거나 그것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필자의 <낙안군 연재>에 힘을 보태준 이들이 있다.

 

스쿠터(바이크)를 마련해주고 지역 순회를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준 보성군 벌교읍의 정철회 약사와 순천시 낙안면의 박동훈씨가 그들이며 이 기회에 감사드린다. 또한, 연재를 포함한 낙안군이라는 주제로 고민했던 2년이라는 세월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필자의 낙안군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지만 이 지역의 이야기는 <바이크 올레꾼 길 따라 마을여행>으로 다시 찾아갈 예정이다.

 

필자는 지난 2005년 <낙안민속마을의 사계>와 2009년 <스쿠터 타고 낙안군 이야기>를 연재했으며 2009년 12월 31일 전라남도지사 표창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스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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