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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을 깨고 대권 도전에 나선 드라마 속 미실.
 오랜 침묵을 깨고 대권 도전에 나선 드라마 속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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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밋밋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구도가 다시 급변하고 있다. 덕만공주(이요원 분)에 이은 김춘추(유승호 분)의 대권도전 선언을 계기로, 신라 정계는 덕만-춘추를 중심으로 신속히 재편되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덕만 캠프에서는 김용춘(도이성 분)이 춘추 쪽으로 이탈하고, 미실 캠프에서는 세종(독고영재 분)과 설원(전노민 분)이 춘추를 사위로 삼기 위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종 측과 설원 측은 심지어 서로 칼을 들이대는 활극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각 세력이 저마다 '꿈'을 꾸며 새 둥지를 분주히 찾고 있을 때에 "다들 꿈 깨!"라며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미실(고현정 분)이었다. 한동안 현실정치를 외면한 채 낮이고 밤이고 줄곧 잠만 자다가 갑작스레 서라벌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던 미실은 한밤중에 서라벌로 돌아와 세종과 설원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제가 직접 나서보려 합니다!"

"꼭 한 번 왕후가 되어보고 싶다"던 미실이 이제는 왕후 이상을 넘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미실을 보고 덕만이 춘추에게 말했다. "다 우리 때문이야"라고. "여자인 내가 대권에 도전한 것과, 진골인 네가 골품제도는 천하다고 선언한 것이 미실을 일깨워준 것이야!"라고. 여자인 덕만이 왕위에 도전하는 모습과 춘추가 골품의 벽에 도전하는 모습이 미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짐과 동시에 그의 내재된 욕망을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김유신(엄태웅 분)의 풍월주 취임(612년) 당시에 미실(546~549년 출생)의 나이가 이미 64~67세였으므로, 이제는 60대 후반 혹은 70대에 접어들었을 미실로서는 정치인생의 마지막 도전에 나선 셈이 된다.

"제가 직접 나서보려 합니다"라는 말이 정확히 대권도전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드라마 속 미실은 여왕의 자리를 꿈꾸고 있거나 아니면 정치적 위상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다. 덕만과 춘추를 중심으로 움직이려 했던 드라마 <선덕여왕> 속 정치세력들은 이로써 미실의 행보를 일단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생 말년, 보종의 어머니로 살았던 '미실'

13일 방영된 <선덕여왕> 제42부에서는 위와 같이 미실이 생애 최후의 정치적 도전을 결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미실 역의 배우가 여전히 젊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어서 제대로 실감하기 힘들겠지만, 이 당시의 미실은 이미 60대 후반 혹은 그 이상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의 이야기대로라면 미실은 정치적 위상의 극대화를 향해 인생 최후의 도전에 나선 셈이 된다.

그럼, <선덕여왕> 제42부의 줄거리는 인생 말년의 미실을 얼마나 충실히 묘사했을까? 60대 후반 혹은 그 이상에 접어든 미실은 과연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인생 막판에 또 한 번의 정치적 모험을 시도했을까?

미실의 최후를 알려주고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16세 풍월주 보종 편에 따르면, '아주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미실은 '정치인 미실'이 아닌 '어머니 미실'로서의 꿈을 위해 자신의 인생 말년을 바쳤다고 한다. '보종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장식하는 데 특히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제15세 풍월주 김유신 편에 따르면, 미실은 제14세 풍월주 호림(재임 603~612년) 밑에서 제2인자인 부제를 지내던 보종에게 "부제 자리를 유신에게 양보하라"고 권유했다. 미실로서는 유신의 외할머니인 만호태후와의 제휴를 강화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기 풍월주 자리가 확실시되던 보종은 그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야 출신의 신출내기인 유신에게 자기 지위를 양보하고 말았다. 보종의 양보를 발판으로 부제에 오른 유신은 3년 뒤인 612년에 제15세 풍월주에 올라 신라 최고의 주니어 엘리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드라마와 달리 유약하고 여성스러웠던 '보종'

역사 속 미실은 자신의 아들인 보종을 보살피며 말년을 보냈다.
 역사 속 미실은 자신의 아들인 보종을 보살피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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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풍월주에 오른 유신은 보종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제17세 풍월주 염장 편에 따르면, 보종의 양보 덕분에 부제 및 풍월주가 된 유신으로서는 마땅히 보종에게 부제 자리를 주어야 하는데도, 유신은 보종이 아닌 염장이란 화랑을 부제 자리에 앉히려 했다.

