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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 새로운 생활 앞에 서게 되면 그 어떤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게 됩니다. '새 보금자리를 구하고 나면 다시 빈 손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나이 오십에 집 한 채 깔고 앉아 빈 손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고 자문자답해 놓고도 아내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내세워 이것 저것 따져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에게 발목 잡혀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그렇게 주저앉아 평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새 터를 찾아다니면서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생산적인 일보다는 이런 저런 이유로 돈벌이에 급급한 소비적인 일에 주저앉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렇다고 '무소의 뿔'을 앞세워 혼자서만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새 터를 찾아 나설 때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내와의 의견 좁히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새 터 찾다 봉착한 펜션의 유혹

서울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는 경기도나 강원도 부근에 자리한 팬션들은 거의 호텔수준이었습니다.성수기 비수기 따로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올 수 있게끔 호화스럽게 꾸며놓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충남의 한 펜션.
 서울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는 경기도나 강원도 부근에 자리한 팬션들은 거의 호텔수준이었습니다.성수기 비수기 따로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올 수 있게끔 호화스럽게 꾸며놓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충남의 한 펜션.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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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중산리 터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 다시 빈집 딸린 농토를 찾아 나설 무렵이었습니다.

"큰 오빠가 펜션을 하면 어떻겠냐고 하던데…."
"우리가 펜션을?"
"건물은 큰 오빠가 지어주고 우리가 관리해 주면 어떻게냐고."

큰 처남은 통나무 주택을 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집짓는 기술을 활용해 예전부터 번듯한 펜션을 장만하고 싶어 했던 모양입니다. 마땅히 관리할 사람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리 식구가 새 터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내에게 의사타진을 해왔던 모양입니다.

그렇잖아도 민박집을 하자며 노래 불러왔던 아내였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것입니다. 펜션은 민박집에서 한 단계 상승한 것이었으니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펜션을 아무나 하는 중 알어?"
"오빠가 알아서 다 지어 준다니까 그냥 관리만 해주면 되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내 꼬라지를 보라고, 산도적 같은 놈이 뺀드롬한 펜션이 어울리기나 하겠냐구."
"어차피 민박집 할 거니까, 펜션이면 더 좋지 뭘 그래."
"민박? 민박은 또 누가 한대?"

"뭘 그렇게 자꾸 복잡하게 생각해. 어차피 다들 한두 번씩은 여행 떠나잖아, 그럴 때 싸고 편하게 쉬어 갈수 있는 민박집이 있으면 좋잖아, 그냥 지금처럼 우리 집에 놀러 오듯이."
"그거 하고 같혀! 민박집은 돈 받잖아. 돈 받고 재워주게 되면 사람 관계가 어떻게 되겠어? 나도 그 사람들 집에 가면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야 되는겨, 사람 관계가 돈으로 맺어지게 될꺼여."
"민박 안 하면 나도 농사짓고 사는 거, 자신 없어."

민박집은 어느 순간부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긴 아내의 기본 요구사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새 터 잡는 첫 번째 조건은 물 부족함 없는 그것도 뜨거운 물이 잘 나오는 욕실 딸린 수세식 화장실이었는데 거기에 민박집 운영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좀 더 깊숙한 곳에 터를 잡아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하겠다면 반드시 이 조건을 들어줘야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돈을 받아야 하는 민박집이 맘에 걸려서 그렇지 아내의 요구사항은 눈물겹도록 아주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저와 우리 집 두 촌놈들이야 시골 생활을 누려왔다고 할수 있지만 도시내기 아내로서는 다 쓰러져 가는 시골 빈집을 수리해 살아 온 10여 년이라는 세월이 말처럼 쉽지 않았을 터이니까요.

어쨌든 살림집 옆댕이에 방 한 두 칸 늘리면 된다는 민박집조차 내키지 않아 아내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펜션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 말 듣는 순간, 목구멍에 꽉 걸려왔습니다. 가만히 앉아 손님들이 건네주는 돈이나 셈하고 있는 숙박업자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농토가 딸린 빈집조차 구하기 힘든 빤한 주머니 사정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터였기에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집요하게 밀어붙여 왔습니다.

"인효 아빠는 글 쓰면서 농사짓고, 펜션은 내가 운영하면 되잖아."
"혼자서 되겠어? 나는 그런 거 못 혀. 처남이 우리 생각하는 거야 두말 할 것 없이 고맙지, 한량없이 고맙지만 그것도 적성에 맞아야 허는 거지, 숙박업자로 살라구? 난 못 혀."
"내가 한다잖아, 당신은 농사만 지으면 되고."
"그게 말처럼 될 거 같혀."

