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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닉을 아시는지?

'마라닉'은 일본의 야마니시 테츠로 교수가 창시한 '마라톤+피크닉'의 합성어다. 마라닉이라는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어찌보면 약간 놀고 먹고 마시고 적당히 달리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마라닉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야마니시 교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야마니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기록에 집착하면서부터 인간 관계나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놓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자신의 능력만큼 달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마라닉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새로움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 야마니시 교수도 초창기에는 주변에서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명색이 교수인지라 앞에서는 뭐라고 못하고 뒤에서 소곤거려서 괜찮았다고 껄껄 웃는다.

최근 걷기를 포함한 '슬로 라이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슬로 라이프의 한 부류인 마라닉의 원조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청을 받는 형태로 행사에 참여하는 기회를 잡았다.

기본 참가비 일본 돈 5000엔 외에 숙박 및 현지 체류에 필요한 비용의 많은 부분을 지원받았다. 요즘은 외국 대회나 행사를 참가하면 게스트 자격으로 무료 또는 일정 부분 지원을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역시 사람이 한 우물을 파다 보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럽게 체험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장 코스를 달린다
 아름다운 목장 코스를 달린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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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은 소식(小食)한다?

지난 9월 27일 마라닉 행사가 열린 곳은 니가타의 묘코, 조신고원국립공원 일대다. 일본 친구들과 함께 도쿄에서 신간센과 전철을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나가노를 지나 묘코코겐 간이역에 내렸다. 그런데 주변에는 건물 몇 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황무지 같은 인상이다. 나무가 빽빽하게 가득찬 주변의 높은 산들도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이다. 우리는 단지 마라닉 한다고 왔는데 왠지 잘못 온 기분이 들어서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얼마 후 잔뜩 긴장된 우리 앞에 승합차 한 대가 슬그머니 다가 오더니 멈추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예상치도 못한 예쁘장한 여성이 나온다.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아직 젊은 여성이 우리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뭐라고 말을 한다. 조금 전까지 긴장해 있던 친구들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엿보인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묵을 숙소의 주인이라고 말해 준다. 분위기가 한순간 급반전된다. 간이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승합차 안에서는 즐거운 웃음소리만 가득 넘쳐난다.

처음 행사의 집결지는 수기노사와다. 우리는 96년 역사의 타바타야 여관에서 숙박을 하고 수기노사와 마을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환영파티를 함께했다. 역시 원조 마라닉답게 먹고 마시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아 붇는 것 같다. 저녁 만찬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맥주 폭탄 세례를 받으며 니가타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누가 일본 사람들 '소식'한다고 그랬어? 순 뻥이다!

마을사람들이 정성껏 준비한 환영 파티
 마을사람들이 정성껏 준비한 환영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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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동행한 일본 친구들
 같이 동행한 일본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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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니가타

몇 년 전 인근에서 커다란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하천 곳곳에서는 복구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간 중간에 있는 체크포인트(물과 간식을 주는 곳)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고장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마라닉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쉬엄쉬엄 자기의 능력껏 달리면 된다. 그러면 걸어도 되는가? 물론 걸어도 되고 힘들면 차를 타고 된다.

그러고 보니 마을 입구에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현수막에는 '마라닉 행사가 열리고 있으니 도움을 요청하는 참가자는 도와주세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러니 세월이 가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고 자신의 수준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가면 된다.

나도 중간 중간 마을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설명을 하면 의자에 앉아 주는 대로 다 받아 먹으며 경청을 했다. 물론 현지 사투리가 일부 쓰이기에 100%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물론 표준어를 사용해도 못 알아 듣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스토리는 알 수가 있었다. 경청하는 외국인이 귀여웠는지 자꾸만 자꾸만 먹을거리를 건네준다.

이제는 도대체 구분이 안 간다. 내가 먹으러 왔는지 달리러 왔는지… 배는 남산만 하게 튀어 오르고 무거워진 몸은 중심이 안 잡힌다. 같이 가는 유카꼬가 그만 먹고 가자고 해도 자꾸만 자꾸만 손은 만주로 향하고 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여기저기 먹을 것에 손이가 오른손 왼손 자꾸만 손이가…" 예전 어릴적 과자 CF송이 생각난다.

