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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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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날(18일) 사법부는 무죄 판결 하나를 내놓습니다. 바로 정연주 전 KBS 사장에 대한 배임죄 사건에 대한 판결입니다. 

KBS와 국세청 간 10여 건의 조세 소송 도중에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인 사실을 놓고 검찰은 정 전 사장을 업무상 배임죄로 기소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을 통해 "조세 소송을 법원 조정의 형식으로 종결지은 데에 문제가 없었으며, 이에 대해 법률적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법원은 공소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검찰의 기소를 에둘러 비판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시민들은 정 전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수사였다는 비판을 해왔고, 적지않은 법률가들도 애초부터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온 무죄 판결 때문에 검찰과 정 전 사장을 해임한 청와대는 난감할 것입니다.

뒤늦게 정 전 사장의 무죄판결을 다시 거론한 까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무죄판결이 생각나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검찰(정부)과 법원의 판단은 다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달라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법원이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른 판결을 내리면 세상이 불행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법원이 '피고인 김대중'에게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5년 전 김 전 대통령도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의 무죄'는 '정연주의 무죄'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김대중의 무죄 판결은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20여년이 지난 뒤에야 나온 뒷북 판결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의 무죄와 정연주의 무죄는 다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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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영장없이 자행된 강제연행, 고문과 협박에 의한 조사 끝에 신군부는 김대중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합니다. 김대중의 죄목은 내란음모, 계엄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반공법위반 등 무시무시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대중은 80년 9월 계엄법정(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판결은 군사 법정에서 이루어진 재판이었기에 최종심인 대법원은 다른 판결을 내놓을 것이라고 피고인인 김대중은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81년 대법원은 신군부의 사형 판결에 아무런 법률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대법원은 "원심(군사법원)이 원용하고 있는 증거들을 기록에 대조하여 살펴보면 피고인들에 대한 이 사건 공소범죄 사실이 모두 인정되고 원심의 법률적용 또한 정당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수사기관에서 고문, 폭행, 협박에 의하여 신문조서가 작성되었고, 절차상 불법이 저질러졌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검찰관 작성의 각 피의자신문조서는 피고인들이 그 성립의 진정함을 각 인정하고 있으니 이 사건에 있어서 증거능력이 있다"고 일축합니다.

대법원의 판결 중에서 압권은 신군부의 초법적이고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법원이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대목입니다.

"대통령(당시 권한대행 전두환을 지칭)의 판단결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경우 그 선포는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할 것이므로 그것이 누구나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것으로 명백하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한 이상 당연무효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할 것이며 그 계엄선포의 당, 부당을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에는 없다."

즉 신군부가 계엄을 선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의 권한 밖이라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해석하면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 불법을 저지르건, 민주인사를 탄압하건 형식적인 재판 절차를 갖추어서 법정으로 오면 대법원은 모른 척 해주겠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당시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사법부도 어쩔 수 없었던 걸까요.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에서 '헌정질서 수호자'로

그러던 사법부가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재심 재판을 엽니다. 2004년은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 받은 지 23년만입니다. 그 사이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 남아 결국 대통령 임기까지 마치고 퇴임하였습니다. 재심 사건은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법원은 81년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우선 12·12 사태를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을 '내란 수괴'로 규정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군부의 계엄선포에 대해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행위이므로 적법성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던 사법부는 어느새 '헌정질서 파괴범죄'로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 '내란음모 주동자'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사법부는 "피고인(김대중)의 행위는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형법 제20조 소정의 정당행위에 해당하여 범죄로 되지 아니한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81년 사형선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김대중에게 23년 후인 2004년 사법부는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그 사이 내란음모 주동자 김대중은 헌정질서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사법부는 김 전 대통령이 잘못된 재판으로 949일 동안 구금된 것에 대한 보상으로 9490만원을 지급하기까지 합니다. 이로써 사법 정의는 바로잡힌 것일까요.

낯부끄러운 사법부의 김대중 무죄 판결

사법부 입장에서 보면 낯 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법부의 이러한 입장 변화는 김영삼 정부 시절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96년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반란수괴, 내란수괴죄 등으로 처벌받음으로써 나온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재판을 바로잡아 김대중의 명예를 회복한 사법부를 탓할 수야 없겠습니다. 하지만 군사 정권 시절까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논리를 따라야만 했던 사법부가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판결을 내놓았으니 김대중의 무죄 판결은 결코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은 변호사가 된 퇴직 판사가 현직에 있을 때 항상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다."

판사가 '바로 지금' 자신의 소신대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지요. 이 표현을 빌린다면 김대중 내란 음모 무죄 판결도 혹시 "지연된 정의"는 아니었을까요.

가정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지만 만일 1980년 정연주가 군사법정에 섰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아마도 무죄로 나오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지금의 사법부처럼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바로잡을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지금 사법부에 필요한 건 판사의 양심

최근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군사정권 시절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재심 재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일명 아람회 사건(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반국가단체로 단죄한 사건)도 있습니다. 지난 5월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면서 아래와 같이 자성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사법부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판사의 양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사법부는 법치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절대 권력자나 힘을 가진 다수가 진실에 반하는 요구를 하더라도 법원은 진실을 말하는 힘없는 소수의 편이 되어 그러한 소수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극심한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법관은 진실을 밝히고 반드시 이를 지켜내야만 한다.

그러나 각자의 직역에서 일상을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에 불과하였던 피고인들이 재판 과정에서 국가기관에 의하여 저질러진 약 한 달간의 불법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조작·둔갑되어 허위 자백을 하였다고 절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재판 당시 법관들은 그 호소를 외면한 채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지 못함으로써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오늘 그 시대 오욕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본 재판부의 법관들은 가슴 깊이 되새겨 법관으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으면서, 선배 법관들을 대신하여 억울하게 고초를 겪으며 힘든 세월을 견디어 온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 (서울고법 2009.5.21. 선고 2000재노6 판결)




태그:#김대중, #정연주, #무죄,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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