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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만남의 연속'

어느 철학자는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날마다 가족을 만나고 이웃을 비롯한 숱한 사람을 만난다. 그 만남 가운데는 단 한번으로 스쳐가는 만남도 있지만, 거의 날마다 만나는 만남도, 몇 해만에 만나는 만남도, 평생에 한두 번 어쩌다 만나는 귀한 만남도 있다.

산골을 찾아준 제자 진천규 군(오른쪽, 전 한겨레신문 사진부 차장)과 텃밭에서
 산골을 찾아준 제자 진천규 군(오른쪽, 전 한겨레신문 사진부 차장)과 텃밭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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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아침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을 열자 "진천규입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담겨 있었다.

박도 선생님;

오랜만에 뵈어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날 저녁에 먹은 쇠고기도 맛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욱 좋았습니다.

가끔 뵙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족 모두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진천규 올림

첫 번째 만남

문득 그와의 만남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내가 33년간 교직생활을 한 가운데 학급 담임은 줄잡아 20번 정도 한 것 같다. 그 가운데 중1 담임은 꼭 한번 하였는데, 1972년 서울 오산중학교 부임하던 첫 해였다. 오산학교는 예사 학교와는 달리 공휴일인 3 ․ 1절 날에 기념식과 아울러 개학식을 하고, 이튿날 입학식을 가졌다. 이는 전 교주 남강 이승훈 선생이 1919년 기미 3 . 1 만세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셨기에, 그분의 겨레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후학들의 아름다운 정성이었다.

나는 그 전해인 1971년 7월 군복을 벗자마자 경기도 여주의 신성중학교(현, 여주동중)에 부임했다가 한 학기를 마치고 오산학교로 옮겼기에 교단에 선 이래 처음으로 학급 담임을 맡은 셈이었다. 그해 입학식 날, 전체 직원회를 마치고 운동장에 나가자 8백여 신입생들이 반 표지 팻말 앞에 두 열로 정렬하고 있었다.

내가 1 - 12 팻말 앞에 서자 새 교복을 입은 신입생들이 발꿈치를 들거나 고개를 뽑아 새 담임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토끼 새끼 마냥 귀여워 한 녀석씩 살펴가며 이름을 물으며 복장을 매만져 주거나 안아주면서 끝줄까지 훑어갔다.

"야, 우리 선생님 아주 싱싱하다."
"굉장히 무섭겠다."

그들은 저마다 나에 대한 촌평을 마구 조잘거렸다. 나는 햇병아리 교사로 매우 극성스럽게 그해 한 해를 보냈다. 학기 초 신입생 환영 축구대회에서는 내가 감독 코치까지 맡아가며 12개 반 중 우승을 차지하였는가 하면, 유별나게 학급신문도 만들었고, 학교 교지 및 학보 편집지도 교사로 무척 바쁘게 한 해를 보냈다. 그때는 학급 정원이 70명으로 진천규 군도 1학년 12반이었는데, 몸도 호리호리하고 글씨를 반듯하고도 개성 있게 썼던 학생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겐 그때 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이 거의 대부분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진급에 맞춰 나도 학급 담임 및 교과지도 교사로 3년을 마친 다음, 그들의 졸업과 같이 나도 그 학교를 떠나 시내 다른 학교로 옮겼다.

두 번째 만남

1990년대 중반 딸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난 뒤, 그 전까지 보았던 신문을 한겨레신문으로 바꿔 구독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면 사진보도 아래 진천규 기자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그가 아닐까 하는 반가운 마음에 신문사로 확인했더니 바로 제자 진천규였고, 우리는 곧 한 밥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전공과는 달리 굳이 사진기자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천만뜻밖에도 내 탓이라고 했다. 중1때 담임이었던 내가 학교 행사나 소풍 때 카메라로 자기들을 열심히 찍어줄 때 그 모습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졸라 당시로서는 비싼 카메라를 사달라고 떼를 써서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진 찍는 취미생활을 하다가 마침내는 전문직업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 무렵 내가 펴낸 책의 서평이 가장 어렵다는 한겨레신문에 실렸다. 그는 책의 내용이 좋아 서평이 나갔다고 했고, 나는 그가 서평 담당기자에게 중1 때 담임선생이 쓴 책이라고 자랑한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껏 그 사실 여부를 확인치 못했다. 그는 그때 자기가 다니던 한 언론대학원의 학보에도 직접 내 책의 서평을 써서 게재해 줄 만큼 신출내기 저자의 책 홍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 번째 만남

2004년 1월 31일, 이른 아침 전화벨에 잠이 깼다. 전화의 주인공은 진천규 기자였다. 그날은 나와 권중희 선생이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미국 LA에 살고 있다면서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선생님의 미국 방문을 알고 있는 바, 몇 시 비행기로 출국하느냐고 묻고는 도착시간에 맞춰 LA 공항에 나오겠다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 전해인 2003년 10월 27일, 나는 오마이뉴스에 '박도의 <의를 좇는 사람)>' 연재기사에 백범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2년간 추적하면서 그를 줄기차게 응징했던 권중희 선생 인터뷰 기사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 제1보를 실었다.

이 기사는 회를 거듭할수록 누리꾼들의 조회 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해 11월 24일, 마지막 회인 8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권 선생에게 의례적으로 마지막 소원을 여쭤보았다.

권 선생은 "로또 복권을 사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 까닭을 물었다. "만일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워싱턴 근교에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가서 원 없이 문서를 열람해 보고 싶다. 미국 워싱턴에 가자면 최소한 2000만∼3000만 원이 필요한데, 누가 나에게 그런 돈을 주겠느냐"는 게 답이었다.

