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 씨가 삘기가 활짝 핀 자신의 집 '민예학당'의 마당(옛 폐교 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하고 있다.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 씨가 삘기가 활짝 핀 자신의 집 '민예학당'의 마당(옛 폐교 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자연조건이 완벽 그 자체예요. 인근에 감나무가 많고. 감물염색에 영향을 미치는 기온과 바람 그리고 햇빛과 달빛, 별빛까지도 맘에 들었어요. 특히 바닷바람과 달빛은 독특한 감색을 만들어 주거든요. 게다가 내가 추구하는 게 전라도와 잘 어울리고,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도 맘에 쏙 들고…."

서해바다가 지척인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교촌마을에서 감물염색을 하고 있는 김은희(59)씨의 얘기다. 그녀는 고향 제주와 함평을 오가며 작업을 하다가 지난 2003년 아예 폐교를 사 둥지를 옮겼다.

남편과 함께 폐교가 된 손불남초등학교 운동장에 잔디와 들꽃 씨를 뿌렸다. 연못도 팠다. 본관건물을 고쳐 염색연구소, 디자인 작업실, 작품실 등으로 꾸몄다. 패션쇼, 콘서트, 연주회, 난장파티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다목적 공연장도 갖췄다.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황토방도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서민이 입어서 좋은 옷, 서민이 먹어서 좋은 음식, 서민이 살아서 좋은 집. 한 마디로 민중예술을 추구하며 간판을 '민예학당'이라 내걸었다.

가수로 활동하던 당시 은희 씨의 음반 표지사진. 티 없이 맑은 모습이다.
 가수로 활동하던 당시 은희 씨의 음반 표지사진. 티 없이 맑은 모습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생각난다 그 오솔길/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사랑해 당신을/정말로 사랑해/당신이 내 곁을/떠나간 뒤에/얼마나 눈물을/흘렸는지 모른다오….

얼어붙은 달그림자/물결 위에 비치면/한 겨울의 거센 파도/모으는 작은 섬/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금은 남도에서 패션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걷고 있지만 오래 전 은희씨는 청아한 목소리를 지닌 매력적인 가수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솔로로, 한때는 타계한 한민씨와 함께 혼성듀오로 활동하면서 '꽃반지 끼고', '사랑해', '등대지기' 등을 부르며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에 여성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노래들로 인기를 누렸었다.

은희 씨가 자신의 작품전시실에서 감물 들인 옷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은희 씨가 자신의 작품전시실에서 감물 들인 옷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은희 씨가 함평나비대축제 때 패션쇼를 통해 선보인 감물 들인 옷들. 색깔이 참 곱다.
 은희 씨가 함평나비대축제 때 패션쇼를 통해 선보인 감물 들인 옷들. 색깔이 참 곱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한창 잘 나가던 그녀는 결혼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뉴욕주립대 패션학과(FIT)에 입학한 그녀는 의상디자인과 메이크업 등 이른바 토털 패션디자인을 배웠다.

1985년 귀국한 은희씨는 서울 압구정동에 '코디네이션센터'를 열어 국내 공연·예술계에 '코디'란 개념을 전파했다. 갤러리도 개설했다. 사업가로 대변신을 한 것. 이를 계기로 문화계 인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가수였던 제가 어떻게 천연염색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아요. 출발은 뉴욕에서 공부할 때였어요. 고 유현목 감독의 영화 '장마'를 본 적이 있는데요. 장독대에 소나기가 내리는 장면을 보고 거기 애들이 설치미술이라며 감탄을 하더라구요. 한국적인 것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은희 씨가 민예학당을 찾아 온 여성에게 감물 들인 옷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은희 씨가 민예학당을 찾아 온 여성에게 감물 들인 옷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이후 고향 제주의 한 재래시장을 지나다가 좌판에 깔린 갈중의(갈옷)를 본 그녀는 그 순간 "필(Feel)이 꽂혔다"고. 갈옷은 예부터 땡감으로 염색해 제주 사람들이 작업할 때 즐겨 입던 옷. 땀 흡수력이 빼어나고 습기와 냄새제거 효과도 뛰어났다. 몸 냄새가 상대적으로 많은 서양인들에게 맞춤이란 생각이 든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면 서양의 대중 옷인 블루진을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은 그녀는 1989년부터 제주도에서 통기타 대신 감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보셨습니까?'의 제주방언인 '봅데강(bobdaegang)'이란 상표로 갈옷 제품을 내놨다. 단짝친구인 탤런트 고두심씨 등이 힘을 보탰다.

2003년 전남 함평으로 둥지를 옮긴 이후 감물염색과 갈옷의 대중화에 탄력이 붙었다. 함평은 물론 서울 인사동과 경남 진주에 매장도 열었다. 좀더 체계적인 유통망 확보를 위한 고민도 하고 있다. 일본 도쿄,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를 순회하며 전시회와 발표회도 이어갔다.

민예학당 전시실에 있는 감물 들인 옷들. 은희 씨가 감물염색한 것들이다.
 민예학당 전시실에 있는 감물 들인 옷들. 은희 씨가 감물염색한 것들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브라운(갈색)은 우리의 멋이 담긴 토속의 색깔이에요. 우리의 흙과 된장, 초가가 그렇잖아요. 우리에겐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는데 외국인의 눈엔 기가 막힌 것이죠. 떫은 감에서 천연염료를 추출해 베에 물을 들인 갈색옷도 한국의 대표상품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어요."

은희씨는 이 색깔을 패션에 연결시키고 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올인하고 있다. 푸른색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블루진에 맞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한국적인 감색바지(코리아 브라운 진)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민예학당을 천연염색 보급과 우리옷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는 기지로 만들겠다는 것. 그렇게 되면 세계의 바이어들이 우리 지역으로 원단을 사러 오게 될 것이라고.

"남도는 모든 게 자산이에요. 유·무형의 자산을 개발하고 여기에 마케팅 감각만 더해진다면 문화산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어요. 민예학당이 그 일을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가장 전라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죠."

그녀의 꿈은 회갑이 다된 나이에 걸맞게 크다. 그러면서도 티 없이 맑은 소녀시절의 순수함 그대로 소박하다. 우리 전통의 색깔 찾기와 상품화, 문화화를 이끌며 한편으로는 민예학당을 찾는 이들에게 밥을 지어 주고 자연염색도 가르쳐 주고 싶다. 물론 고운 노래도 함께 부르고 싶다고.

정 넘치는 마을사람들이랑, 찾아와 함께해주는 친구들이랑, 그리고 언제나 푸근하게 감싸주는 남도의 자연과 함께….

은희 씨가 감물 들인 옷에 대해 설명하다가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고향 제주도에서 걸려온 전화라고.
 은희 씨가 감물 들인 옷에 대해 설명하다가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고향 제주도에서 걸려온 전화라고.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은희 씨가 둥지를 튼 폐교 운동장엔 요즘 삘기가 많이 피었다. 바닷가도 이 곳에서 지척이다.
 은희 씨가 둥지를 튼 폐교 운동장엔 요즘 삘기가 많이 피었다. 바닷가도 이 곳에서 지척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 민예학당 찾아가는 길
○ 서해안고속국도 함평나들목-함평읍-23번국도(영광방면)-돌머리해수욕장 입구-함평해수찜-교촌마을(민예학당)



태그:#은희, #민예학당, #감물염색, #함평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