중간에 밤도 따서 먹기도 했다
 중간에 밤도 따서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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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마라닉은 출발점을 기준으로 총 6개의 코스 56km를 달린다. 제한시간은 8시간이지만 별 상관없다. 코스 구성은 철저하게 작은 길을 뛴다. 그리고 인근의 유명 지역을 발로 찾아 갈 수 있도록 짜여져 있으며, 코스의 절반은 트레일 코스로 고원 목장과 숲속에 파묻혀서 신선한 산소에 취해서 달릴 수 있었다. 행사 주최팀은 '러닝 세계의 친구'라는 모임으로, 야마니시 교수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서 모인 달리기 오타쿠(한 가지 취미에 빠진 마니아) 중에서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다.

나도 한가닥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지라 행사 전날부터 다음날까지 참으로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국적, 나이는 달라도 추구하는 세계관이 비슷하기에 친구가 되기 힘든 일본 사람들과 단 하루만에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초반의 마을 인근 코스는 온통 주변이 메밀밭이다. 나가노와 이곳은 메밀국수가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메밀 축제 때는 온 동네의 소바 가게를 돌아다니며 공짜로 시식할 수 있는 행운도 있다고 한다. 더욱이 니가타의 소바는 흐르는 차가운 물에 넣어 먹는 맛이 예술이라고 한다. 나도 그동안 방송에서만 봤던 니가타 소바를 이곳에서 처음으로 맛을 봤다. 뭐든지 원조가 좋다는 선입관 때문인지 보는 순간부터 입안의 침샘이 터지며 나의 식욕을 자극한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소바를 한보따리 사왔다.

일본의 유명 트레일레이스 선수 이시가와 히로키(오른쪽)와 함께
 일본의 유명 트레일레이스 선수 이시가와 히로키(오른쪽)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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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트레일 코스가 시작된다
 본격적인 트레일 코스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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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아니면 말고...

3개 코스를 지나 본격적인 장거리 구간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묘코고원의 조신고원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코스다. 누가 고원지대 아니랄까 계속되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해발 1330미터의 최고점을 지나자 내리막이 시작된다. 그동안 아껴두었던 질주 본능을 발휘한다. 다음 체크 포인트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고백하자면 배가 고파서 뛰었다.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그 동안 먹은 음식들을 에너지로 다 태워버리고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다. 얼마 전 체크포인트에서 보았던 커다란 포도가 눈에 아른 거린다. 배가 불러 그냥 지나친 게 지금은 후회스럽다.

그 전의 코스에서는 못 느꼈는데 해발이 높아서인지 주변의 산들이 붉은 색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단풍이 예년보다 빨리 찾아 온 것이 우리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그런 것 같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잠시 배고픔을 잊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낙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수만개 이상의 낙엽이 우리들이 달리는 길에 함박눈 같이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잠시나마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환상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어 눈앞에 녹색의 푸르름이 펼쳐진다. 그 유명한 묘코고원의 목장 지대에 도착한 것이다. 군데군데 한가로이 소들이 풀을 뜯으며 지나가는 우리들을 바라본다. 호기심 가득한 송아지는 마치 너풀너풀 춤을 추듯이 우리와 나란히 달린다. 정말 영화가 따로 없는 완벽한 그림이다.

가을이 무르익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무르익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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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고 아름다운 조신고원국립공원
 평온하고 아름다운 조신고원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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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코스에서는 야마니시 교수가 직접 길 안내를 했다. 그런데 한 바퀴 도는 데 5km인 코스에서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한참을 달린 후 야마니시 교수가 한마디 한다.

"아! 여러분 우리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놀라서 어리버리한 우리들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한마디 한다.

"하하하, 여러분은 원조 마라닉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어, 이산이 아닌가?" 이건 완전히 '야폴레옹'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한 마라닉은 분명히 달리고 있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이 천천히 가는 시간 여행이었다. 이전에도 나름대로 즐기면서 달린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어떻게 즐기면서 달리는지에 대해서 한수 배운 것 같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자연을 벗 삼아 달렸던 1박 2일의 마라닉. 자연이 주는 선물일까? 나는 내년에 새롭게 런칭하는 '트레일레이스'를 멋지게 만들 수 있다는 용기가 확실히 생겼다.

목장길 달리기
 목장길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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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마운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유지성 기자(홈페이지: www.runxrun.com)는 사막 트레일, 오지 레이스 전문가. 칼럼니스트,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 남극 레이스, 히말라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Rock and Ice 울트라 등의 한국 에이전트이며, 국내 유일의 어드벤처 레이스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태그:#유지성, #트레일레이스, #마라닉, #마라톤, #오지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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