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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불행하게도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런 연줄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기회조차 잡기 어렵다.

신임 김준규 검찰총장은 임용되자 학연, 지연으로 묶인 검찰문화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검찰 데이터베이스에서 출신지와 출신고교를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공정해야 할 우리사회를 좀먹는 근본 폐해는 지연, 학연, 혈연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총장 말대로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를 삭제한다고 해서 이 뿌리 깊은 문제가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이상하게 법조계는 아래 기수가 수장으로 등용되면 그 선배들이 당연한 것처럼 줄줄이 사표를 낸다. 참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싶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살아가야 할 근본인 밥그릇을 보장해주는 직장을 내놓기가 얼마나 두려운가. 그러나 그들은 사표를 내도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어 안심하기 때문일까. 학연이 만들어낸 굴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내정되었다. 이를 두고 그가 대통령과 '동문'인 고려대를 나왔기 때문에 낙점됐다는 분석이 많다. 이귀남(사법시험 22) 전 법무부 차관의 장관 내정 소식에 법무부와 검찰에선 "의외의 인사"라는 반응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전임인 김경한 장관(사법시험 11회)보다 11기수나 아래라는 점도 파격인데 여기다 고려대(학연)-대구·경북(지연)'이라는 현 정권 검찰 인사의 코드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준규(21회) 검찰총장의 사법시험 한 해 후배라는 점이 뜻밖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행사하는 법무장관은 통상 검찰총장의 선배가 맡아왔다. 기수에 따른 서열문화가 뿌리 깊은 법무·검찰 조직에서 이는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러나 김 총장의 2년 선배인 권재진 전 서울고검장이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기용됐기 때문에 연거푸 유례없는 '기수 역전' 인사가 이루어졌다.

현 상황을 살펴보면 사법시험 기수로 가장 '선배'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정점에 서서 한 기수 아래 총장이 있는 검찰을 '직할통치'하는 구도가 그려진다. 민정수석은 차관급이고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은 장관급이긴 하나, 기수가 앞서고 청와대라는 배경을 지닌 민정수석의 입지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연, 학연, 혈연의 이런 폐해는 그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일어났지만 이번 제주지사 주민소환투표에서도 여실히 그 마각을 드러냈다.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3명에 두 명은 투표를 하겠다고 응답했으나 당일 투표율은 11%에 불과했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아마도 소도시라는 지역적인 특색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좁은 지역이다 보니 모두가 얼굴 다 아는 처지에 서로 반대의 의견으로 대립했다가는 살아가는데 불리함도 있을 것이고, 불편함도 있어 고민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투표소 앞까지 갔다가도 이장이 돌려보내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간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돌아서는 심정이 오죽하랴 싶어 한편 이해도 되지만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공정사회가 오려나 싶어 한심하기 그지없고 걱정이 앞선다. 서로 지근거리에 살면서 모든 것 다 아는 처지에 곤란한 관계는 만들지 않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혈연과 지연이 만든 굴레다.

세계는 물론 우리 자신까지도 놀라게 한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던 히딩크 감독은 이 모든 것을 배제했기에 가능했다. 만일 한국인 감독이었더라면 결코 이룩해내지 못할 신화였다. 이는 한국감독의 실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사방에서 얽힌 이런저런 굴레들에 의하여 전 방위로 올라오는 청탁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찬 교육부장관이 들어서면서 교육계에 한바탕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런 개혁은 그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교육계 인사가 아닌 외부인사이었기에 그 모든 굴레들로부터 자유로워 끊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인 물은 한 번 뒤집어주어야 맑아진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고여 있을 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느 곳을 가나 학연, 지연, 혈연 없이는 혼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다. 안 되는 일도 이런 저런 인연의 줄을 찾으면 의외로 쉽게 풀리게 된다.

해일이나 태풍이 우리 생활에 주는 피해도 크지만 주는 이로움도 그에 못지않다. 거센 폭풍이 바다 밑바닥까지 한바탕 휘저어주면 수많은 것들이 회전되어 정상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가끔 굴레를 벗어나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개혁이 필요한 곳은 과감하게 굴레를 끊고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더 이상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는 요원한 꿈일 수밖에 없다.

다단계 판매원이나 보험설계사인 주변사람들을 보면 혈연을 제일 먼저 이용한다. 상대방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를 추구해야하는 직업이라 끌어들이기 쉬운 상대는 가까운 친인척이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피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아왔다. 혈연이 만든 굴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지연, 혈연, 학연을 이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따라서 이로 인한 반사이익도 있지만 피해를 볼 확률도 그만큼 높다. 맑은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막사이사이는 정권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혈연을 끊어냈다. 그 때문에 친인척들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지만 그가 통치하는 국가는 그만큼 투명해졌다. 그 결과 막사이사이상이라는 세계적인 수상제도를 탄생시켰다.

우리나라도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학연, 지연, 혈연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가 기대하는 공정사회는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태그:#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히딩크, #막사이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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