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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은둔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풍월주 경선을 주관하고 있는 국선 문노(정호빈 분).
 오랜 은둔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풍월주 경선을 주관하고 있는 국선 문노(정호빈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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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세 풍월주를 뽑기 위해 문노(정호빈 분)의 주재 하에 열린 경합에서 보종(백도빈 분)과 유신(엄태웅 분)이 각각 1승을 거둔 가운데에, 이제는 마지막 제3단계인 무술 시합만 남겨놓고 있다.

지난 8일과 14일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32부 및 제33부에서는 문노가 출제한 '신라 국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제2단계 문제를 놓고 '수험생들'이 책을 뒤적이며 골머리를 앓는 상황이 묘사되었다.

제2단계 문제 즉 2번 문항의 정답은 '(1)무력을 증진한다 (2)신흥세력을 양성한다 (3)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덕업일신 망라사방)'였다. 이 문항을 맞춘 사람은 유신이었다. 여기서 세 번째 의미인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 담긴 속뜻인 삼한통일과 관련하여 유신과 보종은 "그것은 극비사항"이라며 삼한통일만큼은 절대로 입에 담지 않았다.

이상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픽션에 불과하다. '고증'을 수단으로 하는 역사학자와 달리 사극 작가는 기본적으로 '상상'을 수단으로 하므로, 사극 줄거리를 실제 역사로 오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속의 문노가 출제한 2번 문항 즉 '신라 국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 속의 실제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의 정답을 찾아 나서기에 앞서, 우리는 신라 국호의 의미에 관한 오늘날의 접근이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몇 권 안 되는 사료와 언어학적 자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찾아내는 정답은 고대 신라인들이 생각한 원래의 정답과 다를 수 있다.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서 신라 국호의 의미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의 머릿속에는 '신라'라는 국호가 명확하게 입력되어 있지만, 고대 신라인들의 머릿속에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국호가 명확하게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라를 포함한 여러 개의 명칭이 국호로서 혼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헌에 나타난 신라의 명칭으로는 서라벌(徐羅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신량(新良), 신로(新盧), 시라(尸羅), 서벌(徐伐), 계림(鷄林), 계귀(鷄貴), 구구타예설라(矩矩吒-說羅) 등을 들 수 있다. 계림·계귀를 제외한 모든 한자음에 ㅅ, ㄹ, ㅂ 혹은 ㅅ, ㄹ 또는 ㅅ, ㅂ이 들어간 점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명칭들을 볼 때에 주의할 것은, 한자의 표면적 의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계림·계귀를 제외한 나머지 명칭들의 경우에는, 특정 발음에 맞는 한자를 골라서 붙인 것이기 때문에 한자가 어떤 발음으로 읽히느냐가 중요할 뿐 그 한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신라(新羅)와 신로(新盧)와 시라(尸羅)의 경우에, 세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이 중요할 뿐 한자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한자의 의미를 중시할 경우에는, 새로울 신(新)과 시체 시(尸)의 의미가 같다고 보아야 하고, 벌일 라(羅)와 화로 로(盧)의 의미도 같다고 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한자가 혼용된 것은, 신라의 최초 국호를 나타내는 특정한 신라어 발음이 사람과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발음되고 그 각각의 발음에 대해 제각각의 한자가 부여된 데에 따른 결과라는 게 전몽수·양주동·조지훈 같은 언어학자들의 인식인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여러 개의 발음으로 불리던 신라 국호는 4세기 혹은 6세기에 와서 '신라'라는 단일 명칭으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권4 '지증왕 본기'에는, 지증왕 4년(503)에 국호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신라라는 국호를 채택하면서 거기에 덕업일신·망라사방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편에는, 기립왕 때인 서기 307년에 덕업일신·망라사방의 의미를 담아 신라 국호를 채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사료로부터 우리는 2가지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처음에는 다양한 국호가 병용되다가 307년 혹은 503년에 신라라는 표현으로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신라 국호를 채택하면서 거기에 덕업일신·망라사방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라 국호의 세 번째 의미는 덕업일신·망라사방"이라는 드라마 속 유신의 대답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정답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전몽수·양주동·조지훈 등은 덕업일신·망라사방을 신라 국호의 원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ㅅ, ㄹ, ㅂ 혹은 ㅅ, ㄹ 또는 ㅅ, ㅂ을 담고 있는 원래의 진짜 국호가 여러 가지 발음으로 파생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발음에 제각각의 한자가 부여되었고, 이들 여러 개의 명칭이 307년 혹은 503년에 신라로 통일되면서 덕업일신·망라사방 같은 그럴싸한 의미가 사후적으로 부여되었다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그렇다면, 위의 언어학자들은 신라 국호에 담긴 원래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은 위의 여러 명칭들 중에서 어떤 것이 원래의 진짜 발음인지를 찾은 뒤에 그 발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방법으로 신라 국호의 의미를 밝혀내고자 했다.

먼저, 전몽수는 <신라의 명의>라는 논문에서, 신라의 원래 발음은 '서라벌' 즉 '실애벌'이었다고 한 뒤에 실애벌의 의미를 '곡천원'(谷川原)이라고 해석했다. 곡천원을 풀이하면, '산골짜기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가 된다.

다음으로, 양주동은 <조선고가연구> 등의 책에서, 신라의 원래 발음은 '서라벌'이었다고 한 뒤에 서라벌의 뜻은 동천원(東川原) 즉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해석했다.

마지막으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승무'의 작가인 조지훈은 '신라국호 연구논고'라는 논문에서, 신라의 원래 발음은 '서라벌'이고 서라벌은 '소로벌' 혹은 '수리벌'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소로벌 혹은 수리벌의 의미는 '상국(上國) 혹은 고국(高國)'이라고 한 뒤에, 그런 의미로부터 다시 동국(東國), 신국(新國), 신국(神國), 영국(靈國, 신령한 나라)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고 했다.

위와 같이 신라 국호의 원래 발음이 서라벌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세 학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원래의 발음인 서라벌에 담긴 의미는 '산골짜기 나라', '동쪽 나라', 상국, 고국, 동국, 신국(新國), 신국(神國), 영국 중 하나가 된다. 이를 보면, 신라인들이 지리적 특성 혹은 종교적 의미 등을 자신들의 원래 국호인 서라벌 안에 담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 국호의 의미로 덕업일신·망라사방을 제시한 것은, 위와 같은 언어학적 변천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표면적 기록을 너무 신뢰한 데에서 나온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의 문노가 출제한 2번 문항에 대한 유신의 답변은 사실상 오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꽤 점잖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함치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속이 뒤틀리면 화랑도 연병장을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국선 문노께서 오답을 정답이라고 이미 선포해버렸으니, 그런 괴팍한 문노 앞에서 그 누구도 "이것이 진짜 정답"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문노, #신라, #덕업일신망라사방, #서라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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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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