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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적절한 균형>
ⓒ 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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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도착한 대부분 사람들이 맨 처음 접하는 잊기 어려운 경험이 바로 거리에서 구걸하는 비참한 거지들이다. 아이들, 노인들, 불구자들, 아기가 딸린 여성들이 멈춰 선 차들 사이를 바삐 움직이며 쉴 새 없이 차창을 두드린다.

이 같은 광경을 처음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 드는 생각은 '세상에,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들이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이다. 그러나 충격도 잠시, 일주일 혹은 길어도 열흘이면 언제나 같은 구역에서 구걸하고 있는 거지들이 어느새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구걸이 그들에게 어엿한 직업임도 머지않아 깨닫게 된다.

거리의 구걸은 인도의 일상이다. 서울역의 노숙자 문제가 한국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매일 부각되지 않듯이, 인도의 구걸 문제 역시 아주 가끔 언론에 등장할 뿐이다. 또한, 서울역의 노숙자 문제가 한국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니듯이, 인도의 거지 문제 역시 인도를 대표하는 모습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 <적절한 균형>은 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동정하도록 만든다. 거지들로 넘쳐나는 나라에 관한 평범한 소설이 아니라, 왜 멀쩡한 사람들이 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슬프고도 가슴 아픈 비범한 이야기이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만 결국 거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한줌의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로힌턴 미스트리가 바라본 인도의 속살

이 책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성실한 일상을 꾸려 나가는 소박한 꿈을 가진 소시민들이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면서도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 희망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가'이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카스트의 굴레를 극복하고 재봉사가 된 이시바, 나라얀, 그리고 옴. 신분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슴 아픈 비극. 산업화와 기계화로 인해서 고향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재봉사들. 독립 후 큰 사업을 잃고서 좌절한 아버지의 등쌀에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유학하도록 강요받는 마넥.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오빠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힘든 삶을 꾸려나가는 디나.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이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의 근원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가족의 비극적 죽음에 방관하는 경찰, 범죄 집단과 결탁한 부패한 공권력, 돈과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민주주의, 생식력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폭압적 국가 권력 등, 이러한 부당한 힘이 바로 힘없는 소시민들의 희망을 짓밟아 버리고 절망하도록 만든다.

책을 읽다가 어느덧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주먹을 불끈 쥐고서, 정녕 힘없는 개인은 실낱 같은 희망조차도 허락받을 수 없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인지를 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재봉사들의 동반자이자 버팀목이 되어 주는 디나와 마넥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버려진 헝겊 조각들을 모아서 디나가 만드는 이불은 소외받고 상처 입은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어울림의 상징이다.

재봉사들의 노동력으로 힘겹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가내 수공업자 디나의 운명은 결국 그들의 삶과 그 궤적을 함께 하고 만다. 처음부터 가난한 재봉사들의 편에 섰던 마넥의 비극적 최후는 삶의 덧없고 부질없음에 좌절하는 애처로운 인간적 모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지가 되고 만 재봉사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고도의 문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인도에 대한 오해 혹은 환상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영화로 본 많은 인도 친구들이 광분하는 모습을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영화가 그리는 인도의 모습과 현실은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인도 밖의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반면에, 많은 인도인들은 영화를 그저 흥밋거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적절한 균형>은 단순히 인도를 희화화하거나 흥미 위주로 다루지 않는다. 소설에서 인도는 생활이고 실제이다. 이런 이유로 현실과 소설의 경계는 쉽게 허물어지고, 주인공들의 행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몇 해 전 인도 서쪽 구자라트 지방을 여행하다가 아라비아해와 마주한 듀(Diu)라는 작은 섬에 들른 적이 있다.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61년에야 인도인들에게 넘겨진 섬이었다.

그 섬 어느 해안으로 천 년도 훨씬 전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이 배를 타고 도착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신흥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서 페르시아를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듀 섬에 19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항해를 시작해 마침내 현재의 뭄바이 북쪽 산잔 지방에 도착했다.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왕은 이방인들의 출현에 화들짝 놀라서 우유를 그릇에 가득 채워 보냈다. 이미 자신이 다스리는 땅이 가득차서 더 사람들을 받을 수 없다는 완곡한 거부의 표시였다.

