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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아침에, ㄱ출판사 사장님한테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요. 느긋하게 길을 떠나셨겠지요." 그날 저녁나절 부랴부랴 먼길을 달려갑니다. 하룻밤을 곁에서 꼬박 새울 생각입니다. 그저 넙죽 절하고 도움돈 몇 푼 내밀고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길을 나선 까닭에, 퍽 먼 전철길에서 다리쉼도 할 생각으로 외대앞역에서 내립니다. 이문동 언덕길을 오르며 헌책방 <신고서점>에 들릅니다. 인천에서 중계동까지는 참 멉니다.

빙글빙글 타고 오르는 계단이 있는 '2층짜리 헌책방' 신고서점입니다.
 빙글빙글 타고 오르는 계단이 있는 '2층짜리 헌책방' 신고서점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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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골마루에 서거나 쪼그려앉으며 다리를 주무릅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직한 책시렁에 꽂힌 책을 들추면서 이따가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곱씹습니다. 몇 해 뒤면 헌책방살림 서른 해를 맞이할 <신고서점>은 큰일꾼은 열 해쯤 앞서 당신 집을 담보로 하며 이 가게를 사들였고, 푼푼이 빚을 갚고 돈을 벌면서 가게를 조금씩 넓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라안에 몇 곳 안 되는' 2층짜리 헌책방으로 꾸리고 있습니다. 동글동글 계단을 타고 2층에 올라갑니다. 사진책 꽂힌 자리를 곰곰이 살피는데, 이코 나라하라(奈良原一高)라는 분이 담은 <人間の土地>라는 사진책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사람이 선 땅" 또는 "사람이 사는 땅" 또는 "사람 삶터"쯤으로 풀이할 책이름이 아니겠느냐 싶은데,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가슴이 뭉클뭉클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나고 죽고 살고 싸우고 복닥이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웃고 떠들고 즐기고 어울리는구나 하고 새삼 생각합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우리 나라에서는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사람 삶터"나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한 이름이요 어떻게 보면 흔하고 너른 이름입니다. 보잘것없는 한 사람 몸뚱이와 넋으로 '사람 삶'을 송두리째 밝혀 내는 사진이란 더없이 거룩하거나 훌륭하거나 대단한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바로 우리 스스로 하찮은 목숨 하나인 까닭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를 수수하고 조촐하게 바라보면서 담는 사진을 그러모아 "사람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윤미네 집>이나 <섬> 같은 사진책은 따로 "사람 삶"이라는 큼직한 이름을 달고 있지 않으나 어엿하게 "사람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슬기롭게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난 《人間の土地》. 이 책을 만난 그날 곧바로, 아버님을 떠나보낸 분한테 선물로 드렸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난 《人間の土地》. 이 책을 만난 그날 곧바로, 아버님을 떠나보낸 분한테 선물로 드렸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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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の土地>에 실린 사진이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책 뒤쪽을 봅니다. 헌책방 <신고서점>은 책 뒤쪽에 작은 쪽지를 붙이고 책값을 연필로 적어 놓기 때문입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붙인 책값은 5만 원. 뜨끔합니다. 자그마치 5만 원이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헌책방 아저씨가 이 책을 더없이 잘 알아보았다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그저 흔해빠진 사진책이 아님을 깨달았기에 이 책을 옳게 섬기고자 '이만한 값이면 잘 안 팔릴 노릇'일 테지만, '이 책을 알아볼 사람한테는 5만 원은 하나도 안 비싼 알맞춤한' 값일 테니까, 이렇게 하셨다고 느낍니다. 지난 열여섯 해에 걸쳐 이곳 <신고서점>에서 오천 권이 넘는 책을 장만하여 읽었으면서 새삼 빙그레 웃습니다. 흰 봉투에 넣은 십만 원 가운데 절반을 덜어 책값에 보태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도움돈을 드리고 나서 밥과 술을 한 상 받는 자리에서 ㄱ출판사 사장님한테 "마음 선물입니다" 하고 말씀드리며 건넵니다.

저로서는 참 가슴 뛰도록 하는 사진책이었기에 제가 간직하면서 둘레에 널리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책은 아버님을 떠나 보낸 출판사 사장님 넋을 달래는 데에 쓰는 쪽이 한결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제 몫으로는 <野島宣弘-I♥U>(心交社,2005)라는 사진책을 남깁니다. <I♥U>는 열넷(山本愛莉)과 열다섯(高橋結衣) 살짜리 계집아이를 담은 화보입니다. 학교옷과 헤엄옷을 입힌 모습으로 책 하나를 엮는데, 얼굴이 이쁘장한 계집아이들은 벌써 이 나이에도 화보를 내는군요. 책 사이에는 광고쪽지가 한 장 끼어 있습니다. 광고쪽지를 펼치니 이 사진책을 낸 출판사에서 여태까지 내놓은 다른 사진책과 디브이디를 알려줍니다. 백 가지가 조금 안 되게 나와 있으나, 일본에서는 이곳 말고도 다른 숱한 출판사에서 훨씬 갖가지로 사진책을 내고 디브이디를 내겠지요. 다른 사진책은 열넷이 아닌 열셋이나 열둘, 또는 열하나나 열, 또는 아홉이나 여덟 살짜리 계집아이를 모델로 삼아 사진책을 내고 디브이디를 낼는지 모릅니다. 일본말로 '오타쿠'라고 해야 할까 싶은데, 이 갈래 사진책을 즐기는 사람과 이 갈래 사진 모델이 되는 사람이 많으며 이 갈래 사진책을 힘껏 펴내는 사람 또한 많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 갈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겠지요. 그러면 이 갈래 사진을 찍는 이들을 놓고 '사진이 어떠하고 사진 느낌이 어떠한가' 같은 이야기도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린 계집아이 아닌 젊은 아가씨 몸매를 알몸으로 찍는 사진은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같은 사진을 놓고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이 갈래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는 사람은 있기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가슴을 뛰도록 하는 사진을 어느 갈래에서 찍고 있을까요?

 ┌ 《人間の土地》(Libro,1987)
 └ 《I♥U》(心交社,2005)

사진책 《人間の土地》 들여다보기.
 사진책 《人間の土地》 들여다보기.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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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人間の土地》에는 여러 갈래 사람 삶자락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책 《人間の土地》에는 여러 갈래 사람 삶자락이 담겨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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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の土地》 같은 재미나면서 구수한 사진책을 우리 나라에서도 내놓을 수 있기를 비손해 봅니다.
 《人間の土地》 같은 재미나면서 구수한 사진책을 우리 나라에서도 내놓을 수 있기를 비손해 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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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사진책, #헌책방, #일본사진책, #사진읽기,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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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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