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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8. 10 (월) - 첫째 날

 

     우리집에는 중학교 3학년 수험생이 있으니, 리프레시 휴가동안 모두 함께 다닐 수는 없다고 아내는 잘라 말했었다. 그래서 여러 궁리 끝에 가족과 4일, 친구와 3일, 혼자 5일, 주말은 가족과 함께, 이렇게 계획을 세웠다. 친구들 여럿이 함께 가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권영진과 남문수, 둘이만 3일 동안 가게 되었다.

 

     첫째날, 서현역 앞에서 나의 오랜 친구 권영진을 만남. 영동고속도로가 막힌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여서 판교 톨게이트로 들어가지 않고 용인-신갈-42번 국도를 타고 이천까지 달려감. 이천에서 영동고속도로 진입 - 여주, 만종, 강릉, 경포대까지 한숨에 달려옴. 한 번도 막히지 않았음. 차안에서 우리는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 나눔. 중요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

 

     태백산맥을 넘어서면서, 싸~ 한 느낌. 차가왔다. 말로만 들어왔던 동해안 저온현상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아 ... 물에는 못들어 갈지도 모르겠구나... 부산 앞바다하고 다르넹 ... ㅠ.ㅠ. ... 잠시 복잡한 생각.

 

     경포대의 강릉초당두부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권영진은 모든 비용을 반반씩 나누자고 했지만, 내가 많이 내겠다고 조정했다. 내가 나이도 많고, 내가 가자고 했으니 내가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경포대 바닷가를 눈으로만 보며 거닐다가, 저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과 욕구가 피어 올랐다. Why Not ???? 안될 이유가 당연히 없지. Snorkel 입에 물고 잠수를 시작했다. 경포대 앞바다 물속은 그리 깨끗하지 못했다. 방파제 옆이었는데, 부유물질이 많았고, 방파제의 흔들거리는 검은 수초는 공포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희한하게도, 대기는 차가왔지만 바닷물은 그리 차지 않았다. 오히려 물속이 따뜻했다.

 

     수영을 마치고, 7번국도를 타고 남쪽의 삼척으로 향했다. 국도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동해고속도로에 들어가서 삼척으로 나오는 것이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었을 텐데 ...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서 7번 국도를 탔으나 시간이 꽤 걸렸다.

 

     동해안을 따라 7번국도변에 있는 수로공원에 잠시 들렸다. 지체 높은 아름다운 부인에게 높은 절벽의 꽃을 따 주며 유혹했었다는 노인. 삼국유사에 나오는 부부클리닉 이야기. 처용가, 헌화가, 구지가 등등, 이름은 달리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설화. 여성을 논이나 밭처럼 소유물로 인식하던 시대의 이야기. 천년쯤 전의.

 

      삼척에 5시쯤 도착. 밥 먹기 전에 밥보다 좋아 하는 테니스 한 판. 그 한 판이 늦어졌다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거 서로 안 질려고 엎치락 뒤치락 죽기살기 한 판이 되어버렸다. 칼을 뽑았으니 둘 중에 하나는 이기고 하나는 지는 것이 승부세계의 당연한 논리이다. 최근 성적은 권영진에게 늘 졌지만, 전에는 대등한 관계였다. (3년쯤 전에 ... ^_^) 그 관계를 여기 삼척에서 회복하리라 !!! 영원히 기억에 남을 승부를 펼치리라 !!!

 

      정말 죽기살기로 뛰어 다녔다 ... 3일동안 근육통 휴유증으로 움직임이 불편할 정도로 ... 권영진의 벽은 높고 단단했다. 3 셋트 했는데 모두 져버리고... 한 번도 못 이기고... 땀에 절고 여기저기 쑤시고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밤 9시쯤 우리 목적지 장호항에 도착. 해안민박에 숙소를 정하고. 횟집에서 실컷 배부르게 식사. 소주 1병 나눠 먹음. 65,000

 

     첫날의 잠자리는 편하지 않았다. 둘이 자기에 좁은 방은 아니었지만 , 짐을 어수선하게 풀어 놓으니 발에 대이고. 어수선 ~ 어수선 ~ 권영진이 전에 같이 잘 때는 코를 안골았는데, 이번에는 심하지는 않지만 미세하게 , 약간 골았다. 짜식. 늙었구나. 나도 밤에 어지간하면 곯아 떨어지는 편인데, 어째 차안에서 너무 많이 잤는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고 있는데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나는 쉽게 꿈나라로 빠졌다 ...

