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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윤 5월. 젊은 왕비의 풋풋함에 빠져 노론의 참소를 헤아리지 못한 영조가 '나경언의 상변'을 사실로 받아들여 진노했다. 이에 세자가 시민당 월대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이무렵 영조는 65살 늙은 나이에 14세 처녀에게 장가들어 경희궁에 신방을 차리고 3년차를 보내고 있었다.

 

초하루부터 시작된 세자의 대명(胥命)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영조가 13일 창덕궁에 친히 거둥하여 세자로 하여금 선원전에 전배하고 휘령전에 예를 행하라 명했다. 세자를 죽이기로 작심한 영조가 아들에게 조상 혼전에 작별을 고하라는 것이다.

 

예를 마친 세자에게 신발과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찧어라 명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고두(叩頭)를 행하던 세자가 휘청거렸다. 무더운 여름날, 기나긴 날을 주야장천 석고대죄하고 있었으니 탈진상태였다.

 

이 때, 열 살 배기 세손(훗날 정조)이 관(冠)과 포(袍)를 벗고 아버지 뒤에 무릎을 꿇었다. 대노한 할아버지는 무서워 감히 쳐다보지 못했지만 좌의정 신분으로 배석한 외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나서주기를 바랐지만 홍봉한은 머리를 조아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세손을 안아 동궁으로 보낸 영조는 협련군(挾輦軍)으로 하여금 궁궐 각 전각의 문을 4, 5겹으로 에워싸도록 지시하고 세자에게 칼을 건네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가 칼을 받아 결행하려는 순간, 시강원 여러 신하들이 달려들어 만류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임금이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다. 허나, 한림(翰林) 임덕제는 엎드려서 떠나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라 명했다. 문정전 남쪽 뜰에 마련된 뒤주에 끌려 들어가던 세자가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영조는 외면했다. 결국 세자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8일 만에 절명하고 말았다.


태그:#영조, #정조, #사도세자, #뒤주,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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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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