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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숲속학교 아쉬람에는 교실이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도를 동경하지 않는다. 꿈에 그리던 깨달음의 나라 인도는 몽환 속에 만 존재할 뿐이었다. 마치 밤안개와 어우러진 판자촌의 야경처럼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윽고 날이 새자 모든 것들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거기서 죽치고 사는 어린 후배들에게 '꿈에서 깨어 돌아가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짜증나는 꼰대(?)였다.

 

그래도 인도인들에게 부러웠던 것들은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할 때 길을 인도해주는 '깨달은 어른(성자)'들과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아쉬람이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목사님이나 신부님, 스님 같은 분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엄숙하고 멀리 있으며 완벽하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쉬람은 우리의 선원이나 기도원, 수도원 같은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요즘은 많이 상업화돼 외국인을 위한 요가나 명상센터쯤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숲속에 초막을 짓고 사는 수행자들의 공동체이자 숲속학교였다. 교실이나 교과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드리 나무그늘에 앉아 스승은 제자에게 은밀하게 구수한 옛날이야기 하듯 가르침을 전해 준다.

 

요가철학이나 명상을 통한 수행방법 외에도 바울들처럼 음악과 시(詩)라는 형식을 통하는 경우도 있고 극한의 고행을 통해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 홀로 아쉬람부터 시작해 수 만 명이 머무는 국제적 요가와 명상센터까지 인도 전역에 수 십 만 개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인생을 4단계로 살았다고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숲속학교(아쉬람)의 구루(스승)에게 보내 우파니샤드 철학을 비롯한 명상과 요가 등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구루를 떠나 사회로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세속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마치고는 다시 숲으로 들어와 수행을 한다. 마지막엔 속세를 벗어난 완전한 출가자로서 수행과 탁발로 생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바울들의 공동체 샤돈바바 아쉬람

 

바울들의 성자로 추앙받는 샤돈바바의 아쉬람에서 1주일을 머물렀다. 사람들은 이곳의 구루인 샤돈바바를 '바바지'라고 불렀다. 바바지는 세속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자로 최고의 영적 지혜를 가진 현자(賢者)를 일컫는 말이다.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 고리의 역할을 하며 신의 현신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카르마(업)를 깨닫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존재다.

 

샤돈바바의 아쉬람은 잠시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대략 30여 명의 바울들이 거주하는 작은 공동체였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도식 '스머프마을'이었다. 파파 스머프처럼 덥수룩하고 인자한 수염을 기른 샤돈바바는 구루로써 아쉬람을 이끌었다. 그나머지는 사두(남자 수행자)와 사디카(여자 수행자)들로 구성되다.

 

아쉬람에서는 특이하게 아이를 공동 양육했다. 물론 낳은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포함해 모든 수행자들을 사두와 사디카로 부르며 그들의 가르침의 젖을 받아먹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과 놀아주고 가르치고 양육한다. 아이들은 나무와 꽃들과 바람과 별들과 새들을 벗 삼아 놀다 지치면 아무나 제 맘에 드는 어른의 어깨에 올라 재롱을 피웠다.

 

아쉬람 주변에는 망고와 야자, 코코넛, 바나나가 풍성하게 익어갔고 배고픈 이들은 누구나 따먹을 수 있었다.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사적소유가 인정되지 않았으며 집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공동소유였다. 같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음악을 통한 탁발공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큰 공연이 있을 때는 가까운 곳은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탔고 먼 곳은 트럭을 이용했다.   

 