큰 처남은 아내의 기대감에 가속도를 붙여왔습니다. 터만 구입해 놓으면 당장이라도 펜션을 지어주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는 놈이 처남의 호의를 뿌리치고 마냥 허세만 부리고 있을 처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동안 나름대로 생산적이라 여기며 살아온 삶의 방향을 소비적인 방향으로 백팔십도로 급전환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펜션을 숙박업소처럼 하지 않아도 되고, 거기서 우리가 살림 살면서 편하게 운영하면 되잖아. 당장 이사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가 고속철도 공사는 앞 댕겨 한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할 거야."
"다 때가 되면 좋은 터가 나오기 마련이니께, 쫌 더 알아보자고."
"뭘 조금 더 알아봐,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횐데." 

며칠 내내 티격태격 하면서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서로가 큰 불만없이 동의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았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돈 받지 말고, 그냥 사람들이 오게 되면 오고, 안 오면 그만이고 그런데 찾아보자."
"그래도 어느 정도는 손님들이 올 수 있는 곳이라야지…."
"자꾸만 그런 거 따지면 나는 더 이상 펜션이고 뭐고 손 뗄 겨. 인효 엄마 혼자서 혀."
"알았어 알았어, 원하는 곳을 찾아봐."

일단 처남이 지어 준다는 그 펜션 건물에 몸을 의지해 생활하면서 그 옆댕이에 따로 터를 구해 흙벽돌 한 장 한 장 쌓아가며 보금자리를 마련하면 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펜션을 지어 주겠다는 처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처남이 살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에서 가까운 곳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못해 경기도와 강원도 쪽으로 눈을 돌려 싼 땅을 찾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펜션과 농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땅은 없고

서울과 가까운 곳은 예상대로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싸다고 알려져 왔던 경북 봉화 지역까지 눈을 돌려 봤는데 그 곳 역시 불과 일이년 사이에 쓸 만한 땅은 이미 평당 4~5만 원 이상 올라 있었습니다.  펜션부지와 농지를 동시에 찾아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컴맹에 가까운 아내는 펜션 운영의 꿈에 부풀어 독수리 타법으로 인터넷 여기저기를 기웃거려가며 펜션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별 관심 없는 척하면서 아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펜션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은근슬쩍 컴퓨터 앞을 꿰차고 앉았습니다.

"잠깐만 일루 나와 봐봐, 그렇게 검색해서 펜션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겠어."

그렇게 인터넷에 올려진 온갖 펜션들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이거 뭐, 실내 장식이 완전 호화판이구먼, 하루 이틀 잠자는 디 뭐가 그리 복잡하고 사치스럽게 꾸며 놨다냐."

고개 돌리면 그만인데도 나는 궁시렁 궁시렁 인터넷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는 경기도나 강원도 부근에 자리한 펜션들은 거의 호텔수준이었습니다(금강산 갔을 때 딱 한번 호텔에서 지낸 것이 전부지만). 성수기 비수기 따로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올 수 있게끔 호화스럽게 꾸며놓고 있었습니다. 방 하나 빌려 주는데도 엄청났습니다. 우리 가족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엄두를 낼 수 없는 방 값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가까운 대부분의 펜션들이 물 좋고 산 좋은 골골에 팔자 늘어지게 들어차 있었고 그런 곳은 땅값 또한 엄청났습니다. 주변 땅값을 올려놓는 일등공신이 되고 있었습니다. 평생 농사짓고 살기에는 거리가 먼 곳처럼 보였습니다.

"그만 보자, 괜히 인효 엄마 눈만 버리겠다, 저런 실내 장식 꾸리는 비용으로 차라리 빈 집 구해 수리해서 뱃속 편하게 사는 게 더 낫겠다. 우리 처지에 저런 디는 좀 그렇잖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펜션을 해야지." 
"자꾸만 욕심 부리면 한도 끝도 없다구."

아내는 여기 저기 펜션을 기웃거리고 다니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거워 지고 있는 욕망의 무게에 무감각해 지고 있었습니다. 성수기와 비수기를 따져가며 한 달 벌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셈하고 처남에게 매달 얼마를 줘야 할지를 따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좋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소박한 민박집을 꾸며 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온데간데 없어 보였습니다.

이 모든 욕망이 자신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자연이 어떠니 소박한 사람살이가 어떠니 기분 좋게 얘기 나눠가며 그렇게 살아왔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듯 하여 가슴이 쓰렸습니다.

"오빠는 창평이나 양평 같은 곳이 펜션 자리로 좋다고 하던데?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고."
"말했잖어. 그런디는 땅값 비싸서 엄두도 못낸다구. 거기서 펜션하는 사람들하고는 우리와 살아가는 색깔부터 다르다니께."

처남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수 있는 펜션 자리를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처남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조건이었습니다. 부지 구입비와 펜션 건물 짓는데 수억이 들어간다는데 사람들 발길 뜸한 궁벽진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매제가 한심해 보였을 것입니다.  