 

 

2009. 08. 11 (화) - 둘째날.

 

     우리는 7시쯤 일어나서 수영복 차림으로 나갔다. 물속에 바로 들어가기는 좀 차가운 날씨. 흐흐 ... 이럴 줄 알았지. 이런 것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거든. 몸을 좀 덥혀야지. 잠시 동안의 스트레칭. 해안선으로 달리기. 멀리 보이는 등대를 돌아서. 달리는 동안 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파도소리와 친구, 달리기. 거듭 , 우리는 행복했다.

 

     두 남자들이 이러니 , 두 집의 여자들이 의심한다.

"당신 혹시 ... 사귀는 거 아냐 ???? ???? #@@@ ???

그래. 사귀는 것은 맞아. 당신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라. 근데 Erotic 하지는 않으니까, 동성애는 아니야.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두 집에서는 이제 이해한다. 두 남자들이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를. 자기들이 못해주는 무엇인가를 서로에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가령 아침에 함께 일어나서 같이 달린다든가, 게임을 한다든가, 편안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든가 ...

 

     여름 아침, 30분 정도 달리기는 땀을 흠뻑 흘리기에 알맞았다. 체온은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저절로 내려가기에는 오래 걸릴 것이다. 한참 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 쉬어 호흡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장호항의 물속은 경포대와 비교되지 않았다. 제주도와 비교해야 될까 ? 투명하고 깨끗했다. 아주 멀리, 깊은 곳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장호항 앞의 작은 섬을 한 바퀴 돌면서, 동해안의 산들이 높고 험준한 것처럼 해저지형도 어쩌면 저리도 비슷한지 ,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갑자기 물이 깊어지고, 바닷속에도 높은 산과 산 사이처럼 계곡이 아찔하게 있었다. 그 계곡 위를 무중력 상태의 우주인처럼 돌아다녔다. 지구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 바다. 중력이 적용되지 않는 그곳에서 높은 계곡 위를 신선처럼 노닌다.

 

 

 

 

 

     아침을 안 먹고 한참동안 놀았더니 슬슬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니 먹자. 라면 하나씩 삶아 먹으면 충분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시간. 파라솔을 펴서, 포도를 씻어 먹으며. 책을 펼쳤다. 국방부 금서라는 그 유명한 책. Bad Samaritans. 국방부에서는 금서로 지목했지만, 국회도서관 대여순위 1위라는 그 책. 우리나라 사람 장하준 교수가 쓴 책이지만 영어원서를 번역해서 그런지, 내용이 좀 어려웠다. 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Keynesian 의 주장. 선진국에 이르기 위하여 자기들은 보호무역을 했으면서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보호무역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IMF 를 앞세워 "네 힘으로 올라와 !!!" 라고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자들. 휴가지에서 가볍게 볼 책은 아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을 들고 졸음이 오기도 전에 회사에서 전화 걸려옴. 1시간 정도 전화기 붙들고 핏대 세움. 밥줄이니 소홀히 할 수 없는 전화. 일이 심하게 잘못되었다는 내용. 미치겠다는 불평. 그러나 휴가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수습... 수습하자.

 

     덥지 않은 날씨인데, 비까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다. 12시쯤 되어서 삼척의 환선굴을 관람하러 길을 나섰다. 1시쯤 도착하여 막걸리, 메밀전, 감자전 점심으로 먹음. 幻仙窟은 환상적이었다. 환선굴의 "幻"자가 "환상"할 때 그 "환"자이다. 이렇게 큰 동굴이 있다니. 5억3천만년전에 생성되어 성장해온 동굴. 희한한 모양. 공룡들이 살던 그 시절에 생성되어 오늘날까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는군. 내가 좋아하는 주제.