아침에 잠이 깨면 누구나 일을 했다. 어떤 이들은 밥을 짓고 또 어떤 이들은 아쉬람 곳곳을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기도 했다. 밖에 나가 시장을 봐오거나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역할에 따라 요리사 스머프, 청소부 스머프, 정원사 스머프, 농부 스머프, 세탁소 스머프로 불렀다. 그들도 그 별명을 아주 좋아했다. 특별한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이들은 '게으름이 스머프'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하는 일이 달랐고 그것이 부끄러움이나 차별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쉬람에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사실 식사문제였다. 요리를 무슨 경건한 수행처럼 했다. 분명 아침 일찍부터 시작은 하는데 무려 2~3시간이나 걸렸다. 5분 만에 배달되는 자장면에 익숙한 '배달민족'에게는 화통 터질 일이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만 요리하는 인도의 조리문화 탓도 있지만 야채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약한 화덕 불에 몇 시간씩 볶는 그 정성은 특유의 향신료 냄새까지 더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게 했다.(덕분에 몇 년을 괴롭히던 위궤양은 말끔히 낳아 버렸다.) 자꾸 주방을 서성거리는 나를 보았는지 요리사 스머프는 '씩' 웃으며 다음날부터 내게 슬쩍 샌드위치를 쥐어 주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쉬람을 찾는 방문객들이 스위티(SWEETY)와 생과자 같은 것들을 시주하기도 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요리사 스머프가 사람 수대로 똑같이 나눠 주었다. 사실 비위 좋은 나도 가장 먹기 힘든 것이 스위티였다. 어찌나 단지 머리가 시리고 진저리가 쳐졌다. 단 것을 싫어하는 탓도 있겠지만 나만 유난히 그랬다. 사람들이 권할 때는 손사래를 치고 도망 다녔다.

 

우리는 모두 회랑이나 나무 밑에서 바나나 잎이나 나뭇잎을 말려 만든 그릇에 밥을 먹었다. 남는 음식 찌꺼기는 개가 먹었고 그릇들은 염소가 해치웠다. 거기다 완벽한 채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음식물쓰레기에 대한 고민이나 따로 설거지가 필요 없는 완벽한 생태적 식생활이었다.

 

샤돈바바라고 해서 궁궐 같은 화려한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똑같이 흙벽돌로 지은 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잤다. 유일한 차이점은 식사를 가져다 드린다는 것뿐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샤돈바바는 장난꾸러기다. 엄숙하거나 경건하지도 않았고 지극히 느슨하고 경쾌하고 발랄 했다. 기괴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놀리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춤을 덩실거리기도 했다. 우리에게 장난을 걸거나 농을 치기도 했다. '애 같은 어른'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이들에게는 '가르치는 것보다 놀아주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같이 장난치며 노는 샤돈바바를 바라보는 수행자들의 눈빛에는 늘 존경심이 배어 있었다. 

 

아쉬람에서는 일반 부부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짝을 지어 살고 자녀도 낳았지만 그 부부관계는 일종의 '도반(깨달음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의 관계여서 서로를 사두와 사디카로 부르며 존중하고 존경했다. 스머패트를 대하는 스머프들처럼 요리나 청소 같은 일들은 주로 남자 사두들의 일이었다. 성별이나 역할에 따른 구별과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수행자는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 받았다.

 

샤돈바바 주변에는 하얀 옷을 입는 일본인 여성 3명이 머리를 빗겨드린다거나 입성을 챙기고 시중을 들었다. 사두와 사디카들은 그들을 '어머니'로 부르며 상당히 존중하는 눈치였다. 내가 '무슬림도 아닌데 부인이 4명이냐?'고 한 사두에게 묻자 '세속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말고 도반의 개념으로 보라'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는 질투심이나 시기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샤돈바바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둘 다 결혼해 아쉬람에서 같이 수행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아들은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외국인에 대해서는 전혀 배타적이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헌신적이었다.

 

본 부인은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로써 세속의 역할을 마치고 아쉬람을 떠나 따로 출가해 수행과 탁발을 통해 깨달음의 길을 가고 있었다. 멜라(축제)에서 간혹 탁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수행자들이 상당히 존경하고 따르는 눈치였다.   

 

저녁 8시. 수행의 시간이 되면 모두 회랑이 모였다. 엄격한 규율이나 철학을 가르치는 딱딱한 자리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모두 엑따라와 아논도, 꼴로딸, 로호리, 도따라와 같은 악기를 하나씩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샤돈바바가 자신의 깨달음을 즉흥적인 시(詩)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고 수행자들은 후렴으로 받았다. 이것이 일종의 설교이자 선문답인 셈이다. 간혹 제자들이 자신들의 깨달음의 시를 스승에게 노래로 불러 보이기도 했다. 이때만큼은 샤돈바바도 달라 보였다. 진지모드였다.

 

사랑의 느낌을 알지 못하는 자와/ 무슨 교감을 나누겠는가?/ 부엉이는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응시하지만/ 태양빛을 보지 못하나니.

