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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바위 안내소에서 숙정문으로 가는 도중의 성곽능선
▲ 서울도성의 성곽 말바위 안내소에서 숙정문으로 가는 도중의 성곽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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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학교 옆에 청와대가 있었다. 백악산 아래 푸른 기와집 옆에 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늘 백악산을 바라보며 당시 59번 시내버스를 타고 창의문 고개를 넘어 3년 동안 학교를 다녔었다. 학교 담장 밖에는 항상 사복경찰관들(?) 혹은 경호실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포위하듯 군데군데 서 있었다.

월요일 운동장에서는 비가 오는 날이 아니라면 늘 '애국조회'가 열렸다. 조회가 시작될 무렵엔 부동자세로 꼿꼿이 서서 애국가를 불렀고, 조회가 끝이 날 때면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 곳~ 북악을 등지고 솟아난 이집~"으로 시작되는 교가를 목청껏 불렀었다.

조회가 끝이 나면 교련복을 입은 학생대표 연대장의 지휘로 분열과 사열이 시작됐었다. 학교 건물 옥상 귀퉁이에 설치된 커다란 나팔모양의 확성기에선 군가 비슷한 행진곡이 경쾌하고 웅장하게 퍼져 나왔다. 학생들은 군인들처럼, 바짝 군기가 든 학도병들처럼 결연한 표정과 엄숙한 몸짓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전쟁에 나가기 전 전의를 불사르는 의식과도 같은 그런 끔찍한 행사를 치렀다.

당시 운동장에서 조회가 열릴 때 정면의 교단을 바라보면 교단 바로 뒤쪽에 대은암을 품은 백악산이 보였다. 또 연대장이 뒤로 돌앗! 하고 구령을 내려 뒤돌아서면 반대편 뒤쪽에 인왕산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어지는 우향우! 구령에 따라 오른쪽으로 하면 멀리 남산(목멱산)이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 정규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동숭동으로 놀러가서 '야자'를 땡땡이 칠 때면 마로니에 공원 뒤편 동쪽에 나지막한 낙산(駱山)이 있었다.

나는 서울 수도(도읍)를 감싸고 있는 4개의 내사산(內四山)을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보았었고, 풍수로서의 그 의미와 그 속에 담긴 통치철학과 삶의 질서에 대해 알지 못 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었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했다. 시간으로 치자면 25년 정도가 지났다. 학창시절 별 생각 없이 스치며 지나쳤던 학교 뒷산 백악산과 맞은편 인왕산,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골을 이루는 창의문을 찾아보고 싶었다. 산과 산을 뱀의 등줄기처럼, 용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길게 늘어뜨려 연결한 서울도성을 언젠가 맘먹고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보고 싶었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왔고,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도성의 성곽을 음미하려 했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뀐 후 찾아온 서울성곽

숙정문의 문루 - 서울도성의 사대문 중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은 가뭄 때가 아니라면 평소 문을 닫아 놓았다고 한다.
▲ 숙정문 숙정문의 문루 - 서울도성의 사대문 중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은 가뭄 때가 아니라면 평소 문을 닫아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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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동 성균관대학교 후문 쪽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따라 서울도성의 성곽을 걷기 시작했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신분증과 표찰을 교환하고서 성곽을 따라 호흡을 조절하며 걸어 올랐다. 성곽 안쪽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아직 한 여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들어 축축하게 옷깃을 적시는 철 지난 더위를 만났다. 그렇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성곽 안쪽에 숲을 이룬 소나무와 팥배나무, 오리나무와 아까시나무들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바람을 부채 삼아 의도적으로 더위를 피했고, 끈적거리는 땀을 떨쳐버리려 했다.   