 

     천천히 읽어보고, 꼼꼼히 관찰하고 싶었다. 아, 처음에는 천천히 했다. 1시간 정도 코스라니. 까이꺼 급할 것 없었다. 시간 맞춰 서둘러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생리적인 압박만 아니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극단적인 생리적인 압박에 시달려본 경험이 있는가 ??? 미칠 듯이 소변 혹은 대변이 급해본 기억. 유모어 우스갯소리에서나 들어봤지, 실제 경험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날 경험했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느낌. 이러다 진짜 터져서 병원에 실려 가지 않을까, 불길한 생각.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화장실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올라올 때, 군데군데 씌여 있기를 "화장실입니다", "이곳은 마지막 화장실입니다", "꼭 들러가세요" 등등 유별나게 화장실을 강조하는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 개무시하고 한 번도 듣지 않았다 ... 처절하게 복수당하는 느낌. 점심때 막걸리 먹었죠, 환선굴 안에는 10 ~ 15 ℃ 정도의 낮은 온도죠, 일 보랄 때 안봤죠, 이런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환선굴 안에서 나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뻔했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좁은 관광통로를 날듯이 뛰어 내려와야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창백한 얼굴로. 환선굴이 아니라 환장굴이었던 기억.

 

     삼척 여행을 생각하는 분들께 Hard Core Tip. 환선굴 인터넷 찾아보면 관련단어로 "대금굴" 이라고 나오는데, 대금굴은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하루에 둘 다 돌아보려면 예약을 해야 된다는 의미. 대금굴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기차를 타고 관람한다. 인기가 좋다고 한다.

 

     환선굴을 나와서, 삼척온천에 가서 2시간 정도 느긋하게 쉬다 나옴. 사우나 카운터에 일하는 아저씨에게 맛있는 식당을 알아보니 "정라식당"을 알려줌. 정라식당의 도루목 찜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도루목 물고기 찜. 임진왜란 때, 왜넘들의 칼끝을 피하여 황해도 어디까지 도망간 선조에게 백성들은 없는 살림이지만 목어(木魚)를 정성껏 요리하여 올렸다. 선조는 맛있게 먹고, 맛있는 이 물고기의 이름을 "은어"라 하라고 명했다. 왜란이 끝나고 파난길의 그 음식이 생각난 선조가 다시 먹어봤으나 , 이미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그의 입에 담백한 고기맛이 맞을 리 없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어리석은 군주였던 선조는 "도로 木이라 하라" 고 명하였다는데서 유래된 물고기 이름.

 

     소주 한 잔이 생각났으나, 운전을 하고 가야하기 때문에 자제했다. 10시쯤 숙소에 돌아와 선덕여왕 TV 보다가 잠이 들었다. 첫째날과 달리, 둘째날은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잠들어 버렸다.

 

 

2009. 08. 12 (수) - 셋째 날

 

     셋째날. 여행의 마지막 날이 화창하게 밝아왔다. 전날과 비슷하게 아침에는 햇살이 비치고, 11시쯤 되어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오후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는 날씨.

 

     우리는 전날과 비슷하게 수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서서 달리기와 잠수를 즐겼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닷속 이었다. 간혹 바위에 가린 짙은 어두움과 수초, 바위틈의 깊은 계곡은 순식간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깨끗한 돌, 밝은 물속에 한가로이 떠도는 물고기들은 내가 어디에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잊게 해줬다. 수억년 전의 포유류 이전의 물고기로 돌아간 것처럼.

 

     간단한 아점 (아침겸 점심, 영어로는 Brunch) 식사. 빵과 우유, 포도, 복숭아. 민박집 주인께 인사드리고. 집으로 출발. 동해고속도로를 거쳐서, 영동고속도로, 이천에서부터는 42번 국도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진부IC에서 이승복기념관 근처의 송어횟집 운두령을 들려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이곳은 영동고속도로를 지나갈 때는 꼭 들르는 곳이다.

 

      평촌의 권영진의 집앞에 오니 오후 7시. 아쉽지만 그도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나도 우리집 아이들과 아내가 보고 싶었으므로 지체없이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짧았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3일간의 자유로운 시간,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아쉬움 없이 누렸던 시간 이었다. 시간은 나의 신.

덧붙이는 글 | 기억하고 싶은 여름 이야기


태그:#여행기, #스노클, #장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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