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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거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 큰 그늘을 드리운 나무였다. 수많은 전현직 정치인들이 여야를 떠나 그와 개인적 인연을 맺었다.

 

DJ를 곁에서 지켜본 측근들은 "정 많은 전라도 아저씨"로 기억한다. 납치, 고문, 가택연금, 투옥 등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지도자였다.

 

1987년 대선 당시 정치부 기자로 DJ를 가까이에서 취재한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그의 유머를 "죽음의 공포까지 뛰어넘은 특별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회상했다. 이른바 '해탈미(解脫美)'다.

 

유머로 풀어낸 사형판결 순간 "재판장 입이 나오면 살고..."

 

DJ는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받을 당시를 자주 언급했지만, 결코 공포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DJ는 사형선고 받던 순간을 마치 남의 일처럼 얘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이 전한 DJ의 사형선고 당시 회고.

 

"무기징역이냐 사형이냐 문젠데, 사람이 '무'하면 입이 나오고 '사'하면 입이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내가 살고, 입이 찢어지면 나는 죽는 겁니다…."

 

이처럼 DJ는 싱거운 농담으로 주변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1995년 주부를 대상으로 한 TV프로그램에 나와서도 사형수 시절을 농담처럼 회고했다고 이 의원은 전했다. 당시 DJ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데 집사람이 와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더라"면서 "그때 서운했다"고 말해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독서광'인 DJ는 대통령 시절, 바쁜 일정으로 책 읽을 시간도 없게 되자 "아무래도 감옥에 한번 더 가야 할 모양"이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비록 감옥에서였지만, 여유있게 책을 읽을 때가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지난 1995년 정계복귀 뒤 새정치국민회의로 영입된 '호남의 며느리' 추미애 의원도 애틋한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추 의원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1997년 대선 승리 후 DJ가 따로 불러 남편과 아이들 걱정을 하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며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변 사람의 개인사까지 일일이 챙겨줬다"고 회상했다.

 

추 의원은 또 "그런데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던지 어느날 아주 작은 보석함을 하나 주면서 '아이들 갖다 주라'고 하셨다"면서 "자상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애도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되고도 호통 "광주시민과 함께 죽여라"

 

이밖에도 DJ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일화들은 많이 소개되고 있다. 국민회의 시절 머리가 허옇게 센 이훈평 전 의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DJ로부터 "자네 머리가 많이 셌네"라고 말하자 "죄송하다"고 답했다. DJ가 즉석에서 "자네가 죄송하면 (백발인) 김한길 의원은 어떻게 하냐"고 되받아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동료 후배의원들에게 추상 같은 모습도 있었다. 평민당 시절 밤늦게 의원회관에서 불을 켜놓고 바둑을 두던 의원들을 본 DJ는 "국민 혈세로 운영하는 의원회관에서 전등을 켜놓고 바둑이나 두느냐"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평일 골프 치는 국회의원들도 싫어해 "골프 치면 공천도 안 준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표적인 동교동계 인사로 민주당 대표를 지낸 한화갑 동서문화재단 대표는 20일 한 인터뷰에서 감옥 안에서 '1980년 광주항쟁' 소식을 접한 DJ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DJ가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이학봉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끊임없이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 전 수석은 감옥 안 DJ를 찾아와 "우리하고 협력하면 대통령만 빼놓고 뭐든지 다 주겠다"고 말하며 광주항쟁 소식이 실린 신문을 주고 갔다.

 

한 대표에 따르면, 당시 DJ는 출옥하면 뉴질랜드 같은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편히 보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 수석이 건네주고 간 신문을 본 뒤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구나" 하고 자책하며 다시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 대표는 말했다.       

 

DJ는 회유하기 위해 다시 감옥을 찾은 이 전 수석에게 "날 죽여라, 광주시민들하고 같이 죽겠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태그:#김대중, #이낙연, #추미애, #광주항쟁, #한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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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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