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탈리아 여행 첫날의 시차 때문에 아내와 딸은 지쳐 있었다. 나는 땡볕 아래에서 로마 유적을 둘러본 가족과 호텔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낮에 만났던 지식 가이드가 추천했던 로마의 야경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어 하는 딸을 다시 깨워서 다시 로마 시내로 나섰다.

우리는 테르미니(Termini) 역으로 갔다. 교통이 좋은 테르미니 역에는 많은 한국인 자유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는 로마시내 야경 투어를 해주는 지식 가이드 아저씨를 만나서 지하철 역으로 이동했다. 단신에 수염이 덥수룩한 가이드 아저씨는 수더분하고 인상이 참 좋았다. 이국 땅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연령대도 다양했지만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피곤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갈 길로 가면 되는 가이드 여행이었기에 걸음걸이는 간편했지만 거리의 사진을 찍는 나는 한국인 단체를 뒤에서 바쁜 걸음으로 쫓아갔다. 단체가 움직이는 길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길동무들이 모두 사라지기 일쑤였다.

17세기에 이곳에 있었던 스페인 대사관에서 이름을 따 왔다.
▲ 스페인광장 17세기에 이곳에 있었던 스페인 대사관에서 이름을 따 왔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스파냐(spagna)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니 날은 저물고 있었다. 온도가 서늘해진 스페인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움직이고 있었다. 스페인 광장 바로 남쪽의 미냐넬리 광장(Piazza Mignanelli)도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 한쪽 끝에는 원주 기념탑이 높이 서 있고 그 꼭대기에서는 콜로나 델 임마콜라타(Colona del Emmacolata)라는 성모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성모상은 교황 피우스 4세(Pius IV, 1499~1565)가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를 잉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세기에 세운 것이다.

저녁 시간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 중에 한곳이 이 스페인광장과 스페인 계단(the Spanish Steps)이다. 낮에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도저히 스페인계단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녁에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계단에 앉아 각국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스페인 계단이다. 137개의 각 계단에는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여행과 젊음을 만끽하고 있고 분위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스페인계단에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앉아 있다.
▲ 스페인계단 해가 지기 시작한 스페인계단에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앉아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원래 이 계단은 18세기에 프랑스 대사관의 지원으로 만들어졌고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삼위일체성당(Trinita dei Monti)도 프랑스의 수도회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이다. 그런데 광장과 계단의 이름에 '스페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17세기에 이 광장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스페인 계단이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로마의 휴일'과 '오드리 헵번(Audrey Kathleen Ruston)' 때문이다. 로마를 잘 포장한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 한편의 힘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가이드 아저씨의 웃기는 입담이 시작되었다.

"저 스페인 계단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처먹는' 사람들 때문에 계단이 너무 지저분해졌지요. 지금은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 여사(오드리 헵번)가 '로마의 휴일'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페인 계단을 내려왔는데, 그걸 흉내 내서 여행자들이 이 계단에 앉아 너도나도 아이스크림을 '처먹었지요'."

아마도 스페인계단 주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계획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는 돈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영화 속의 '오 여사' 흉내를 내는 것이 된장녀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좋다. 하지만 나는 오여사와 스페인 계단에 얽힌 '로마의 휴일'이라는 콘텐츠는 서울이 꼭 본받아야 할 도시 역사의 콘텐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이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려온다.
▲ 스페인계단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이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려온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내가 대학생이던 당시 나는 이 스페인 계단에 앉아서 여행 중 만난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로마의 휴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모처럼 계단에 앉아 쉬면서 잠시 다리를 쉬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젊은 날에 스페인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여행 친구들은 지금 세상의 풍파를 잘 헤쳐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계단의 따뜻했던 기억이 아직도 엉덩이에 남아있는 듯 한데 그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가 앉았던 계단 옆 자리에는 미모의 일본 아가씨가 홀로 여유를 즐기고 있었고 주변의 이탈리아 청년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 청년들이 여러 차례 수작을 걸었지만 그 아가씨는 대꾸도 하지 않고 스페인 계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 그 기억들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스페인 계단 주변에 아이스크림 가게나 노점도 없었다.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안 되고 먹다가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계단 위쪽은 이미 많은 관광객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나는 아래쪽 계단에 앉아서 로마에서의 휴일을 만끽했다. 낮과 달리 로마의 저녁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쾌적했다. 이 쾌적함을 즐기고 로마의 여행자들을 만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장소는 바로 이 스페인 계단이었다. 아마 전 세계의 계단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앉았다가 가는 곳이 이 스페인 계단일 것이다. 이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한껏 여유있음을 자랑하는 표정들이다.

계단에서 바라보이는 스페인 광장의 정경 중에 가장 시원스러운 것은 바로 '난파선의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이다. 테베레(Tevere) 강에 홍수가 나서 여기까지 떠내려 온 배에 착안하여 피에트로 베르니니(Pietro Bernini)가 만든 분수대이다.

테베레 강에서 떠내려 온 침몰하는 배를 형상화한 분수대 작품이다.
▲ 난파선의 분수 테베레 강에서 떠내려 온 침몰하는 배를 형상화한 분수대 작품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로마 시내의 다른 분수대에게 비해 소박하게 작지만 물이 흘러나오는 형태가 어느 분수보다도 독창적이다. 홍수로 물이 새게 된 배가 물에 이미 반쯤 잠긴 모습이다. 느려터진 듯한 현대의 로마에 실망하면서도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빛나는 로마의 분수대 모습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계단에 앉아 이 난파선을 보고 있으면 머리 속에 과거 홍수에 대한 상상이 자라고 가슴 속에는 로마 분수의 아름다움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분수대의 물은 난파선 안쪽의 사람 조각에서도 나오고 배 바깥 아래 부분의 동그란 원에서도 나온다. 사람 입에서 나오는 분수대 물은 사람이 먹고 배의 바깥쪽에서 새는 듯이 나오는 물은 말이 먹었다고 한다. 이곳을 비롯해 로마의 분수대 물은 모두 먹어도 된다고 하는데 습관이 되지 않아서인지 쉽게 입을 대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명품가게들을 대표하는 거리이다.
▲ 콘도티 거리 이탈리아 명품가게들을 대표하는 거리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분수를 보다가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분수대 앞으로는 이탈리아 명품의 거리인 콘도티 거리(Via di Condotti)가 곧게 뻗어 있었다. 원래 스페인 광장 주변은 부유층의 주거지였고 그러한 역사적 연유로 인해 이탈리아 최고의 브랜드를 자랑하는 가게들이 이 거리에 꽉 들어차게 되었다. 저녁의 화려한 가게조명 속에서 가죽 제품, 여성 의류, 넥타이, 유리공예품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가게들의 제품 가격은 보통 비싼 게 아니지만 수많은 여성들의 눈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다행히 가게의 문을 닫은 저녁시간이 되어서 아내는 별 말이 없었다.

아내는 이탈리아 최고의 명품 거리에서 명품을 입은 로마 사람들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에게 눈에 띄는 패션 스타들을 찍어보라고 했다. 나는 해가 진 어두운 거리에서 셔터를 누르면 플래시가 터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많은 로마 사람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나는 인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찍는 척하며 로마의 가족과 청춘 남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인파 속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스페인 광장과 콘도티 거리를 생각하면 각국 여행자들의 물결과 그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인파 속에서 오여사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뿐하게 스페인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로마 시내의 명품 아이스크림 가게 답사에 나섰다. 나는 로마의 유명한 아이스크림을 '처먹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탈리아, #로마, #스페인광장, #콘도티 거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