말바위 안내소를 지나 숙정문으로 오르면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마른 이끼를 머금고 선 성벽 위의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女墻)-를 만져보았다. 화강암으로 다듬어져 쌓인 돌의 피부는 나라의 도성을 지키는 충성스런 병졸의 볼이자 손처럼 거칠고 건조했다. 빛을 많이 쬔 부분은 색깔이 바래져 있었고, 곳곳에 잡티 같은 검버섯이 피어 있기도 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성벽을 쌓고 그 위로 몸을 피하여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낮은 담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를 여장이라 한다.
▲ 서울성곽 성벽을 쌓고 그 위로 몸을 피하여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낮은 담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를 여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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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肅靖門)에 도달하니 제법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주말을 맞아 서울성곽을 찾은 등산객들이었고, 가까운 동네에서 산책 나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숙정문 누마루 그늘에서 숨을 돌리며 홍련사가 있는 동쪽 성북동 방향의 풍경을 감상했고, 초록의 나무들로 흐릿하게 가려진 반대편 삼청동 쪽을 어렴풋이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서울도성의 역사, 성곽의 역사, 그 곳에 스며든 사람의 역사를 차분히 짚어볼 수 있었다.  

1392년 역성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한 지 두 해 만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했다.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개경에는 몰락한 고려 왕조를 따르고 그리워하는 추종세력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며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정치 전략가인 정도전을 시켜 한양천도를 단행했고, 우선적으로 국가의 상징이라 할 종묘와 사직단을 가장 먼저 세웠다. 그리고 종묘⋅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간이자 존엄한 왕권을 드러내는 상징의 공간이라 할 궁궐과 성곽을 차례로 건축하였다.

개경을 떠나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는 치밀하고 철저한 풍수상의 검토와 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도읍으로서의 위상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적 지형, 한반도의 중심적 위치에 따른 외국과의 교역과 이동, 기름진 땅과 온화한 기후, 조운의 편리성 등의 조건이 골고루 전략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다 조선은 유교적 통치이념을 표방하였으니 유교의 덕목과 강령이 반영된 첨단의 도시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서울은 다양한 풍수의 조건과 통치이념의 철학까지도 온전히 반영된 준비되고 만들어진 천혜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수의 조건과 통치이념이 반영된 천혜의 도시 서울

서울도성 외곽을 감싸는 북쪽 외사산 중 하나인 북한산의 모습
▲ 멀리 보이는 북한산 서울도성 외곽을 감싸는 북쪽 외사산 중 하나인 북한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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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안쪽을 감싸는 내사산(內四山)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둘레를 이뤄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서울 수도를 지키는 사방 수호신으로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 남주작은 목멱산, 북현무는 백악산이 맡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울도성의 외곽으로는 외사산(外四山)이 우람하고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이중으로 도성을 방호하고 있으니 바로 네 개의 산 - 좌청룡:용마산, 우백호:덕양산, 남주작:관악산, 북현무:북한산 - 이 그것이다. 거기에 내사산의 줄기와 능선을 따라 사방으로 도성의 문이 만들어 진 것이 사대문(四大門)이고, 사대문의 중간중간에 만들어진 작은 문이 사소문(四小門)이다.

서울도성의 사대문에는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덕목이 도성의 출입을 관장하는 조형적 통로이자 관문으로 구현되어 있다. 즉 유교의 5대 덕목인 '인의예지신'중 인(仁)은 동쪽의 흥인지문, 의(義)는 서쪽의 돈의문, 예(禮)는 남쪽의 숭례문, 지(智)는 그 의미가 상통한다는 정(靖)으로 바뀌어 숙정문이 되어 사대문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신(信)은 서울도성의 한 복판 중앙에 보신각으로 위치하여 6백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사대문 중 하나인 숙정문의 누마루에 앉아 이것저것 혼자만의 역사적 상상을 넉넉히 즐기고 있다. 특히 숙정문은 이른바 서울성곽의 북대문으로서 남대문인 숭례문이 불(火)과 양(楊)을 의미하는데 반해 물(水)과 음(陰)을 의미한다고 하여 평소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까닭을 가만히 따져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나름 의미심장  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숙정문은 북소문인 창의문과 더불어 일년 중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을 닫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물과 음의 기운의 통로인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수해(水害)가 나거나, 숙정문 가랑이 사이 벌어진 틈으로 음란한 기운이 도성에 돌아 사회질서가 문란해진다고 생각했다니 그 해석과 풍수적 발상이 묘하고도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활짝 열린 숙정문 누마루 위에 올라서 있으니 님도 보고 뽕도 딸 하루 동안의 기둥서방 팔자란 말인가?

