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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술자리가 잦다. 그만큼 술자리 실수도 잦아진다.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연말이 되면 술자리가 잦다. 그만큼 술자리 실수도 잦아진다.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미라신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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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 자리. 옛날이야기 하며 한잔,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이야기 하면서 한잔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과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술이 얼큰해지고 이야기거리가 궁색해지면 항상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바로 '군대 이야기'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창생들은 서로 질 새라 신이 나서 떠들고 여자 동창생들은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들어준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군대에서 겪었던 참으로 아리송한 송년회다. 술이 깨지 않아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아픈 아침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그 기억만은 더 또렷해진다. 

군대 송년회, 술 따라주는 여인들도 있어

1990년 12월, 일병 계급장을 달고 시쳇말로 박박 기어 다닐 때다. 그날은 전 중대원이 막걸리와 소주로 잔치를 벌인 날이다. 한 해가 끝나갈 때면 군대도 '송년회'를 한다. 일반적인 송년회와 별로 다를 것은 없다.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여성들도 등장한다. 곱게 차려 입은 여성들이 섬섬옥수로 술도 따라 주고 안주도 날라 준다. '여성'이라는 말을 듣고 혹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 터. 만약 술집 접대부를 상상했다면 분명 군대 근처도 가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부대 안에서 하는 졸병들 송년회 자리에 접대부가 들어 올 일은 절대로 없다.

그 분들은 상사, 중사 같은 간부들 부인이다. 송년회 때 간부 부인들이 안주거리를 장만해서 병사들에게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날만큼은 졸병들도 허리띠 풀고 배 터지게 술을 마신다.

그날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갔다. 술에 설탕을 섞었다고 착각할 만큼 달았다. 군대에서 처음 맞는 술자리라 감격스럽기도 했고 이런 낭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그래서 술잔을 받는 족족 단숨에 들이켰다. 

"야~ 이 일병 술 넘기는 폼을 보니 꽤 세겠어"라는 칭찬(?) 을 소대장에게 듣고 난 이후에는 더 미친 듯이 마셔댔다. 칭찬까지 받고 나니 술이 더 달았다.

중대장이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고?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부대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이유인 즉, 지난밤에 누군가 술에 취해 총을 들고 중대장 관사를 찾아 갔다는 것이다.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워낙 큰 사건이라 중대장이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추측성 소문이 난무했다. 총을 들이대자 중대장이 무릎을 꿇은 채 살려 달라고 싹싹 빌었다는 얘기도 있고 장교답게 호통을 쳐서 쫒아 버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또 사고를 친 병사가 병장이라는 얘기도 있고 일병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부대원들은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지난밤에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면 그 병사는 당연히 영창 감이다. 또 부대원들 모두 최소한 한 달 정도는 외박, 외출도 금지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제 갓 일병 계급장을 단 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숨쉬기도 힘들었다.

이미 그는 병사들 사이에서 영웅이 돼 있었다. 군대 다녀 온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장교에게 배짱 좋게 대거리를 하는 병사는 단번에 '영웅'이 된다. 일종의 대리만족감 때문이다. 장교들에게 늘 억눌려 지내다 보니 자신과 같은 답답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 시원하게 대거리를 하면 답답한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쨌든 그 '영웅' 탓에 부대 분위기가 살벌했다. 평소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어슬렁' 거리던 병장들도 이제 갓 전입한 이등병처럼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다녔다. 중대장(대위)을 제외한 하사관(하사, 중사, 상사)과 장교(소위, 중위)들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거나 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총 들고 중대장 찾아간 '영웅', 알고보니

중대장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영화 <실미도>
 중대장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영화 <실미도>
ⓒ 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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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이민선 지금 즉시 상황실로 와라."

방송을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어제 그 일을 일으킨 병사가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동기나 친하게 지내는 고참에게 중대장을 포함한 간부들 욕을 푸념처럼 한 적이 있다. 그 사실이 영 꺼림칙했다. 상황실에는 소대장이 앉아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야 인마 아무리 취한 상태고 춥다고 해도 보초 서는 놈이 중대장님이 있는 관사에 들어가서 자면 어떻게 하나! 내가 중대장님 연락받고 가서 너 깨워 오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나저나 지금 머리 좀 깎을 수 있겠나."