그 기사가 나가자마자 곧 누리꾼의 댓글이 올랐다. ID가 '독야청청'인 네티즌이 "조금씩 모으면 3000만원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박 기자님이 주도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라고 운을 뗐고, 이어 "민족정기회복기금 마련하시죠, 많은 반응이 있을 겁니다"(ID '범부'), "희망돼지처럼 성금을 모으세요"(ID '아줌마'), "모아 봅시다"(ID '독립군') 등의 글이 올라왔다.

가장 큰 염려는 성금이 목표액에 끝내 크게 미달할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아내와 상의하자 "만일 성금이 목표액에 미달하면 이 참에 당신 학교에서 조기 퇴직하고, 그 퇴직금으로 미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몇 해 전, 학교에서 내 상식과 양심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집단으로 일어난 데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교단생활에 대한 회의와 함께 교사로서 긍지와 사명감도 모두 잃고는 가족 부양에 급급한 한 직업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튿날 퇴근길에 내수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 가서 편집진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다.

결론은 "한 번 해 봅시다"였다. 11월 28일에 권 선생의 통장을 만들어 계좌번호를 올렸다. 밤새 50여 명이 250만 원을 보내주셨다. 천만뜻밖에도 들불처럼 번지는 호응이었다. 12월 3일, 모금 1주일 만에 마침내 1000만 원을 돌파했다. 한겨레신문에 보도가 나간 12월 5일에는 하루 동안에만 1000만 원 가까이 입금되었고, 모금 시작 13일 만인 12월 11일에 1,000여 분 참여로 목표액 3000만 원을 사뿐히 넘겼다. 애초 그해 연말까지 모금을 할 계획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정말 예상 밖의 열기였다. "망설이다가 하루 일당을 보냅니다"는 날품 노동자에서 일백만 원을 쾌척하는 익명의 독자도 있었다. 곧 목표액이 달성됐다고 발표했지만 성금함에는 계속 성금이 입금되었다(총 성금 이자 포함 4036만4578원. 별도 미화 2472불, 왕복 항공권 등). 해외 동포(주로 미주)들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필자의 메일함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는 권 선생 왕복 비행기 표까지 보내준 이도 있었다. 목표 액 초과로 나의 퇴직금을 써야 하는 일은 기우로 끝났지만, 나는 이참에 정년을 5년 남긴 채 과감히 학교에 사표를 내고 방미 길에 올랐다. 당시 한 독자가 권중희 선생에게 준 항공권은 워싱턴 직항편이 없어 LA를 경유하게 되었다. 권중희 선생도, 나도 영어에 벙어리나 다름없었는데, 오직 미국에 사는 동포들만 믿고 비행기에 올랐다.

2004. 1. 31. LA 공항에서(오른쪽부터 권중희 선생, 진천규 미주 한국일보기자, 필자)
 2004. 1. 31. LA 공항에서(오른쪽부터 권중희 선생, 진천규 미주 한국일보기자, 필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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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 10시(현지시간) LA 공항에 닿아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가자 꺽다리인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선생님!"하고 소리쳤다. 만리 타향에서 옛 제자를 만나니까 눈물이 나도록 반갑고 고마웠다.

그의 곁에는 우리 일행의 방미를  환영 나온 재미 동포들도 있었다. 워싱턴 행 비행기로 갈아타기까지 6시간 동안 그의 안내로  LA 시가지를 일주하면서 무료했을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그는 2000년 6 ․ 15 남북공동선언 때 공동취재기자단으로 평양을 다녀온 뒤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하고, 곧장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자리를 옮긴 그간의 신상 변화를 이야기했다. 6 ․ 15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선언문에 합의 서명한 뒤, 손을 맞잡고 들어올리는 역사적인 장면은 바로 자기가 직접 셔터를 누른 작품이라고 옛 스승에게 자랑했다. 그 자랑이 밉지 않고 대견해 보였다.

그날 그는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나와 권중희 선생을 취재하였고,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그를 취재하는, 사제가 상호 취재하는 특별한 만남이었다. 미국에서 귀국 길에도 LA를 경유한 바, 그의  LA 현지 취재 보도로 나와 권 선생은 많은 동포들의 환영도 받았고, 그의 안내로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3박4일간 LA에 머무를 수 있었다. 

[관련기사: 권중희 선생, 미국 가다 제1신~제33신]

워싱턴 덜레스 공항 출국장에 환송 나온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오른쪽부터 이재수, 박유종, 이선옥, 권중희, 주태상, 권헌열 씨 부자, 정희수 씨)
 워싱턴 덜레스 공항 출국장에 환송 나온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오른쪽부터 이재수, 박유종, 이선옥, 권중희, 주태상, 권헌열 씨 부자, 정희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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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재미동포들의 환영모임을 마치고.
 LA에서 재미동포들의 환영모임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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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만남

지난 7월 3일 그가 강원산골 내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2009년 5월에 미주 한국일보 서울 지국장으로 부임해 온 바, 주말을 틈타 옛 담임을 찾아온 것이다. 헤어보니 그를 처음 만난 지 꼭 37년만으로, 그새 10대 애송이 소년이 50대 장년으로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마침 다음에 펴낼 책의 내용이 내가 산골에서 고양이와 멧새와 사는 이야기로 포토에세이 형식이라, 그는 나와 고양이가 대화하는 장면을 능숙한 솜씨로 사진을 찍었다. 하루를 안흥 산골에서 머물고 그는 훌쩍 떠났다.

그와 다섯 번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궁금해하다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와 나, 피차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간사가 아닌가. 다만 나는 여태까지 이어온 그와 나의 지난 인연에 감사드린다. 이 밤 미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지 못한 다른 숱한 제자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부족함이 많은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고, 여러 권의 책을 펴냈던 원천은 국내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보내준 제자들의 뜨거운 성원 때문이리라. 정말 청출어람인 그들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태그:#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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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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