늘 오묘하고 심각할 것 같은 풍수적 사상과 해석은 때론 자기만의 개똥철학을 가진 자들에게 뜻하지 않게 유쾌한 해학적 의미를 던져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숙정문에서 곡장으로 오르는 약간의 오르막길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재미난 상상,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절로 나는 음양오행과 풍수사상의 절묘한 코믹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해학적이면서 의미심장한 풍수사상

청풍암문에서 청운대 방향으로 가는 성벽 아랫길
▲ 성곽을 따라 청풍암문에서 청운대 방향으로 가는 성벽 아랫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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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른쪽은 태조 때 쌓은 성벽 돌(메주 모양의 작은 돌)이고, 왼쪽은 숙종 때 쌓은 비교적 잘 다듬어진 정방형의 네모난 성벽 돌이다.
▲ 성벽 쌓기의 구분 사진 오른쪽은 태조 때 쌓은 성벽 돌(메주 모양의 작은 돌)이고, 왼쪽은 숙종 때 쌓은 비교적 잘 다듬어진 정방형의 네모난 성벽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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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숙정문을 지나 곡장과 청운대를 거쳐 백악마루로 향하는 성곽을 따라 걸었다. 암암리에 은밀하게 나다니는 비밀통로였다는 '청풍암문'을 통해 성곽의 바깥쪽으로 나갔다. 성곽의 바깥에서 성벽 아래로 걸어가는 느낌은 사뭇 새로웠다. 북쪽으로 멀리 북한산의 주봉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는 비봉도 보이고, 대남문도 보였다. 숲 속에 포근히 안긴 듯 구기동과 평창동이 보였고, 크고 장대하게 도성의 뒷문을 굳건히 지키는 북한산의 위용을 음미하며 볼 수 있었다.

'청풍암문' 밖에는 성벽을 쌓은 시기에 따라 돌을 깎고 다듬은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최초 축성시기인 태조 때 성벽의 돌은 메주만 한 크기로 엉성하게 쌓아져 있었으며, 조선 초기 상대적 부흥기라 할 수 있는 세종 때 쌓았던 성벽의 돌은 우물 '정'자와 비슷한 형태로 거칠고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또 가장 늦은 시기에 보수하여 축성했던 숙종 때의 성벽 돌은 장방형으로 세종 때보다 더 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채 짜임새 있게 이를 맞물리고 모자이크처럼 있었다.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돌을 떼고, 다듬고, 다루어 쌓는 기술이 변하고 발전해 온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시 종묘와 사직을 먼저 세우고 궁궐을 지으며 1396년 1월 9일부터 시작된 도성축조가 2월 28일까지 49일 만에 대부분 마무리가 되었다고 하니 그 또한 놀라울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엄청난 대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라지만 쉽사리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백악마루로 향하는 계단은 짧았지만 만만치 않은 경사의 오르막이었다. 쉬지 않고 단숨에 오르기로 마음을 먹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 사이에 눈빛과 땀 냄새, 입속의 미지근한 단내와 흐릿한 미소가 무의식적으로 교환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 헐떡이며 부지런히 오르니 금세 눈앞에 하얀 바위, 백악마루 정상의 하얀 바위가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겨드랑이에 끈적거리는 땀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백악마루 꼭대기에 부는 바람을 갈망하는 듯했다. 두 팔을 들고 가슴을 열어 원하는 만큼 바람을 쏘여 주었다. 시원했다.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백악마루 정상에서 남쪽을 향해 조망을 했다. 경복궁과 세종로가 훤히 보였다. 흐릿하지만 시청 앞 서울광장까지도 그런대로 잘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뒤로는 내사산의 남쪽 봉우리인 목멱산(남산)이 꼭대기에 뾰족한 탑을 높이 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뻣뻣한 목과 시선을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돌려가며 6백년 도읍 서울을 구경하고 마음껏 살폈다. 오른쪽의 인왕산, 왼쪽의 낙산, 앞에 보이는 목멱산 안에 넓고 오목한 쟁반처럼 놓여진 천혜의 도시 수도 서울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미묘한 감흥이 절로 솟아났다. 연무현상인지 매연 때문인지 뿌옇게 혼탁한 서울 하늘의 공기만 아니었다면 그 감흥이 더 배가되었을 테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하고자 했다.