그러자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지도자는 우유 그릇에 설탕을 타서 왕에게 되돌려 보냈다. 왕은 가득 담아 보낸 우유가 흘러넘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돌아오고 그 맛 또한 달콤해진 데 놀랐다. 서로 간에 이 얼마나 재치 있는 응수인가!

낯선 땅에 짐이 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삶을 달콤하고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이방인들의 기지에 왕은 기뻐했고,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뭄바이를 중심으로 정착해 살게 된다.

이들이 바로 지금도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사는 인도의 소수 인종 파르시(Parsi)인들의 조상이다. 현재 파르시인들은 인도에 약 7만 명, 전 세계에 1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절한 균형>의 저자 로힌턴 미스트리는 바로 이 멸실의 위기에 놓인 파르시 인종 출신이다. 그러나 미스트리는 소수 인종으로서의 정체성에 매몰되어 파르시인들의 삶과 처지를 인류학적 측면에서 흥미 위주로 다루지 않는다.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의 위치를 뛰어 넘어 그는 대담하고 극사실적인 필치로 격변의 인도 현대사에 휩쓸린 개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데 소설적 지향점을 두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 장편소설 <그토록 먼 여행>과 <가족 문제>가 파르시 공동체를 중심 무대로 삼아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는 평범한 개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적절한 균형>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는 물론이고, 계층과 종족 그리고 성장 배경이 확연히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인도 현대사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파헤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소설은 여러 개인들이 역사의 자장에 휩쓸려 맞게 되는 비극을 담담하게 그리면서도, 이러한 인도인들의 비극이 어느 한 시절에 국한된 게 아니라 독립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비극임을 보여준다.

인도라는 대국은 다양한 종교, 문화, 인종 들로 다종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해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이러한 인도를 역사 혹은 국가라는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강력한 국가주의로 무장한 채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다. 한국의 경험에서도 확인했지만 이런 국가에서 개인성을 묻고 지키는 일은 너무나 지난하다.

우유를 넘치게 하지 않는 설탕, 그것이 국가

소설은 인디라 간디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 체제인 1975년에서 1977년을 주요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카스트 제도에 항거해 재봉사가 되는 불가촉천민들, 새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큰 사업을 잃고 마는 파르시 기업가, 국가비상사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가난한 학생 운동가, 신부 지참금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녀들, 구걸의 수익 증대를 위해서 아이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거지 왕초, 빈민굴 판잣집조차도 빼앗기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가난한 사람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생식력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폭압적인 관리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독립을 전후한 파란만장한 인도 현대사를 증언한다.

디나, 마넥, 이시바, 옴프라카시는 이런 엄혹한 역사 앞에서, 특히 국가의 폭력 앞에서 개인은 도무지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야만적인 국가권력과 불화하는 개인들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로힌턴 미스트리만큼 실감나고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인도의 현대 작가는 드물 것이다. 살만 루시디가 마술적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인도와, 로힌턴 미스트리가 전통적 리얼리즘을 복원해 보여 주는 인도의 모습은 그 글쓰기 방식의 차이만큼이나 확연히 다르다.

<적절한 균형>을 통해서 독자들은 역사와 국가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 개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진정한 인도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인도에 어떤 환상적인 신비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이국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인도인들의 생명력이 아닐까.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경원시하는 현지 평론가들의 주장대로 로힌턴 미스트리가 그려내는 '인도'가 진정한 인도의 모습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역사적 사실들은 논쟁이 될 수 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스트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뿐이라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T. S. 엘리어트의 말을 인용하며 진실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는 독자들을 질타한다.

궁극적으로 <적절한 균형>은 개인과 역사, 개인과 국가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 적절한 균형 감각은 무엇일까? 소설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그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웅변한다.

우유를 넘치게 하지 않고도 삶을 달콤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설탕 같은 존재가 국가여야 하지만 현실의 국가 권력은 그렇지 못하다. 인류가,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20세기 이래 대물림한 이 뜨거운 질문과 곤욕 앞에 이 소설은 가장 정직하게 맞서 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번역자인 본인이 쓴 책의 옮긴이의 말에다가 책 소개와 북리뷰를 덧붙인 글임을 밝힙니다



적절한 균형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2009)


태그:#인도소설, #로힌턴미스트리, #북리뷰, #적절한 균형,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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