"땅 값이 비싸면 오빠가 구입할 수 있고, 그렇게 해준댔어."
"그럼 나는? 나 같이 덜 떨어진 놈이 비까번쩍한 펜션들이 즐비한 곳에서 농사짓고 살 수 있겠어?"
"왜 자꾸만 농사짓는 거하고 연관 시켜, 그동안 경험해 봤잖아 농사지어서 어떻게 먹고 살겠다고."
"농사가 밥 먹여 주지, 사치스런 펜션이 밥 먹여 주남. 나는 그런데서 못 사니께, 알아서 혀!"

별 탈없이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별 탈없이 살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똥배짱을 내세워가며 큰 대자로 뻗어 버렸습니다. 힘겹게 살아온 아내에게 미안해하던 마음자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점점 화가 들어찼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부부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놈의 부부싸움은 그칠 줄 모릅니다. 새 터를 구하러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싸움질이었습니다.

새 터 찾기도 전에 계속 되는 부부싸움, 오! 신이시여

나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우파니싸드의 구절을 읖조려 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늘 작은 소리에 놀라 그물에 칭칭 감기고 스스로 흙탕물에 나뒹굴어 가며 제 성질에 못 이겨 부르르 화를 냅니다. 어리석게도 제 잘난 맛에 푹 빠져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끌어들여 화를 내게 만듭니다.

"그럼 도대체 뭘 할 건대. 새 터 구해 이사 가면 앞으로 방송 원고 쓰는 일도 그만 둘 거 잖어, 대학 강사 일도 그만두고, 대체 농사지어서 몇 푼이나 번다고."
"대학 강사도 마찬가지지, 그거 몇 푼이나 번다고, 적어도 거기 대학생이라는 녀석들은 말여, 조중동이 어떤 쓰레기 신문인지도 모르고, 아예 관심조차 없는 녀석들이 더 많다니께, 그런 녀석들에게 혼자서 주절주절, 무슨 약 장사도 아니고, 그게 뭐가 좋다고, 농사짓는 게 훨씬 뱃속 편하지. 정직하고."

처남이 떠 맡겨 준다는 펜션을 관리 하느니 마느니 아내와 티격태격하고 있을 무렵, 대학 강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대전에 있는 모 대학에서 그동안의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경력을 싼 맛에 사주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이 전 대학과는 달리 학과 교수로부터 전화 한 통이 없었습니다. 노동인력 센터에서처럼 조교를 통해 '할겨 말겨'라는 식의 싸가지 없는 강의 요청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강단에 섰던 일을 크게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학생들에게 비싼 등록금 받아 그만한 교육여건도 갖춰 놓지 않고 손익분기점만 따져 가며 장사꾼 노릇이나 하고 있는, 그런 싸가지 없는 대학 교수들 밑에서 일당벌이로 전락한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쥐꼬리만한 지식을 팔아먹고 있는 내 꼬라지에 시선을 집중하는 몇 몇 학생들에게 한 없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더 이상 강단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제 일이 있듯이 내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농사 얘기는 그만하고, 앞으로 대체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거야."
"땅 한 평 없이도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잖어. 애들도 건강하고."
"그게 뭐가 잘 먹고 잘 살았어, 인효 아빠 고집 때문에 남들 다 쓰는 핸드폰도 이제 겨우 쓰고 있고, 날 추우면 엉덩이 시려 쭈그려 앉아 있기도 힘든 푸세식 화장실에, 거기다가 빨래할 물이나 제대로 나오나."

이쯤 되면 내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나처럼 어리석은 인간은 상대방의 화 기운을 통해 자신의 화 기운을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거시기, 앞으로는 수세식 화장실에 목욕시설 있는 집에서 살기로 했잖어."
"아, 몰라! 오빠가 져 주겠다는 펜션이 싫다면 민박집이라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인효 아빠 뜻대로 하지 않겠어!"

먹고 사는데 큰 걱정거리가 없을만한 돈벌이가 생길 수 있었던 번듯한 펜션까지 포기 했으니 민박집에 대한 아내의 요구는 좀더 강력한 무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민박집을 새 터 구하는 조건에 포함 시키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꼬장꼬장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민박집을 하되 민박집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지 말 것이며 돈 없는 사람들은 없는 대로 최대한 적게 받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자리로 꾸려 나가야 한다.' 민박집에 목을 매게 되면 생활이 힘들어 지니 민박집에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소박하게 생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마지못해 동의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새 터를 찾기도 전에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 생각의 간극이 좁혀지는듯 했습니다. 아내는 원하던 민박집에 대한 답을 얻어냈고 나는 그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조건을 굳힐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 수리해서 살수 있는 빈집 딸린 농토, 땅값이 가장 싼 터를 구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종잇장 하나의 차이가 생각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를수 있듯이 새 터를 놓고 벌이는 우리 부부의 갈등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태그:#새터 찾기, #팬션, #무소의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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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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