청와대의 뒷산을 지키는 젊은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의 뒤로 지난날 광화문부터 서울광장까지 거대하게 물결치던 찬란한 시민의 촛불이 생각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 백악마루에 올라 촛불광장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기와집 주인아저씨도 겹쳐져 생각났다. 촛불을 보며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철의 산성을 쌓고서 수많은 민초들의 저항과 요구를 묵살하고 밀어 붙였던 그이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머지않아 그에게 성공하지 못한 불행한 말로가 제발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말았다.

오래 전 조선의 임금도 시국이 어지럽고 혼란할 때면 이 곳에 올라 서울도성 안에 반짝이던 백성들의 근심과 걱정, 임금께 요구하는 피눈물 나는 선정의 요구를 과연 진심으로 헤아렸을까? 아니면 저들을 어떻게 무마하고 제압할지 고민했을까?

백악마루에 서니 찬란한 촛불이 생각났다

백악산의 정상에서
▲ 백악마루 백악산의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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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마루에서 창의문을 향해 급한 내리막으로 놓여진 계단을 한 발 한 발 디뎌 내려갔다.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이어진 여장과 성벽의 계단을 내려딛으니 가끔 무릎이 시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산등성이로 어깨가 부서져가며 돌을 운반하고, 손에 피가 터져가며 돌을 깨고 쪼았던, 목숨을 걸어 성을 쌓았던 가련한 석공들과 힘없는 민초들의 운명을 생각하니 가슴이 애잔하게 저려왔다. 생각지도 않은 슬픔이 밀려왔다.

1396년 1월부터 2월까지 그 추웠던 날 서울도성의 축성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차가운 북서풍의 바람이 휘몰아치던 백악산 등줄기의 그 해 겨울은 냉혹했을 것이다. 당시 한양의 전체 인구가 약 5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도성을 쌓는데 전국에서 동원된 인원은 약 11만 8천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무너진 곳과 미완성된 곳을 보수하고 개축하느라 추가로 동원된 인원도 7~8만 명 정도라고 전해진다.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징발된 노비와 빈농과 힘없는 백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단하고 힘겨운 노역의 고행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으리라. 도성을 쌓는 공사기간 중 사망자 숫자만 872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곳에서 생사를 달리한 민초들의 운명은 또 얼마나 허망한가? 산에서 잠을 자고, 먹으며 가족들과 떨어져 온 밤을 그리움으로 지새웠을 그들의 뼈아픈 고통은 이 서울도성에 과연 어떤 흔적과 자취로 의미 있게 남아있단 말인가?

목숨을 걸고 성을 쌓았던 민초들의 가련한 운명

앞에 보이는 것이 백악산이고, 뒤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 백악산과 인왕산 앞에 보이는 것이 백악산이고, 뒤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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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30년(1448)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도성 전체의 길이는 6만892척(약 19.4km)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의 대공사였던 셈이다. 때문에 이 서울도성은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어 일을 분담시켰다고 하며, <천자문>의 첫 글자 '天'자에서 시작해 97번째 글자 '弔'자까지 순서대로 자호를 매겨 구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구간마다 판사라는 책임자를 두어 공사를 관리감독하게 하였으며, 사후에 책임을 묻기 위해 공사 구역마다 책임자의 성명이나 자호 따위를 새기는 이른바 '공사실명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성벽 곳곳에는 당시 구간별 책임을 맡았던 자들의 성명이나 기록이 남아있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백악마루 내리막 계단을 다 내려오니 서울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인 북소문 즉, 서대문(돈의문)과 북대문(숙정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창의문(彰義門)이 있었다. 창의문은 서울 사소문 중 유일하게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문으로 이 곳 계곡의 이름을 따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담긴 창의문 누마루 아래 홍예를 지나 근처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면서 꼬르륵거리는 배창시를 주먹밥으로 꾹꾹 채웠다.

