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워싱턴의 정치 낭인 이명박

나는 82년 가을에 미국으로 건너 가, 89년 여름까지 텍사스 주 휴스턴에 7년 가까이 머물면서 휴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마쳤다. 그리고 나서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이 되어 2000년 6월 귀국할 때까지 11년간 워싱턴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이명박'이라는 이름과 존재를 그리 두드러지게 알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을 조금 가까이서 접했던 것은 1999년 워싱턴에서였다. 98년 말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1년 동안 조지워싱턴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워싱턴에 머물렀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던 것이다.

96년 9월,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김유찬씨에 의해 선거법 위반사실이 폭로되었고, 한 달 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어, 97년 9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98년 2월, 그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두 달 뒤, 서울고등법원은 선거법 위반 항소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400만 원을 선고하였으며,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실제로 99년 4월, 상고가 기각되고 원심이 확정되었음) 피선거권이 박탈당하게 되자, 서울시장 경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리고 나서 98년 말 워싱턴으로 갔다. (그 뒤 2000년 8.15 대사면 때 포함되었고, 그래서 2002년 6월,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 수 있었다).

이명박 전 의원이 워싱턴에 머물렀던 98년 말부터 1년간은 어찌 보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외로웠던 낭인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젊은 나이, 현대그룹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는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뒤 서울시장이라는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다 보좌관의 고발로 그의 정치행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가 워싱턴에 머물던 때, 한국 특파원들 일부와 골프를 치면서 가깝게 지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워싱턴에 와 있는 정치 낭인들의 행동범위라는 건 뻔한 것이었다. 시간 나면 골프 치고, 일요일 되면 한인 교회에 나가고, 평일이면 한인 음식점 등에서 한국 동포, 대사관 직원들, 또는 특파원들과 식사하거나 술 마시고, 가끔 있는 한국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서 귀동냥하고… 대략 그런 것이다. 미국의 무슨 대학 객원 연구원이라는 것도 이름만 그럴 듯 하지, 실제를 들여다 보면 속빈 강정이다. 대학에서 연구실조차 주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저 책상 하나, 도서관 출입증 정도 주는 게 전부인 경우도 허다하다.

당시 워싱턴에 머물던 이명박 전 의원의 행동반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한국 특파원들 뿐 아니라, 대사관 직원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 당시는 이명박 전 의원이 외로웠을 때여서, 워싱턴에서 함께 어울렸던 인사들과는 보통 이상의 인간적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으로 정치생명이 끝날 것 같았던 그에게 워싱턴 기간은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로 "역경을 넘기고 정치적 재도약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시기였다". 그래서 이 당시 그가 맺었을 인간적 교류와 관계는 '워싱턴 커넥션'이라 불러도 좋을 그런 끈끈함과 친밀감이 있었을 터였다.

워싱턴 커넥션

그러기에 다음 명단을 훑어보면,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워싱턴 커넥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명박 정권 출범 당시 주요 자리에 이명박 전 의원이 99년 워싱턴에 머물고 있을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
김성환 외교통상부 제2차관: 당시 주미 대사관 경제 참사관.
김영호 행정안전부 제1차관 : 당시 주미 대사관 행정자치부 주재관.
홍석우 중소기업청장 : 당시 주미대사관 산자부 주재관

여기에 또 다른 주요 인사가 있다. 바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진두 지휘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다. 당시 주미 대사관 법무 협력관이었던 그는 이명박 정권 출범 뒤인 2008년 3월, 대검 기획조정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올 1월 검찰 내 '빅 4'로 알려진 대검 중수부장으로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99년 3월 현재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 명단에 나오는 이름들 중 이명박 정권 출범 때 눈에 뜨인 인사들이다. 이들과 이명박 전 의원이 워싱턴에서 서로 만나 구체적으로 어떤 교분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99년 이명박 전 의원이 워싱턴 정치 낭인 시절, 당시 주미 대사관 직원 명단. 밑줄 친 인사들이 이명박 정권 출범 뒤 요직에 임명된 인물들.
▲ 1999년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 명단 99년 이명박 전 의원이 워싱턴 정치 낭인 시절, 당시 주미 대사관 직원 명단. 밑줄 친 인사들이 이명박 정권 출범 뒤 요직에 임명된 인물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워싱턴 커넥션'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인물이 있다. 당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던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다. 신재민 차관은 워싱턴 인연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초기에 그의 캠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워싱턴에서 기자들, 공무원들과 함께 골프 라운딩이 이뤄졌고, 운동 후에는 함께 토론을 벌이곤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뒤 귀국하여 <한국일보> 사회부장, 정치부장 등 요직을 거친 신재민 차관은 <한국일보>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한국일보>를 떠나 조선일보사로 옮겨 <주간조선> 편집장을 맡은 인물이다. <한국일보>에 남아 있는 후배들의 배신감과 환멸이 컸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지금이야 대부분 신문이 조간이지만, 상당기간 동안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석간이었다. 조간신문이 두 개 밖에 없다 보니 두 신문 사이의 경쟁은 그야말로 불꽃을 튀는 맹렬한 것이었다. 내가 <동아일보> 기자로 뛰었던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일보> <조선일보>의 사세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히려 <한국일보>가 장기영 사주의 열정에 힘입어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던, 젊고 힘 있는 신문이었다.

