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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퇴임 행사를 치러준 지지모임이 몇 달만에 둘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속상해 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에는 정권연장에 성공한 민주당까지 분당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오죽했으면 2005년 1월1일 단배식 때 동교동 자택으로 인사하러 간 지지모임 회원들에게 하나로 화합해서 잘 지내라는 말을 했을까. 그러나 뭉치고 화합하기는커녕 더욱 분열되어 몇 개가 더 늘어났으니,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유야 어떻든 죄송스러울 따름인데, 필자도 '노빠'로 몰리면서 탈퇴하라는 글이 올라오고, 온갖 비난과 수모를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을 연구하고 뭔가 배울 생각보다는 정당 지지를 우선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바탕으로 2004년 8월부터 카페를 운영해오고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묘한 게 있다. 필자가 카페 운영자가 된 날이 2004년 8월18일이고, 그날 첫 글을 올렸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도 8월18일이어서 필자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은 자유이니까.

 

카페를 운영하는 5년 동안 동교동 자택을 다섯 번 방문했다. 특히 2005년 어버이날 초청받아 김 전 대통령 내외와 즐겁게 지냈던 추억이 새롭다. 인류 역사 시작부터 효에 관한 이야기, 신군부에게 고초를 당하던 얘기도 해주었는데 "여러분이 김대중과 같이 간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십시오!"라는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지모임 초청은 2005년 어버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다양한 정치색을 가진 회원들이 정파에 휩쓸리지 않고, 김대중의 철학과 사상을 배우면서 업적을 홍보하고 우의를 다지는 게 목적이라는 얘기를 비서관에게 전해 듣고 초청하지 않았나 싶다. 자택 접견실에서 카페 운영방침을 설명했을 때 손뼉을 치며 만족해 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모든 행사는 대통령 비서실 허락을 받고 치렀는데, '동토의 땅'으로 불리는 동대구역과 부산역, 그리고 전북 익산역에서 환영행사를 열기도 했다. 부산을 방문했을 때는 김 전 대통령이 필자를 찾는다고 해서 정신없이 쫓아가 인사드린 적도 있고, 지난 4월에는 KTX에 동승해서 인터뷰도 하고 육성 녹음도 하면서 하의도에 다녀왔으니 보통 인연은 넘는 것 같다. 

 

 

매년 연말에는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함께 난을 보냈고, 어버이날과 이희호 여사 생일에도 축하 난을 보냈다. 6·15 선언 기념행사와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식에도 참석했으며 김대중도서관 후원의 밤과 이희호 여사가 소속된 단체에서 개최한 '사랑나누기 바자 한마당'에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2007년 겨울을 앞두고 북한 어린이들에게 '내복 보내기 운동'을 할 때 김 전 대통령이 보내준 격려금이다.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 돕기 행사여서 챙겨준 것 같은데 회원들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격려금을 받고 감사한 마음에 홍어 '밑자리'(대형 홍어)를 두 마리 구입해서 동교동 자택으로 보내드린 기억도 잊을 수 없다. 

 

고향 흙냄새 맡으면서 고이 영면하소서!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있었던 일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런데 이번 국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고인(故人)이 기뻐할 일들을 카페 회원들이 해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구, 부산, 속초 지역회원들이 도시 중앙에 애도 펼침막을 내걸었고, 하관식을 끝내고 유가족이 하토할 때 사용한 하의도 생가터 흙을 서울로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21일 점심 때 서울 여의도 국회에 설치된 분향소에 갔다가 자정에 도착해서 늦잠을 자고 군산 분향소 취재를 나가려는데 게시판에 "장례식에 대한 제안입니다"란 제목이 보였다. 지나칠 수 없어 열어봤더니 "하관 후 허토를 할 때, 하의도 흙과 봉하마을 흙을 차례로 뿌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동서화합을 의미하고 고인에게도 좋겠다 싶어 곧바로 관계 비서관에게 연락했더니 생가터 흙은 괜찮은데 봉하마을 흙을 합해서 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사물을 보는 눈이 후진국 수준인 정치인들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원망만 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하의도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배가 오후 4시 30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전화를 하면서도 생가터 흙을 영결식에 맞춰 동교동 자택까지 공수해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고향이 하의도인 김대의(53세) 회원에게 전화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렵게 연락이 되어 하의면 부면장 박상명(51세)씨와 김종우(57세) 우체국장이 옛 생가터에 가서 흙을 상자에 담았는데 육지로 공수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목포까지만 운반해주면 알아서 하겠으니 오후 4시 30분에 하의도를 출발하는 마지막 배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면 동생에게 부탁해서 목포로 달려갈 요량이었다.

 

그렇다고 군산 분향소 취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해서 대충 취재준비를 해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통화를 하던 중에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배터리가 떨어진 것이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놓고 나와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전날 서울에 다녀와 잠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렵게 취재를 마쳐서인지 심신이 몹시 피곤했다. 점심도 저녁도 못 먹고 돌아다녀 배도 고프고 힘도 빠졌지만, 김 전 대통령이 지하에서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에 견뎌낼 수 있었다.

 

 

뛰는 가슴을 졸이며 하의면 우체국장에게 전화하니까 다행히도 생가터 흙이 목포에 도착했는데 더는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했다. 긴장은 조금 풀렸지만, 이튿날 영결식 이전에 동교동 자택에 도착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목포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동생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고속버스'가 떠올랐다. 해서 우체국장에게 고속버스 택배로 부치라고 부탁했다.

 

다음으로 국회 앞마당에서 하의도 향우민들과 만장을 들고 김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는 김대의 회원에게도 전화했다. 마침 행사 중이어서 상여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염치 불구하고 행사가 끝나면 늦더라도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가서 흙 상자를 받아 동교동으로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김 전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터 흙이 자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회원(아이디 '지푸라기')의 건의로 하의도 생가터 흙을 서울로 가져올 수 있었는데, 동교동 자택에 도착하기까지 12시간은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서울도 김 전 대통령에게는 핍박을 받으며 살았던 객지인데 지하에서나마 고향 흙냄새를 맡으며 고이 영면할 수 있도록 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길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소개하지 못한 사연도 많은데, 지난 일들을 회상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아무래도 남다른 인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님, 고향 흙냄새 맡으면서 고이 영면하소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하의도 생가터 흙,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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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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