이 말을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중대장 관사에 총을 들고 찾아간 '영웅(?)'이 바로 나였다니......!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이 깨지 않아서 비틀거리며 보초근무 나간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초 근무를 서고 어떻게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하고 어떻게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와서 잠을 잔 것인지가. 

어쨌든 다행이었다. 소대장은 지난 밤에 총 들고 관사에 간 사실을 질책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 머리를 깎기 위해 날 부른 것이다. 지난 밤 일을 더 이상 추궁할 맘은 없는 듯했다.

난 일명 '깎새'였다. 부대가 워낙 작다보니 이발병이 따로 없어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깎새'로 키웠다. 난 꽤 솜씨가 좋은 '깎새'여서 장교들도 단골로 두고 있었다. 소대장은 머리를 깎으면서 지난밤에 있었던 나의 영웅적(?)인 행동을 재미있다는 듯이 모두 얘기했다.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술 취해 관사에서 잠든 병사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밤 11시 30분이다. 보초 근무를 나간 지 1시간 30분이 지난 시간이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관사 거실에서 내가 총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하면서 소대장은 "그래도 군인 정신을 잊지 않고 총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기특했다"며 실소를 터뜨렸다. 중대장과 함께 간신히 깨워 들쳐 업다시피해서 상황실로 데려와 근무 교대를 시켰다고 한다.

소대장 이야기에 한창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물컹' 하고 머리카락 말고 무엇인가 다른 물질이 잘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대장 귀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뿔싸' 술도 깨지 않은 상황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으며 머리를 깎다가 그만 소대장 귀 한 귀퉁이를 잘라 버린 것이다.

이 미안함을 어찌할꼬! 혹시 후환은 없을까라는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 할 수가 없었다.  소대장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많이 잘렸냐? 제대하고 돈 많이 벌면 꼭 연락해라 성형 수술해야 하니까" 하고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난 "네 꼭 성형 수술 해 드릴 게요"라고 대답했다. 진심을 담은 대답이었다.

돌이켜 보니 다시는 오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

맘 좋은 소대장은 이 일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그냥 넘겼지만 고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날 이후 거의 일주일간 밤마다 집합했다.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다. 군대에서 밤에 집합 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밤에 고참들에게 불려 나가 얼차려 받고 두들겨 맞는 일이 '집합'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나 때문에 함께 부대로 전입해 온 동기들까지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동기 중 하나가 잘못 하면 연대 책임을 물어 함께 벌주는 것이 군대 전통이다. 

그날 보초 서다 말고 중대장 관사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는 사실은 19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난 사고를 웃음으로 넘겨주고 귀까지 잘라 버린 졸병을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까지 건넨 통 큰 소대장의 따뜻함은 똑똑히 기억난다.

또 술 취해 정신 못 차리는 동기를 둔 죄로 일주일 내내 눈밭에서 구르고 채이면서도 눈총 한번 주지 않은 동기들의 넉넉함도 가슴에 남아있다.

졸병 시절 술 때문에 일으킨 엄청난 사건 두 가지(보초 서다 총들고 관사 간 일과 소대장 귀 자른 일)는 내가 제대할 때까지도 졸병들 사이에서 전설이었다. 아마 내가 제대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돌이켜 보니 모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내 기억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젊고 활기찬 모습 그대로.

내 주량은 고작 소주 반 병이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술 자리 분위기에 취하면 분수를 모르고 '폭주'를 한다. 그 다음날 숙취 때문에 고생할 때면 '다시는 술에 입도 대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지만 그 때 뿐, 다시 분위기 맞는 술자리라도 가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폭음'을 한다. 이 술버릇 고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덧붙이는 글 | <그들의 특별한 술 버릇을 공개 합니다> 응모글



태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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