그처럼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신문으로 옮겨 갔으니, 그것도 <한국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 사회부장, 정치부장 등 온갖 요직을 다 거친 뒤 회사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월급 많이 주는, 잘 나가는' <조선일보>로 옮겨 갔으니, 남아 있는 <한국일보> 후배기자들의 낭패감과 배신감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오만, 무모, 권력 도취 그리고 신재민, '언론3적'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그는 이명박 대선 캠프에서 정무기획을 맡았고, 이명박 후보를 매일 아침 만나 1일 보고를 하면서 언론보도를 비롯한 정세를 종합하여 브리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건 누구건 매일 아침 만나서 첫 보고를 하는 인물이 가장 힘이 센 실세가 되는 법이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힘을 과신한 탓인지, 이명박 정권 출범 뒤 말을 함부로 하기도 했다. YTN, MBC, 그밖에 언론과 관련하여 정제되지 않고 거칠게 나오는 그의 발언을 보면서 오만, 무모, 권력 도취, 그런 단어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 등 이명박 정권 실세 인사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들 권력이 마치 무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과 행동을 해왔다. 그랬기에 지난해 6월 이들은 언론노조, 시민단체, 야당으로부터 '언론 3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신재민 차관은 나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거침없는 말을 했다. 나에 대한 사임, 해임 압박이 심하던 지난해 7월, 그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KBS 사장을 해임할 수 있다"면서 "만약 해임 사유가 정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무효소송을 해서 법원에서 판단하도록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이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판단에서 나왔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당시 정권 내부에는 'KBS 대응책'이 마련되었을 것이고, 지휘부가 없다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것이 그 뒤의 일이다. 감사원, 검찰, 국세청, 교육부,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가 마치 한 사람의 지휘자 손끝에 따라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처럼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마치 톱니가 물리듯 착착 '해임'을 향해 진행되었다.

신재민 차관은 지난해 7월, 또 "KBS 사장의 거취문제를 정부의 방송 장악 의도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뒤에 진행되어 온 일련의 사태들은 '방송 장악'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으니, 그의 말은 궤변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방송 장악' 하지 않으려면 뭣 하러 그렇게 온갖 권력기관들을 동원하여 무리수를 둬가면서 KBS 사장을 해임하고, '대책회의'를 하고, 대통령 후보 특보들을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들어가면서 YTN 등에 앉히려 그 난리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청계천 통수식 생중계 안해줬다고 화낸 그들

'이명박'이라는 이름과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 경험한 것은 그가 서울시장으로 재임 중 청계천을 복원하여 통수식을 가졌던 2005년 가을이다.

2005년 10월 1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동안 청계천 출발점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청계광장에서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여야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각계 인사, 시민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통수식이 있었다.

지난 2005년 10월 1일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지난 2005년 10월 1일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허태주

관련사진보기


이 행사가 열리기 전, 이명박 서울시장과 그의 가장 큰 정치적 동지인 이재오 전 의원(당시 그는 문광위 소속이었다) 측으로부터 KBS에서 이 행사를 생방송으로 진행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실제, KBS의 결산 심사를 하고, 국정감사를 하는 문광위 위원들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KBS 임직원들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요청이 내게 직접 오지는 않았다. 당시 KBS 안팎에는 정연주 사장에게 무얼 부탁해서 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다. 나는 웬만한 결정권은 본부장과 그 실무팀에 이미 넘겼던 때다. "가장 힘없는 KBS 사장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으며, 자율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려 했다.

통수식 관련 이야기는 우연한 기회에 보도본부 간부에게서 나중에 전해 들었다. 보도본부에서는 통수식 중계방송이 어렵다는 뜻을 이미 전달했다는 것이다.

보도본부 쪽의 반대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오후 6시, 저녁 7시대의 방송 편성을 바꾸는 것이 매우 힘들뿐더러, '서울시 행사'를 전국적으로, 그것도 상당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대신 저녁 7시 KBS 1TV '뉴스 네트워크' 시간에 현장과 연결하여 길게 뉴스로 다뤄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 결론이 내려진 것조차도 훨씬 뒤에 알게 되었다. KBS는 그때 이미 그렇게 자율의 시대를 즐기고 있었다.

사실 홍보 효과의 측면에서 보면, 그 행사를 생중계를 통해 지루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시청율이 높은 뉴스 시간에 현장과 연결하여 제대로 보도해주는 것이 훨씬 그 효과가 큰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다뤄주면 오히려 이명박 시장 쪽에는 잘 된 것으로 받아들이겠거니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결국 그렇게 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이명박 서울시장과 주변 정치권에서는 이 일을 가지고 두고두고 괘씸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를 그 뒤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정연주 사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 인사'이고, 그래서 그가 이명박 서울시장 등 한나라당 쪽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해 통수식 생중계를 못하게 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나로서는 좀 억울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KBS 사장으로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업보인 것을.

(다음 주에 계속합니다.)


태그:#정연주, #정도, #이명박, #KBS, #워싱턴 코넥션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