 

가장 높은 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겸손에 의해/ 당신은 삶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나니./ 구름은 이 땅의 빈 곳까지 내려오지만/ 우물 속 깊은 밑바닥은/ 환희로 물을 지켜준다. <바울의 노래중에서>

 

경건하고 차분하게 시작된 노래는 시간을 더해 갈수록 열광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샤돈바바의 며느리가 환희에 차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일어나 발작하듯 춤을 춘다. 음악도 빨라지고 격해진다. 춤을 추다 혼절해 쓰러진다. 남편이 가만히 안아다 무릎을 베어준다. 잠시 후 깨어난 그녀는 엎드려 수행자들의 발등에 일일이 입을 맞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이어 '감사하다'를 연발한다. 일부는 구루의 아름다운 시와 심오한 철학의 깊이에 감동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열광적인 부흥성회를 보는 듯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의 입에서는 방언 대신 시가 쏟아진다는 점이다. 나도 미친놈처럼 어우러져 춤을 추었다. 

 

그리고 또 아침이 되면 거북이처럼 한없이 느리고 게으른 아쉬람의 일상이 반복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유토피아)은 없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는 할아버지에게 '개구쟁이 스머프'라는 애니메이션을 선물 받았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딸아이는 웃었고 나는 우울해졌다. 생태, 종교, 문화, 농촌 등등 이름의 동서양 공동체 역사를 살펴보고 실증적 사례도 검토해 보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적용해 보기도 했다. 논문도 발표하고 여기저기에 글도 썼다.

 

그러나 결국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스머프마을엔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들만의 작은 유토피아가 있었다. 아쉬람에서 보았던 것이기도 하다. 스머프마을과 아쉬람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정치사회학이나 공학대신 사람이 맨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오만하게 자신의 생각만 앞세우는 똘똘이 스머프였다.

 

내 산골 차실(茶室) 무화당(無化堂)에는 귀농을 생각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이 차손님으로 간혹 찾아 든다. 그들은 자신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를 이야기 한다. 어떤 이들은 소심해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간혹 마을을 찾아 마음을 달랠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찾아와 행동에 옮기기 전 자문을 구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나는 환상을 심어주기보다 자꾸 찬물을 끼얹는다.

 

"농촌에 산다는 것은 도시에서 누려왔던 특혜(?)를 포기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가난과 잡초와 추위와 외로움이 친구가 돼야 합니다. 공동체의 아이들은 나무와 바람과 별과 땅이 키워줍니다. 그러나 경쟁사회로 나가게 됐을 때 당황할 아이들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슈미트(J. Marc Schmidt)라는 호주출신 사회학자는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라는 글에서 스머프 마을은 자급자족하며 토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전체 스머프들의 공동소유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들이 꿈꾼 공동생활체, 혹은 코뮌(commune)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를 처음 탄생시킨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상 국가를 위해서 통치자와 수호자집단의 사유재산은 금지돼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탐욕의 원인이 사유재산과 사적 인간관계에서 기초한다고 파악했으므로 아내의 공동소유와 아이들의 공동양육도 주장했다. 

 

원시 부족사회는 대부분 그러했고 초기 유대교는 공산주의 공동체로 운영되었으며 기독교 초대교회 또한 사적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공동체생활을 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를 탄생시키기는 했지만 니체는 '철인'에 의한 공산주의적 이상국가 실현을 위해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오웬이나 생시몽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의 농민공동체,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유럽의 생태공동체, 종교공동체까지 유토피아를 찾는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마을만들기' 전문가라는 허영으로 이곳저곳 초청을 받아 강연도 다니고 자문교수라는 이름으로 자치단체와 여러 가지 일들도 해보기도 했다. 과대 포장한 마을로 인해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실상은 나는 그 유토피아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을은 내부에서 붕괴됐다. 상당기간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 보다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가에 대해 더 잘 안다.

 

"생태농법을 통해 돈을 벌고 흙을 빗어 생태주택을 짓고 구성원들이 상생하는 유토피아 같은 공동체를 꿈꾸세요? 단언컨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과 마을은 없습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나는 요즘 들어 '유토피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찾아가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완성된 유토피아에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과정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태그:#아쉬람, #샤돈바바, #바울, #유토피아,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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