염장이 부제 자리를 고사하고 보종을 적극 추천한 덕분에 보종이 유신 밑에서 다시 부제가 되기는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유신의 행동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유신은 보종을 무시했던 것이다.

유신이 보종을 무시한 이유는 보종이 유약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보종 편에 따르면, 보종은 정이 많고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마치 여자처럼 온화하고 순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회의를 할 때에도 "네", "네"라는 말만 할 뿐, 자기 생각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했다고 한다.

비교적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드라마 속의 보종과 달리, 실제의 보종은 나쁘게 말하면 유약한 인물이고 좋게 말하면 외유내강 형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보종의 성품이 그러했으니, 기세당당한 유신의 눈에는 보종이 하찮게 보였을 만도 하다.

그런 보종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팠던 사람은 보종의 어머니인 미실이었다. 말년의 미실에게는 그런 아들이 늘 걱정거리였던 모양이다. <화랑세기> 보종 편에 따르면, 미실은 유신에게 "내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주기 바란다"는 청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유신은 "걱정 마시라"고 답했다고 한다.

보종보다 나이 어린 유신에게 자기 아들의 장래를 부탁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보다 46~49세 정도 어려서 사실상 손자벌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595년 출생)에게 자기 아들의 미래를 간절히 당부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만큼 말년의 미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아들 보종의 미래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통했는지, 유신 밑에서 부제 자리에 복귀한 보종은 유신에 이어 무사히 제16세 풍월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한때 유신에게 무시를 받아 밀려날 뻔 했던 보종이 어머니의 후원 덕분에 화랑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실 생애의 최후 도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들 보종을 풍월주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미실 인생의 최후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화랑세기> 보종 편의 기록 때문이다.

미실, 자신 인생 담은 수기 700여권 쓰다

<화랑세기> 보종 편에서는, 미실이 유신에게 자기 아들을 부탁하고 보종이 무사히 풍월주에 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뒤에 곧바로 미실의 죽음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미실은 아들 보종이 풍월주에 오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사망한 것이다. 정확한 사망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610년대 중반에서 62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이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실제의 미실은 인생 막판에 "이제는 제가 직접 나서보려 합니다"라며 대권판도를 흔들어놓은 게 아니라 사실은 아들 보종을 풍월주로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의 최후 도전은 보종을 풍월주 자리에 앉히는 일이었다. 정치인 미실이 아닌 어머니 미실로서의 '소박한' 꿈을 그는 꾸었던 것이다.

한편, 아들 보종의 앞길을 닦아두는 일 외에, 미실이 인생 막판에 공을 들인 또 하나의 일은 자신의 자서전을 완성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보종 편에 따르면, 미실이 죽은 뒤에 보종이 어머니의 수기(手記) 700권을 입수해서 직접 베꼈다고 한다.

붓으로 쓴 700권 분량이면 오늘날로 치면 아마 100권이 넘지 않을 것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100권 미만의 책을 남겼다 하더라도 자서전을 100권씩이나 쓴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므로, 그중 상당수는 일기 성격의 글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종이 어머니의 유고를 소장하지 못하고 힘들여 베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원문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자신의 인생과 관련하여 그 많은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미실이 젊어서부터 꾸준히 자기 인생을 글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 말년에 가서는 더욱 더 이 작업에 박차를 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서전 속에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겼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현재에는 기록 전체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그저 안타깝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난 8월 13일자 MBC <뉴스후> 보도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라진 상당수의 고서들이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1028권의 규장각 도서를 대출신청도 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가져간 이래 아직까지 '연체료'도 지불되지 않고 있다고 하니, '혹시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미실 자서전의 일부만이라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집착일까. 일본측이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으니, 우격다짐으로 빼앗아 올 수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말년의 미실은 위와 같이 유약한 아들 보종의 앞길을 단단히 지켜주는 한편, 자신의 인생을 꼼꼼히 글로 남기는 데에 주력했다. 다시 말해, 그는 후손들의 삶을 지켜주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조용히 정리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미실, #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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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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