얼마 후 다시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어릴 적 집 앞의 담벼락에 손을 짚고서 쳐다보면 바로 눈앞에 인왕산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 시간에 수묵화로 즐겨 그렸던 인왕산이었다. 그 옛날 호랑이로 유명한 그 인왕산을 겁도 없이 터벅터벅 올랐다. 완만한 성곽의 능선을 따라 두리 뭉실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그 인왕산을 올랐다. 한 낮이 되자 뜨거움과 더위는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루 종일 미약했던 낮 바람이 솔~솔~ 약간의 성의를 다해 불어왔다. 그럭저럭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그런 바람이었다.
서울도성 사대문 중 북대문(숙정문)과 서대문(돈의문)사이에 있는 북소문이 즉, 창의문이다. 이 곳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 창의문 서울도성 사대문 중 북대문(숙정문)과 서대문(돈의문)사이에 있는 북소문이 즉, 창의문이다. 이 곳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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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을 돌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품다

인왕산을 오르며 호랑이도 생각했지만, 영조 때 화가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도 떠올려 보았다. 몽상적 상상에 의한 그림보다 실제의 경치를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 혹은 '실경산수화'가 본격 시작된 17세기~18세기를 떠올려 보았다. '모든 학문은 백성들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의 현명한 군주(영⋅정조)와 소장개혁 학자들에 의한 학풍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자국이 바위에 있었다. 검정색 마스카라가 눈물에 적셔 볼을 타고 흘러내린 것 같은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랜 세월 바위에는 비는 물론 눈이 녹아 흘렀을 것이고, 이슬과 안개도 녹아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인왕산은 자신의 바위 얼굴에 아름다운 물의 흐름을 매우 자연스런 모습으로 그려 놓고 있었다.

인왕산의 바위 계곡을 한 두 차례 짧게 오르락내리락 하니 어느새 인왕산의 정상이 앞에 있었다. 조금은 힘겨워 지친 다리를 이끌고 정상의 바위에 올라 아까와는 반대로 건너편의 백악산과 남쪽의 목멱산을 두루 조망했다. 푸른 기와집의 청와대도 한 눈에 들어왔다. 고교시절 나의 모교도 운동장부터 본관, 꾀꼬리동산까지 온통 뚜렷하게 모조리 보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한 순간만 이라도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 친구들, 선생님, 라면집 아줌마, 버스 안내양 누나,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웠다.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 미래의 희망이 될 씨앗을 품었다.
▲ 인왕산 꼭대기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 미래의 희망이 될 씨앗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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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꼭대기에는 자유로운 비행으로 노니는 잠자리 떼가 많았다. 문득 그들의 자유로운 비행이 부러웠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훨훨 하늘로 날아 저 아래 보이는 사직단까지 내려가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무모한 상상이었다. 가져온 물병을 들이켜 목을 축이고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은 온통 내리막이라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이 출렁출렁 거렸다. 그래서 빠르지 않게 걸었다. 내려오는 중간 인왕천(仁王川)에서 샘물을 한 바가지, 아니 두 바가지를 마시니 기운이 났다. 샘물을 마시니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인왕산을 내려와 사직단 위 공원에 들렀다. 그리고 그늘 벤치에 앉아 오늘의 서울성곽 답사를 가만히 곱씹어 보며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원함과 상쾌함이 피로를 달아나게 했다. 뭔지 모를 뿌듯한 보람,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역사에 대한 되짚음, 오늘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미래의 희망을 생각할 수 있는 씨앗이 가슴 속에 품어지는 느낌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5일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다녀온 답사 코스 : 성균관대 후문-말바위 안내소-숙정문-곡장-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인왕산-사직단 약 거리는 12km정도이며, 신분증 지참하여야 하고, 시간은 약 4~5시간 정도 소요



태그:#서울성곽, #서울도성, #백악산, #숙정문,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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